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운하시곡(夜雲下豺哭) (하)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진심으로 탄복한다. 그새 많이 강해졌구나.”

운은 웃었다.

“오로지 네놈 가슴에 같은 상처를 새 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검을 휘둘러왔다. 수많은 낮과 수많은 밤. 아씨를 사모하는 날보다 네놈을 증오하는 날이 더 많았지. 그러는 동안 나는 너와 같은 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죽은피가 흐르는 사람 같지 않은 놈.”

나는 피 웅덩이를 피해 운의 곁에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숨은 점차 가빠지고 있었다. 피거품과 함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했구나. 후회한다, 더 악귀가 되지 못한 것을. 그보다 더욱 후회한다, 차라리 아씨 곁에서 따스한 벗이 되어주지 못한 것을.”

“운영은 어찌 지내고 있나.”

“그 이름 감히 입에 올리지 마라.”

“원한다면 그녀를 찾아가 사죄하겠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운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먼 강을 건너가셨다. 깊고 어두운, 돌아올 수 없는 고독한.”

잠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

“오 년이 지난 일이다. 내게는 어제 일처럼 선명하지만.”

“요절했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지모진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사건이 있기 육 개월 전부터 아씨를 찾아와 자신과 혼인할 것을 강제했던 사내다. 그는 아씨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이 땅과 가은당이란 이름이 필요했을 뿐. 그러나 아씨가 이를 거절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자객이 찾아왔고, 그리고…….”

운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짚고 기를 넣어주었다. 식어가던 그의 몸이 잠시나마 따뜻해졌다. 그는 고마운 눈빛을 보내고 말을 이었다.

“지모진의 짓이라고 확신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어르신들이 그를 찾아 사람을 풀었지만 모두 돌아오지 않았지. 내가 직접 움직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그가 천문天問당의 사람임을 알아냈다. 복수를 위해 몇 번이고 조직을 꾸렸지만 번번이 손을 써보지 못하고 격파 당했다. 부끄럽게도 나만 늘 살아남았지. 복수를 위해 자결할 수도 없었고.”

“천문당이라. 서녘의 주인들인가.”

“현 강호의 지배자들이기도 하다.”

“그렇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편히 가거라. 네 복수는 내가 이어받겠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뜨였다.

“어째서 네가?”

“사죄할 수 없다면 그것이라도 대신해야겠지.”

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제야 힘겨운 업을 해결한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꿈틀거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맙다는 말을 했으리라.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운의 눈을 감겨주고 일어섰을 때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과 마주쳤다. 아까 운과 대련했던 청년이다.

“운 아저씨?”

제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누워 있는 운과 피 웅덩이를 훑고 내게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내가 그리했다.”

“……어째서?”

“오랜 은원의 청산이다.”

“이놈!”

그가 허리춤을 더듬거렸지만 칼도 차고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쯧 소리를 낸 뒤 말했다.

“지금은 이르다. 훗날 찾아 오거라. 아니, 혹 아까 말했던 대로 싸우고 싶지 않아 강자에게 굽히는 것이 네 뜻이라면 존중하겠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가 운 아저씨의 원한을 갚겠다!”

“그것도 좋겠지. 되도록이면 반드시 그렇게 해라.”

몸을 돌려 신형을 띄우려는 순간 청년이 외쳤다.

“내 이름은 자운이다! 잊지 마라! 반드시 너를 찾아갈 것이다!”

“자운이라고?”

새삼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지. 자비의 아들을 소운영에게 맡긴 것도 십오 년 전의 일이었던가.

“네가 자비의 아들이냐?”

“내 아버님의 존함을 네가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재미있군. 네가 복수해야 할 이유는 이로써 두 가지다. 운의 죽음과 네 아비의 죽음.”

“뭐…… 뭐라고?”

“강호에 일 대 일로 더 이상 적수가 없을 때 사혈공을 찾아와라. 그 전에 나를 찾아서는 네 아비처럼 개죽음이 될 뿐이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녀석을 뒤로 하고 날아올랐다. 세 번 허공을 박찼을 때 이미 뇌리에서 녀석의 이름은 잊혀지고 없었다. 사혈공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위험하기에 더욱 몸을 던지고 싶은 책무. 내게도 아직 젊을 적의 치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무엇이든 잠시나마 휴를 잊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 나 곧 죽나요?”

사명종과의 혈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아들은 사혈공을 상대로 날카로운 기습을 성공시킨 셈이었다.

“죽다니, 왜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오늘 장을 보러 나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제가 곧 죽을 것이라고요.”

“미치광이였던 모양이구나.”

“그래요? 살 방도를 찾고 싶으면 지사자知死者를 찾아오라고 하던데.”

“지사자라고?”

맙소사, 내가 왜 여태껏 그를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미심쩍어하는 아들에게 대충 얼버무린 후 밤을 틈타 그를 찾아 나섰다. 장에 왔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독특한 기의 흐름을 포착했다.

지사자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수명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읽어내는 죽음은 살 방도가 있는 죽음이었다. 나그네처럼 강호의 온갖 곳을 떠돌아다니며 그는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행사했다. 대가를 주려하면 허허 웃고 떠날 뿐이었다.

그런 그를 여기서 만나다니, 천운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가 머무는 초라한 객잔에 내려섰다. 늦은 시간까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을 부수고 들어가고픈 걸 간신히 자제하고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또 누가 내 손을 필요로 하는가?”

“장에서 제 아들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니 그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아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름에 비해 내 얼굴은 그다지 알려진 편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나를 안다면 그것은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사혈공에게 아들이 있었던가.”

정체가 드러난 이상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로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휴라고 합니다.”

“과연. 아이의 특이한 기혈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제 아들의 기혈이 특이하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끓어오르기 직전이야. 차가운 제 아비 대신에 그런 업을 진 모양이지.”

내 탓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방도가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방도야 있다네.”

“그럼 손을 써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지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재차 다그치려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설영이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봤는가?”

“아니요, 못 들어봤습니다. 그를 찾아가야 합니까?”

“찾아갈 수 없네. 이미 죽었지.”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꺼내는 것은 아닐 터였다.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네. 자네 손으로 해친 그 수많은 이들을 일일이 어찌 기억하겠는가.”

“제가 죽였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내 아우였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른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제 자식을 살려주십시오.”

“거절하겠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속에서 울컥 살의가 치솟았으나 간신히 내리눌렀다.

“제 죄는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들만큼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대답은 한결같을 걸세.”

내 인내심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지사자의 바로 앞까지 걸어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살기를 내질렀다.

“당장 내 아들을 고쳐내라. 그러지 않으면 네 혈족을 찾아내어 다 죽이겠다.”

“죽은 아우가 내 유일한 혈족이었다네.”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여지도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거란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그가 나를 놀리거나 비웃었다면 고문의 여지라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릎을 꿇어야 할까? 그래, 사혈공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무릎 꿇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저를 죽이시고 제 아이는 살려주십시오. 복수를 하실 것이라면 아이가 아니라 저에게 하십시오.”

그는 무릎 꿇은 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