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우는 칼

  • 장르: 무협 | 태그: #로봇 #무협
  • 평점×10 | 분량: 12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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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우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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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막. 동부 거인족 반란을 평정하다

 

 

 

서안 2년, 어느 늦은 가을. 제국의 동쪽 끝은 기후가 험해, 그 땅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 땅 너머로는 제국의 징수관이 가지 않으니 이는 곧 제국의 경계였다. 사위는 고요 속에 침잠해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돌아보니 적장이 마침내 준비를 갖추고 일어섰다. 거인족의 족장은 그 키가 삼 장에 이르렀고 오른손에는 큰 도끼를, 왼손에는 전투 망치를 들었다. 제철 기술이 모자란 거인족에게서 흔히 보기 어려운 중병기였다.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노획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제국 거신병에게 맨손으로 덤벼 무기를 빼앗고 다시 그 무기로 스무 기가 넘는 거신병을 쓰러트렸다.

 

 

 

그 족장의 뒤로 삼백이 넘는 거인들이 모여 있었다. 산맥에 뿔뿔히 흩어져 살던 거인들을 규합한 것만으로도 그 능력의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일신의 무용마저 뛰어나니 제국 동부군은 지리멸렬하였다. 규합된 거인들은 무서운 힘으로 제국의 영토를 유린했다. 육개월간 밀리고 밀린 끝에 마침내 동방이열대부 대장군 엄루가 전사하니,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제국은 은성공 단야를 파견하였다. 그가 군을 정비하여 반격하니 전선이 고착되어 마침내 작금에 이르렀다.

 

 

 

단야가 나직히 물었다.

 

 

 

“그럼 약속을 지킬 테냐.”

 

 

 

거인족의 장이 답했다. 저 먼 곳의 동굴이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산의 혼은 약속을 지킨다.”

 

“그렇다면 나도 제국 무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키마.”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향했다. 일천여명의 병사와 십여명의 장수가 도열해 있었다. 거인들은 가장 작은 자도 이장 반을 넘어가고 그 족장과 같이 큰 자는 삼장에 달하였으나, 그런 자들을 앞에 두고도 제국군은 군기가 삼엄하고 기치가 정연했다. 그들을 돌아보다 부관인 마람 앞에 가서 섰다.

 

 

 

“마람, 너의 뇌호를 빌리겠다.”

 

“영광입니다.”

 

 

 

마람이 공손히 푸른 옥구슬을 내밀었다. 그것은 혼옥주라고도 불리고 넋구슬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거신병을 움직이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는 도열한 부하들의 뒤, 무릎을 꿇고 있는 열 기의 거신병들 중 가장 왼쪽의 것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으면 바로 아래에 거신병의 이름이 쓰여진 명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구슬을 끼워 넣을 만한 자리가 있있었다.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을 놓으니 혼옥주와 함께 명판의 뇌호라는 글자가 파랗게 타올랐다.

 

 

 

혼옥주의 청염이 거신병의 가장 깊숙한 내부에 이르러 쟁여둔 귀석이 불타고 뜨거운 열기가 일어났다. 자신의 기와 신, 그리고 쇠로 만들어진 체를 하나로 모으니 이를 합신이라 한다. 이십이 개의 큰 톱니바퀴와 백 팔십 구개의 중간 톱니바퀴, 팔백 사십 팔 개의 작은 톱니바퀴, 삼천 삼백 삼십 삼개의 아주 작은 톱니바퀴와 지렛대가 돌아가며 육중한 쇳덩이가 인체의 움직임을 모방했다. 그 정묘함이 인세에 다시 없을 정도였으며 오직 신의 창조물들만이 이보다 낫다 할 수 있었다.

 

 

 

거신병 뇌호는 그의 움직임을 충실하게 따라 창을 들어올렸다. 제국의 전통적인 창술에 따라 적을 향해 비스듬히 서며 양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렸다. 오른 다리는 가볍게 굽히고 왼 다리는 좀 더 굽히며 그 발 끝이 적을 향하여 섰다. 등은 곧게 펴고 시선은 적을 똑바로 향했다. 양 팔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며 창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길게 뻗지 않고 절반 가량 몸의 권역에 넣었다. 거인의 족장이 이 모습을 보니 기본에 충실하며 안정감이 있어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라라라랏!”

