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에 걸린 화살

  • 장르: 판타지 | 태그: #환상문학 #단편 #클레멘스하우스먼
  • 분량: 66매
  • 소개: 어느 왕가의 생애를 기록한 벽화에 그려진 기묘한 화살에 대한 신화를 그린 「시위에 걸린 화살」은 반역으로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극단적인 영웅주의와 그로 인한 개인의 반응을 관조적으... 더보기

시위에 걸린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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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붉은 모래 언덕들 가운데 움푹 파인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는 불타 쪼그라든 가시나무 사이로 혀를 날름거리는 회색 이집트 코브라와 민첩하게 도망치는 다리가 긴 작은 쥐, 그리고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납작한 날개의 황갈색 새를 지켜보았다.

둥그스름한 지평선 안쪽에는 그 외에 어떤 생명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엔 붉은 모래가 깔렸고, 그 위로 누런 하늘이 걸렸으며, 태양은 천구의 맨 꼭대기를 지나고 있었다.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내 왕국의 절반을 주련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권좌에 앉아 안으로는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다른 나라 군대와 싸웠던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다가 반역자인 의붓형제가 부족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 후 반역자들은 성문을 뚫고 들어와 궁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들에서 왕의 군대를 쳐부수어, 왕과 갑옷 시종을 제외하곤 그날 출정했던 왕의 군사들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게다가 그렇게 건진 목숨도 이젠 연장할 길이 막혔다. 몇 시간 내로 물가에 이르지 못한다면 왕에게 죽음이 찾아들 것을 알고, 적들이 강과 사막의 우물들을 점령한 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의 갑옷 시종을 헛되이 기다렸다. “물을 찾지 못한 거야. 갈증으로 죽었겠지. 살해되었겠지. 잡혔겠지.” 갑옷 시종의 얼굴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진정한 용기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는 잡히지 않았어. 나에 대한 정보가 악당들의 손에 미치지 않게끔 처신했겠지. 자살한 거야.”

그는 단도를 꺼내어 다시 소매에 시험해 보았다. 소매는 안개를 가르듯 수월하게 갈라졌다. 이번에는 장갑에 시험해 보았다. 장갑은 물이 갈라지듯 수월하게 베였다. 에메랄드로 만든 장식 단추만이 소매에 매달려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밝은 미래를 꿈꾸는 의붓형제를 꺾을 수 있을 듯했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으리니, 내 가죽을 벗길 일은 없으리라. 절대로!”

갈증으로 인한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부풀었다가 가라앉곤 하는 열처럼 탈진한 혈관 하나하나를 돌며 들쑤셨고, 갈증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뇌를 자극하여 세상이 갈증으로, 오로지 갈증이라는 상징 하나만으로 넘칠 때까지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모조리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그 사이로 기묘하게 강렬한 향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것은 어렸을 적 몸을 담그고 있던 욕조 위로 둥둥 떠다니던, 노란색 줄이 얽혀 있는 멜론의 향이었다.

그리고 짙은 구릿빛의 여자, 그 여자의 향이 느껴졌다. 그들은 산에서 캐온 얼음으로 달그락거리는 잔을 함께 나누었고, 술이 그녀의 가슴으로 쏟아질 때 왕은 몽롱하게 도취되었다. 여인은 왕을 매혹시켰다.

홍수에 푹 잠긴 옥수수의 향, 여름날 우물 곁에 서 있는 낙타들의 향, 젊은 시절 여울 앞에 서서 수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위대한 영혼을 보았을 때 해질 무렵의 서늘함 속에서 풍겨 오던 대추야자 봉오리의 향도 느껴졌다.

뭉개진 회향 풀들이 무성한 사이로 온종일 이어지던 추격 중에 꿀꺽꿀꺽 들이켰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한 잔의 물.

그리고 피해가 막심했던 전투의 압박 속에서들이켰던, 그러나 이번에는 밤이 늦어서야 마실 수 있었던, 잔 속으로 자신의 피가 뚝뚝 떨어져서 마실 때 불그스름한 빛이 돌았던 물 한 잔, 이 모든 것들 사이로 아스라한 기억이 하나 밀려 들어왔다.

너무 오래전이라 잊혀진, 그래서 이제는 식별할 수 없는 향,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에 스며 있었고, 다른 모든 것들을 제압했으며, 그의 머릿속 가장 깊은 한구석에서 뒤늦게 개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 냄새였다.

