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루화[赤淚花]

  • 장르: 판타지 | 태그: #판타지
  • 분량: 72매
  • 소개: 나의 형제이자 자매이며 나의 벗이여, 잠시간의 이별이야. 더보기

적루화[赤淚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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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없는 어느 밤. 수평선 너머에서 밤을 가르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눈 밝은 이였다면 별빛을 가리는 거대한 검은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만, 자정을 지났으되 새벽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달려야하는 시각이었기에 깨어있는 이는 없었다.
별빛은 가려졌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다. 사라지는 별빛의 위치가 점차 가까워져온다. 아직도 까마득히 멀었기에 다가오는데 오래디 오랜 시간이 흐른다.
별빛이 바뀌며 새벽별이 떠오른다. 아직은 만물이 잠들어있을 시각. 때문에 별빛을 가리던 무언가가 해변에 내려앉았을 때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커다란 무언가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과 닮은 다른 무언가를 부축하듯 내려앉은 후,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았다. 별빛만으로는 주변을 확인하기가 쉽지않을듯 했으나, 달없는 별빛만으로도 바다를 건넜던 무언가는 주변이 분간이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과 닮은 다른 무언가를 다시 부축하여 날아오르려던 무언가는, 자신과 닮은 다른 무언가가 심히 지친 걸 알아차리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망설이던 무언가는 홀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해안보다 쉬기 편한 곳을 찾기위해.
동녘이 어스름히 붉어온다. 별빛이 사라지고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 시각은 잠시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뒤이어 다시 동녘을 밝히는 새벽빛에 서서히 시야가 밝아져온다.
쉴 곳을 찾아 저 너머 산등성이를 향해 날아가는 무언가 역시 새벽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검붉은 비늘이 둔탁한 빛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새벽의 어둠을 닮은 날개를 펄럭이며 산 너머를 향한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이어지는 산과 산, 계곡과 계곡. 찾는 것은 쉽사리 눈에 띄지않는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쉽게 찾을만한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조금 더 시야를 낮추어 원하는 곳을 물색한다. 영원히 머무를 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잠시 마음편히 쉬어갈 곳을 원할 뿐이다.
해가 이미 천공을 오르고 있다. 바뀐 햇살의 각도에 아까는 못보고 지나쳤던 곳을 찾아낸다. 잠시 내려앉아 날개를 쉬며 주위를 둘러본다.
적당히 평평한 곳. 위에서는 아래가 보이지만 아래에서는 위가 보이지 않으리라. 뒤편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절벽을 이루는 한덩어리로 된 단단한 바위는 빗물이 약한 부분을 까마득한 세월동안 녹여 만든 동굴을 머금었다. 비록 작지만 그건 나중에 넓히면 될 일이다.
잠시 머무를 곳을 찾아내어 미소를 짓는다. 자신과 닮은 다른 무언가가 지친 몸을 쉬기에 충분하리라.
이미 해가 머리 위까지 올라왔다. 어서 해안으로 가 이곳으로 데려와야할 것이다. 마음편히 쉴 수 있도록.
다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해변이 보이는 거리까지 온 무언가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익숙하지만 낯선 광경. 그것은 작은 것들의 무리였다. 작은 것들의 무리가 보이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무리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대상은 바로……?
<감히!>
폭발할 듯 분노하여 날갯짓을 한다. 세차게 쏘아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심장을 노리는 화살과도 같았다. 뒤늦게 이쪽을 발견한 작은 것들의 무리는 당황하여 흐트러진 움직임을 보였으나 미처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이쪽이 먼저 내리꽂혔다.
촤악-!
해변의 모래와 작은 것들이 내려앉는 서슬을 이기지 못하여 공중으로 비산했다. 분노하여 꼬리로, 날개로, 머리로, 앞발로, 거치적거리는 작은 것들을 쓸어냈다. 부러지고 깨지고 박살나며 작은 것들은 저 멀리로 흩뿌려졌다.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뒤덮은 결박을 끊어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잡은 밧줄들을 힘주어 뽑았다. 밧줄에 연결되어 바닥에 깊게 박혀있던 말뚝들이 버티려 했으나 오래지않아 모조리 뽑혀나갔다. 뒤에서 작은 것들이 몰려들려는 것을 꼬리를 휘저어 해변의 모래와 함께 모조리 튕겨내버렸다. 작은 것들의 비명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었다.
<괜찮은가?>
자신과 닮았으되 색만은 검붉은 빛이 아닌 금빛인 무언가는 감았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이쪽을 보았다.
<졸려>
그리고는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누적된 피로로 더 이상 꼼짝도 못할만큼 지쳐있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아까 발견한 장소로 옮겨 푹 쉬게 해주고싶었지만, 당장은 움직이는게 무리일 것이다. 비록 장소는 좋지않지만 급한대로 잠시 쉬고, 최소한 거기까지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한 후에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는 자신도 옆에 나란히 옆으로 자신의 한쪽 날개를 펼쳐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덮어주었다. 움직이려면 적어도 하루이틀은 쉬어야할것같다.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작은 것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까 뭉쳐있던 커다란 무리는 모조리 흩어버렸던 것 같은데 그 새 또 몰려든 것이다.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것들의 둥지가 있는게 아닌가싶어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렇다면 편히 쉬기는 힘들 것 같았다. 조금 귀찮더라도 작은 것들의 둥지를 파괴해버리는 게 좀 더 편히 쉴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이틀만 쉬면 아까 보아뒀던 곳으로 이동할테니 괜히 들쑤셨다가 작은 것들이 더 귀찮게 몰려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
작은 것들이 이쪽을 향해 무어라 짖었다. 그러나 작은 것들의 소리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무시해버렸다. 이쪽이 무시하자 작은 것들이 또 무어라 짖었다. 짖는 소리가 심상치않았기에 돌아보았다. 이쪽을 공격할 태세가 만연했기에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비웃어주었다. 잇새로 붉은 화염이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던 작은 것들은 이쪽의 위협에 주춤했다.
이로써 작은 것들이 한동안은 쉽사리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턱을 앞발에 얹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바다를 건너느라 피로가 쌓여있던 참이었다. 다만 자신마저 잠이 들면 저 작은 것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작은 것들 중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펴, 평화를 위해 왔습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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