 

 

 

기괴한 거인의 전투 함성이 가라앉은 공기를 흔들었다. 하늘을 향해 양 손을 뻗은 터라 그 가슴이 훤히 열렸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이 뻗어나왔다. 뒷발로 땅을 밀며 반보 앞으로 나가 창을 밀어넣는다. 한 손을 완전히 놓고 오른손으로 밀어 뻗으니 거인의 걸음으로도 네 발자국은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갈랐다. 무게가 삼만관에 달하는 거신병이 내딛는 걸음에 대지가 탄식하니 눈보라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거인의 족장은 민첩하게 움직여 이를 피했다. 그렇게 큰데도 발놀림이 가볍고 소리며 진동이 거의 없었다. 피할 뿐만 아니라 옆으로 돌아 가까이 다가와 도끼를 후려치는데, 육중한 거신병은 가까스로 허리를 돌려 창대로 이를 튕겨내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무기가 충돌하자 주홍 불꽃과 함께 공기가 깨어지고 산이 웅성거렸다. 거인은 그 힘을 받아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거신병이 재차 창을 내찌르는데 이번에는 다리를 노려 아래로 찔렀다. 거인은 또 다시 뒤로 움직여 피하나 싶더니 도끼를 내리쳐 창대를 찍어버렸다. 창을 도끼로 눌러 멈춰세우고 내딛어 망치를 휘둘러왔다. 이 망치는 거신병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로 당하면 거신병의 갑주가 우그러들 뿐만 아니라 그 충격은 안의 탑승자를 부상입히고 때론 죽일 수도 있었다.

 

 

 

맹포한 일격이 바람을 흔들어 놓았다.

 

 

 

거신병은 창을 놓으며 칼을 뽑았다.

 

 

 

거인족의 족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잘려져 나간 자신의 팔과 어느새 거리를 격하여 베고 지나간 거신병을 번갈아 보았다. 떨어진 망치 위로 끈적이는 피가 흘러내렸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졌다. 피의 비가 내려 병사들을 적셨지만 그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미안하다, 마람. 너의 뇌호를 망가트렸구나.”

 

“아닙니다. 장군님의 무를 감당하기에 뇌호가 부족했을 뿐.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시니 오직 경탄할 따름입니다.”

 

 

 

망치가 횡으로 날아오는 짧은 한 순간에 몸을 숙이며, 오른 발은 오히려 숙인 가슴까지 치켜들고, 손은 칼을 뽑아 휘두른다. 그 칼이 적을 치는 순간 발이 땅에 떨어지며 발구름을 더한다. 이 모든 행위가 망치가 절반도 채 휘둘러지지 못한 사이에 이루어졌다. 인간의 몸으로 펼치기에도 어려운 한 수를 육중한 거신병으로 펼쳐내니 뇌호의 무릎 관절이 부숴져 버렸다. 다리를 완전히 교체하기 전까지는 다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람은 그러한 경지를 본 것만으로도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제국의 군사들이 승리에 기뻐하는 동안 침울한 표정의 거인들이 다가왔다. 그 중 가장 작은 거인이 앞으로 나왔다. 가장 작다 하여도 이 장 반이나 되어 앳됨을 알기 어려워으나, 육 척이 조금 못되는 단야 앞에 서자 그 기세가 위축되어 그제야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제국의 장군이여. 무명 드높은 당신이라면 명예를 지켜줄 줄 아오.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게 해 주시오.”

 

 

 

제국은 본래 벤 적장의 목을 기치에 걸고 제를 올려 전사자의 원혼을 달래곤 했으므로, 이는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다. 그러나 은성공 단야는 군인인 동시에 무인이었기에 결투에서 벤 적장에게는 그러한 수치를 주지 않았다.

 

 

 

“그리 하라. 그리고 약속을 지켜라.”

 

“알겠소. 앞으로 삼년 간 산에서 나오지도 말고 인간을 잡아먹지도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러나 삼년 뒤에는 반드시 돌아오겠소.”

 

 

 

거인들은 쓰러진 족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 거인과의 전란은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을 몰살하거나 산맥 너머로 쫓아보낼 수도 있었을 것을, 이렇게 유예를 주며 끝내야 하다니 원통합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마람은 이 상처뿐인 승리에 개탄했다. 격퇴하기는 했으나 은성공이오기 전까지 패배를 거듭해 잃어버린 장수가 수십이요, 병사의 수는 기천, 민간인의 피해는 사람이 아니라 사라진 마을 숫자를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었다. 단야는 대답하지 않고 투구와 갑옷를 벗었다. 홀가분한 무복 차림이 되어, 자신의 칼을 허리에 차고는 말 위로 뛰어올랐다.

