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란씨는 맛있다

  • 장르: 호러 | 태그: #사람잡아먹는자판기 #함께써요호러
  • 분량: 54매 | 성향:
  • 소개: 희수는 음료 자판기가 고양잇과 맹수나 낼 법한 소리를 흘리며 가르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무척 뼈아픈 실수였다. 더보기

오란씨는 맛있다

미리보기

저녁 산책은 희수에게 특별할 것 없는 일과였다. 동행은 언제나 같았다. 소중한 벗이자 식구, 윌리. 그날 희수는 평소보다 몹시 늦어진 때에야 책상 앞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재택근무를 한 뒤에는 대개 그렇듯 몸이 찌뿌둥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 먹은 희수는 식기세척기를 돌린 다음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넘겨본 복도 끝 유리창이 어두웠다. 검정 바탕에 짙은 파랑을 여러 겹 덧칠한 것 같았다.

윌리는 사교성 좋은 개였다. 갈색 털에는 붉은빛이 섞여 있었고, 날렵한 몸에 반듯하게 접힌 귀와 검고 촉촉한 코가 상당히 귀여웠다. 희수는 명랑한 만큼 기운찬 녀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데에 종종 애를 먹곤 했다. 그날 밤에도 녀석은 산책로 밖으로 여러 번 뛰쳐나가려고 했다. 희수는 그럴 때마다 리드 줄을 한결 단단하게 거머쥐어야 했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니까.”

희수가 얼러 보았지만 윌리는 뒷다리에 힘을 주고 자꾸만 달아나려고 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우리 윌리, 이제 보니 나쁜 개였구나.”

희수는 청바지에 긴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연신 땀을 흘렸다.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거리를 지나는 동안 한 살배기 강아지와 끊임없이 줄다리기해야 했기 때문일지 몰랐다.

“덥다, 더워. 물이라도 한 병 가지고 나올걸.”

희수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발길을 돌렸다. 매일 습관적으로 지나는 길이었다. 하지만 윌리는 우측으로 돌아가는 더 넓은 길을 탐색하고 싶은 듯 한참이나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희수도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지못해 그를 따라왔다.

희수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걸음을 늦추었다. 그의 시선이 자전거 보관대 옆 어딘가에 머물렀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 겉면이 붉게 칠해진 음료 자판기가 보였다. 자판기의 진열대에서 섬뜩할 만큼 창백한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런 곳에 자판기가 있었던가?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몰라도 빨강은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는 설명이 기억났다. 이유야 어쨌든 잘됐잖아, 마침 갈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희수가 발길을 멈추자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느냐고 다그치는 것처럼 윌리가 컹컹 짖었다. 희수가 자신의 경고를 외면하고 내처 나아가자 위협하듯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왜 그래, 윌리?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어? 잠깐만 기다려 봐. 음료수 마실 시간 정도는 줄 수 있잖아.”

윌리를 다독인 희수가 리드 줄을 감으며 혼잣말했다.

“뭘 고르는 게 좋을까? 데자와, 포카리스웨트, 데미소다, 솔의눈, 오란씨……. 아직도 오란씨 같은 걸 마시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 게다가 솔의눈이라니.”

희수가 진열대에 고정된 상품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으로는 동전을 투입하고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우당탕하고 좁은 통로를 굴러 내려올 탄산음료를 그려 보았다. 금속 캔의 차가운 감촉과 따개를 젖혀 여는 즉시 경쾌하게 울려 퍼질 마찰음, 자극적인 탄산의 향, 야단스럽게 부서질 기포며 달착지근한 인공감미료의 맛, 중독적인 목 넘김을 상상하며 스스로의 공상에 도취돼 꿀꺽 침을 삼켰다.

바로 그때 자판기가 경련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덜커덩거리나 싶더니 진열대 내부에 설치된 조명이 점멸했다. 희수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디딘 발을 물렸다. 곧이어 떨림이 멎으면서 자판기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반듯하고 매끈하며 의혹의 여지라곤 없는 기계장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깜짝이야, 고장 난 줄 알았잖아.”

희수가 손등으로 툭, 자판기 겉면을 건드렸다. 윌리가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윌리의 돌발 행동에 정신을 뺏긴 희수는 자신의 손길에 흥분한 기계가 고양잇과 맹수나 낼 법한 소리를 흘리면서 가르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무척 뼈아픈 실수였다. 희수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반려견을 쓰다듬어 주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