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 장르: 판타지, 역사 | 태그: #김유신 #천관녀 #여우
  • 평점×20 | 분량: 32매
  • 소개: 무전여행을 하다 할아버지 댁에 들른 주인공이 손님에게서 김유신과 천관녀의 비화를 듣는 이야기 더보기

여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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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무전여행을 하던 나는 도중에 연락도 없이 무작정 할아버지 댁을 찾아갔다. 마음씨 좋은 트럭 운전수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가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식당에서 밥을 얻어 종업원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거나 눈에 띄는 마을회관이며 아무 교회에나 들어가 잡일을 도우면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조르기를 반복하다 겨우겨우 할아버지가 사는 동네에 도착하니 꼬락서니가 아주 말이 아니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걷느라 녹초가 된 나는 여기 할아버지의 막내 손자가 왔노라고 고하자마자 툇마루에 길게 뻗었다. 그 동네 8월 더위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나는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길게 빼물고 헐떡였다. 등목 생각만 간절했다.

 

하지만 안에서 나와 나를 맞아 준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흰 옷을 입은 선객이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할아버지는 그제부터 제주도로 관광 가셨고, 자기는 할아버지의 옛 제자인데 근처에 여행차 왔다가 집도 봐 드릴 겸 묵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근처의 조그만 중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할아버지는 매해 방학마다 여행 다니는 재미로 사셨다. 나도 열 몇 살 때부터 틈만 나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나서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제 할아버지 역마살이 그대로 내렸다며 혀를 차곤 했다. 몇 년 전에 정년퇴임한 뒤로는 집에 붙어 있는 날을 세는 편이 빠를 할아버지였으니 안 계실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으나 선객이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초면에 거지꼴이 다 된 몰골을 보이기가 민망하여 자기소개만 겨우 하고 버벅대자니 손님은 차가운 물을 한 대접 떠다주며 선뜻 등목을 권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웃통을 벗고 물을 끼얹어달라고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이없지만, 그때 나는 더워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는데다 여기저기 찔러보고 민폐를 끼쳐야 하는 무전여행자의 특성상 넉살까지 좋아져 있었다. 넙죽 받아들였다. 극락이 따로 없었다. 손님은 피곤할 테니 먹고 일찍 자라면서 저녁상까지 차려줬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집밥을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봉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그날은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곯아떨어졌다.

 

 

손님은 꽤 묘한 사람이었다. 미인이긴 했지만 그냥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하니 구분이 안 갔다. 나이도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와 잡담할 때는 열여덟 먹은 학생처럼 잘 떠들다가도 어떻게 보면 스물일곱 먹은 젊은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또 언제는 느물느물한 중년 사내나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할아버지 제자였다는데 피부는 어찌 그리 흰지. 이 근처는 다 깡촌이라 할아버지 제자들은 하나같이 농사일 돕느라 시커멓게 탄 농부 아들들인데. 도시로 이사 간 지 오래되어 도로 희어졌나 싶었지만 손까지 그리 고울 수는 없을 터였다. 노란 기가 도는 옅은 갈색 눈에는 묘한 깊이가 있어, 마주앉아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하다가도 한 번 눈을 마주치면 좀처럼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내가 넋을 놓고 한동안 손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손님이 눈웃음을 지어 나를 그 묘한 주박에서 풀어 주었다. 그러면 나는 머쓱해져 괜히 방 구석이나 밥숟가락만 열심히 노려보곤 했고, 손님은 내 어색한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먼저 입을 열어 우스갯소리를 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손님은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있는 사람이었다. 말주변도 좋아서 손님의 이야기를 듣다 배를 쥐고 웃었던 적도 많았다. 시골이라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서로 여행 다닌 이야기를 해 주는 사이에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점도 있었고, 할아버지 제자였다면 그쪽이 틀림없이 연상일 텐데 말을 놓으시라 권해도 나한테 계속 존대를 하는지라 끝내 말을 트지는 못했지만. 나는 역사를 좋아해서 여행 중에도 근처에 유적지가 있는 걸 알면 꼬박꼬박 들르곤 했는데, 이 손님도 역사에는 일가견이 있는지 그쪽 이야기만 꺼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곤 했다. 수백 년 전의 일을 마치 자기가 겪었던 일인 양 말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이야기꾼의 버릇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역사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내 수준이라는 게 교과서와 다른 역사책 몇 권에서 주워섬긴 것이 전부였던 데 반해 손님의 화제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거니와 꽤나 재미있었으니까.

 

내가 할아버지 댁에 온지 나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우리는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김치와 찐 감자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할아버지가 하던 대로 모깃불을 피워 놨지만 이따금 독한 산모기가 덤벼들어 성가시게 굴었다. 왠지 아까부터 게속 손님은 안 물고 내 다리만 줄기차게 노리는 것 같아 조금 약이 오른 나머지 내심 저 쪽으로 가라, 저 쪽 살이 훨씬 부드러울 거다 하고 되뇌고 있자니 손님이 쿡쿡 웃으며 품안에서 누런 종이쪼가리를 하나 꺼냈다. 손님이 그것을 연기 속으로 던지자 귓가에서 말짱거리던 모기 한 마리가 거짓말처럼 모깃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벌레도 날아들지 않았기에 나는 손님에게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조금 머쓱했다.

 

술이 얼근히 들어가자 손님이 불쑥 김유신 이야기를 꺼냈다. 손님은 김유신이 천관녀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하여 애마의 목을 자른 일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안다고 대답했다.

 

“켕키는 일이 있으면 괜히 화를 내면서 얼버무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해야 하나. 천관은 보고 싶은데 어머니 말씀을 대놓고 어길 수는 없고, 그러던 차에 말이 보란듯이 거기로 가니까 부아가 나서 애꿎은 말한테 화풀이를 했던 거겠죠. 젊었을 때라 그런가, 좀 경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면 또 약아 보이고.”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에요. 유신랑은 그때 말 목을 자르지 않았습니다. 거짓말로 부모에게 둘러댔던 거죠.”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손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유신랑은 천관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대놓고 찾아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 저절로 발길을 향했다는 핑계를 대어 슬쩍 천관과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관은 일부러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인에게 낭을 잠깐 술이나 마시다 가는 보통 손님들을 들이는 방으로 데려가도록 하여 박주와 거친 안주를 내주며 푸대접했지요. 낭이 내 지엄하신 어머니의 뜻까지 거스르며 오랜만에 어려운 걸음을 하였건만 천관은 어이하여 나오지 아니하고 평소에 마시던 좋은 술은 어디로 갔느냐고 따지자 천관은 하인에게 이리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씨께서는 공이 발길을 끊자 상사병에 걸려 가게 문을 걸어잠그고 몸져누운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간 손해가 막심하여 더이상 좋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