 

 

 

“폐하께서 부르시니 장수 된 자가 거부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 결투를 이끌어내기까지 아흐레나 걸렸으니 너무 늦지 않았나 한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마람, 새로운 칙령이 올 때까지 네가 동방이열대부의 직무를 수행하라.”

 

“장군님, 설마 지금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마람, 내 말을 들어라. 곧 운룡궁에 암운이 드리울 것이다. 제국의 중심이 흔들리면 제국 전체가 흔들린다. 거인들은 삼년간 나오지 않을 테니, 너는 산맥에는 신경쓰지 말고 압강을 주시해라. 큰 거미들이 강을 건너려 할 것이다. 유역에서 기다리며 강을 건너는 중에 격파하면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을 걷게 하기 시작한 그를 쫓기 위해 마람은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장군님, 장군님! 이 무슨 말씀으십니까? 또 압강은 북방삼열대부의 관할이며 북방군이 막아낼 텐데, 저희더러 막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십니까?”

 

“북방삼열대부는 아마 운룡궁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을 막지 마라. 싸우지 마라. 제국의 군대가 서로 싸워서는 아니될 노릇이다. 다만 그 빈 자리를 대신해라. 기억해라, 마람. 동부와 북부가 모두 네게 달렸다.”

 

 

 

거기까지 말한 단야는 홀연히 말을 박차고 떠났다. 마람은 그 뒤를 쫓아 달렸으나 사람의 다리로 말을 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장탄식하며 눈시울을 붉혔으나, 장수나 병사들 중 이를 책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가진 재주가 뛰어나나 마음이 여린 마람 뿐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던 동부군의 정예들 중 울고 싶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어떤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다.

 

 

 

 

 

 

 

제 2막. 운룡궁에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다

 

 

 

은성공 단야의 본래 직책은 친왕수호대 적호단 단주이며, 현 황제 서안제가 왕위계승서열 3위의 서친왕이 되자 그 호위직을 맡았다. 서친왕이 열 살 나이에 왕위에 봉해진 후 열 세살에 서안제로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약 삼 년간 여든 한 차례의 암살 시도를 막아내었다. 암살을 막지 못한 서열 1위의 만친왕과 2위의 우친왕은 물론 서열 10위까지의 친왕이 모두 죽었음을 미루어 보면 그의 공이 얼마나 큰 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에 더하여, 거인족의 반란으로 패주를 거듭하던 동부군을 지휘하여 거인들을 밀어내고,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족장을 결투로 쓰러트리니 그 군공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개선 장군의 귀환은 너무나도 조용히 이루어졌다.

 

 

 

며칠이고 말을 달려 겨우 도착한 운룡궁은 제국의 동쪽 끝만큼이나 고요했다. 문무 백관도 없고 경비병도 없고 시녀들도 없었다. 마르고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만이 늦가을 바람에 흔들거렸다.

 

 

 

제지하는 경비병이 아무도 없었으나, 나한문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궁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대신 법륜문을 지나면서도 칼을 끄르지 않았다. 본래 친왕수호대의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현 서안제의 즉위와 함께 태무황위호장의 직위를 받아 황제를 알현할 때도 칼을 찰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선각에 들어서려 하니 창을 내밀어 제지하는 자가 있었다.

 

 

 

“멈춰라. 그대가 은성공 단야인가?”

 

 

 

단야가 가만히 보니 키가 팔척에 이르고 도끼눈에 수염이 덥수룩한 자가 서 있었는데, 전혀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운룡궁을 호위하는 이를 모두 알지는 못하나 세선각은 직접 뽑은 이들로만 호위하도록 했었다.

 

 

 

“그러는 그대는 누구이기에 나를 막는가?”

 

“나의 이름은 악위라 한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되물었다.

 

 

 

“남방의 맹장 악위인가. 그런 그대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막는가? 오히려 내가 찾아오는 그대를 막아야 할 터인데,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나를 아는군. 제국 태무황위호장께서 알아주시니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내가 세 번째로 묻는 것은 신성한 궁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아서 일 뿐이다. 만약 이번에도 어째서 나를 막는지 답하지 않는다면 더는 참지 않겠다.”

 

“참으로 오만하구나. 그런 말을 듣고도 참을 무장이 어디……”

 

 

 

악위는 호탕하게 웃으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서늘한 칼이 목에 닿아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다. 자신의 창대가 베어지는데도 알지 못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눈만 굴리는데, 짝, 짝, 짝 하고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단야는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친우인 서백이 서서 웃음짓고 있었다. 서백은 호방하게 한 번 웃고는 악위에게 말했다.