불안한 듯 내지르는 새들의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왕은 모래 언덕들의 골 안쪽에서 다가오는 한 형상을 주시했다.

그리고 은신처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앉아, 가리개로 쓰던 가시나무를 끌어당겼다. 충성스러운 갑옷 시종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은 노란색 머리띠로 보아, 강둑을 근거지로 하여 살고 있는, 그에게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부족 출신이며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남자였다.

그는 투박하고 여윈 데다가 모래처럼 붉은 털투성이었다. 입은 거라곤 염소 가죽이 전부였고, 유일한 무기라곤 돌을 매달은 막대기 하나뿐이었다. 등에는 바랑과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호리병을 보자 왕은 단도를 찾아 손에 쥐었다. 그의 갈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독한 고통으로 변했다. 보라! 남자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멈춰서 붉은 산중턱에 자리를 잡고는 바랑의 가죽끈을 풀고 호리병을 내려놓았다.

왕은 가리개를 밀어내고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단도면 충분했다. 완만하게 비탈진 작은 모래알들 위로 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인장이 새겨진 가락지의 보석 윗면을 손바닥 쪽으로 돌렸다.

작은 쥐와 이집트 코브라는 싸움을 멈추고 급히 몸을 숨겼고, 새는 날카로운 울음을 남기며 날아갔다. 강둑 부족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오른손을 들어올렸지만, 왕은 계속해서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막대기를 집어들어 자세를 잡더니 휘둘렀다. 하지만 다시 막대를 내리곤, 또 다시 평화의 몸짓을 했다.

그러자 왕도 멈춰 서서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현기증이 났고 몸도 쇠약해져 있었으며, 그 남자가 자신의 상대가 되기에는 신중하고 대담하며 기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후 그 강둑 부족민이 말했다. “싸울 생각을 버리고 이리 오시오.” 왕이 다가가자 그 남자는 왕이 갈증에 시달리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얼른 호리병을 집어 내밀었다.

그러자 왕은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드리며 물을 마셨고, 절반은 비어버린 병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강둑 부족민은 음식도 건넸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 함께 앉아 마치 형제처럼 빵을 나누어 먹고 호리병의 물을 마셨다.

하지만 강둑 사람의 손을 거쳐온 호리병은 거의 비질 않았다. 그는 왕의 갈증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왜 왕이 불안해 하는지 몰랐다. 그는 눈에 그늘을 드리우며 왕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말을 달리는 사람들이 있더이다.”

왕의 눈에는 그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야생 나귀 족의 군대일 거요.” 강둑 부족 남자가 말했다. “사흘 동안 나는 밤 사자 사냥꾼이 되길 거부하고 이 사태를 막으려 한 내 부족 사람들을 찾아 남쪽으로 야생 나귀 족을 따라왔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왕의 편이군.”

“우리들은 사자 족이지 나귀 족이 아니오. 왕께서 아셔야 하오!” 그리고 그는 상투적인 충성의 말을 덧붙였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왕의 치세가 계속되시길. “

여전히 그는 왕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북쪽으로 가고 있소. 전투병들이고, 그 수도 아주 많소. 강의 수로를 향하는 중이었소.” 그는 바랑과 호리병을 들고 중얼거렸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이 언덕으로 올까? 왕실의 군대라 해도, 손에 무기를 들고서는 안 되지!”

“멈추어라!” 왕이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돌아서서, 사막의 붉은 모래 언덕 한가운데에서 위엄 있게 말하는 왕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물과 빵을 주었네. 거기에 세 번째 부탁을 더하겠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난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소.” 강둑 부족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듣게나! 그대는 사람들에게 가서, 왕의 군대가 올 때까지 적에게 대항하여 언덕의 통행로를 지키라고 고하게. 그대는 내 이름을 알 것이야. 그리고 왕에게 어떤 소원을 청하고 싶은지 말하게. 내가 그것을 들어주리니.”

“그렇다면 증거를 주시오.”

“그대가 왕의 적들과 마주칠지도 모르니 증거는 지닐 수 없네. 그대에게는 내 손과 내 눈이 증거가 될 것이네.”

왕은 그의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만족할 때까지 서로를 응시했다. 손을 놓으며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스피드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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