오란씨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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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은 희수에게 특별할 것 없는 일과였다. 동행은 언제나 같았다. 소중한 벗이자 유일한 식구, 윌리. 그날 희수는 평소에 비하면 몹시 늦어져서야 책상 앞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뻐근한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켠 다음, 서둘러 러닝화를 꺼내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곁눈질한 복도 끝 유리창이 어두웠다. 검정과 짙은 파랑을 여러 겹 덧칠한 캔버스 같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산책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하루 한번의 산책은 윌리는 물론이고 희수 자신을 위해서도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었다.

윌리는 사교성 좋은 개였다. 아이리시 테리어. 갈색 털에는 붉은 빛이 섞여 있었고, 날씬한 몸에 세모로 접힌 귀와 검고 촉촉한 코가 상당히 귀여웠다. 희수는 명랑한 만큼 기운 찬 녀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데 늘 애를 먹곤 했다. 그날 밤에도 녀석은 산책로 밖으로 여러 번 뛰쳐나가려고 했다. 희수는 그럴 때마다 애원하다시피 하며 리드 줄을 한결 단단하게 거머쥐어야 했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니까.”

희수가 을러 보았지만 윌리는 뒷다리에 힘을 주고 반대편으로 자꾸만 달아나려고 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니. 우리 윌리, 이제 보니 나쁜 개였구나.”

늦은 봄이었건만, 희수는 청바지에 긴팔 티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거리를 지나는 동안 한 살배기 강아지와 내내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기 때문일지 몰랐다.

“덥다, 더워. 물이라도 한 병 가지고 나올걸.”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희수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일 저녁 습관적으로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하지만 희수의 의사와는 달리 윌리는 우측으로 돌아가는 수풀 길을 탐색하고 싶은 듯 한참이나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희수도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윌리는 마지못해 그를 따라왔다.

마른입술을 핥으며 희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자전거 보관대 옆 어딘가에 멎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은 구석에 겉면을 붉게 칠한 음료자판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열장 안에서는 섬뜩할 만큼 창백한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곳에 음료자판기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빨강은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유야 어쨌든 잘됐네, 마침 갈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희수가 발길을 멈추자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하느냐고 다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윌리가 컹컹 짖었다. 자신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희수가 앞으로 내처 나아가자 위협하듯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 윌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음료수 마실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잖아.”

희수가 리드 줄을 당겼다.

“뭘 고르는 게 좋을까. 데자와, 포카리스웨트, 데미소다, 솔의 눈, 오란씨……, 아직도 오란씨 같은 걸 마시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 게다가 솔의 눈이라니.”

희수가 상체를 수그리며 혼잣말했다. 그러곤 진열대에 고정된 상품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사이 머릿속으로는 동전을 투입하고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우당탕하고 좁은 통로를 굴러 내려올 탄산음료를 떠올렸다. 금속 캔의 차가운 감촉과 따개를 젖혀 여는 즉시 경쾌하게 울려 퍼질 마찰음, 자극적인 탄산의 향, 야단스럽게 부서질 기포며 인공감미료의 맛, 중독적인 목 넘김을 상상했다. 자신의 공상에 스스로 도취된 희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그때 자판기가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덜덜 흔들리나 싶더니 진열장 내부에 설치돼 있던 조명이 점멸했다.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희수가 몸을 뒤로 뺐다. 이내 떨림이 멎었고 자판기는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반듯하고 매끈하며 의혹의 여지라곤 없는 기계장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깜짝이야, 고장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희수가 손등으로 툭, 자판기 겉면을 건드렸다. 그러자 윌리가 온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정신을 뺏긴 희수는 자신의 손길에 흥분한 기계가 고양잇과 맹수나 낼 법한 소리를 흘리며 가르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건 뼈아픈 실수였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