 

 

 

“악위,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이를 함부로 시험하지 마라.”

 

“… 당신이 비록 진군만병호장이라 하더라도 이 악위에게 명령할 수는 없소. 나는 오직 중현공을 따를 뿐이오.”

 

“그렇다면 그 목이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물러나라.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악위는 분하였으나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은근히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오히려 경지가 다름을 느꼈으니 자신감을 잃었다. 그가 떠나자 단야는 칼을 갈무리 하였고 서백은 그 어깨를 두드렸다. 여섯 달 만에 만나는 친우 앞에서 단야는 엷게 웃음지었다.

 

 

 

“하하, 이 친구, 반년만에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궁으로 가는지 원.”

 

“칙명을 받았으니 지체할 수 없지.”

 

“거 참 사람 하고는. 그리 서두를게 무에 있는가? 오랫만에 봤으니 가볍게 술이라도 한 잔 하는 것은 어떤가?”

 

 

 

단야는 한 걸음 물러서서 서백의 손을 떼어냈다. 그들은 서로를 말 없이 주시했다. 언제나 진중한 단야와 언제나 웃는 서백의 얼굴은 서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스산한 바람에 낙엽이 흩날렸다.

 

 

 

“폐하를 알현해야겠네.”

 

“알겠네, 알겠어. 고지식해서는. 하지만 나중에 술 한 동이 지고 찾아가지.”

 

 

 

서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단야는 그제야 칼집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서백마저 사라지자 운룡궁은 진정 고요해졌다. 정적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선각은 육건 십이년에 지어진 것으로 수백년이나 된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불을 피워 내부를 덥힐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은 싸늘하였고 한 점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문가에 무릎을 꿇었다. 본래 시종이 등청하는 이를 호명해야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폐하, 신 단야의 등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한참 뒤, 세선각의 가장 심처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답했다. “들어라.” 그와 같은 무인이 아니었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는 신을 벗고 청 위로 올랐다. 내딛는 걸음 마다 냉골 아닌 자리가 없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은성공인가.”

 

“황제 폐하 만세. 폐하의 부르심을 받자옵니다.”

 

 

 

황제가 물었다.

 

 

 

“거인족은 어찌 되었는가?”

 

“봉월산맥까지 밀어내었으며 그 족장을 베었습니다. 3년간 제국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방비를 두텁게 쌓았습니다.”

 

“짐은 그들을 소탕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렇지 않았는가?”

 

“황송하오나, 돌아오라는 칙명을 따르기 위해 서둘렀기에 그리 되었습니다. 임시로 군을 통솔하는 동부군 전벽요장 마람은 성실하며 믿을 수 있는 자라……”

 

“시끄럽다!”

 

 

 

황제가 소리질렀다.

 

 

 

“전장에 나간 장수를 이치에 맞지 않게 불러들이는 황제가 어디 있느냐? 짐이 그리 어리석게 여겨지더냐?”

 

 

 

황제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쇳소리가 났다.

 

 

 

“정녕 그대마저 나를 능멸함이냐? 내가 그대를 변방에 쫓아내어서, 내가 그대의 것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냐?”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어 있는 세선각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황량하고 공허했다. 그 안에서 울리는 황제의 말 또한 공허했다.

 

 

 

“고개를 들어라.”

 

“… 삼가 존안을 뵙습니다.”

 

 

 

황제는 쇠약해져 있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용포는 얇은 비단으로 된 여름용이었고 그마저도 흐트러져 있었다. 혼자 힘으로는 입기 어려운 용포를 억지로 걸친 탓이다. 머리는 풀어헤치고 있었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안색이 푸르고 호흡이 불규칙했다.

 

 

 

“가까이 오라.”

 

 

 

단야는 무릎걸음으로 용상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가 작고 여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은성공, 나를 안아라.”

 

“폐하.”

 

“어서, 예전 나를 안아주던 그 때처럼 안아라.”

 

 

 

팔을 뻗어 황제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황제는 작은 새처럼 떨었다. 그녀의 손발은 시체처럼 차가웠고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열에 들뜬 그녀는 쉼없이 속삭였다.

 

 

 

“은성공, 나를 버리지 말아라. 그대마저 나를 버려서는 아니된다. 은성공, 나를 보아라. 이제 나는 혼자 용포를 입을 수 있다. 도움 없이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물로 씻기도 하였다. 은성공, 나는 이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폐하. 감히 청컨데 은검의 넋구슬을 돌려주십시오.”

 

 

 

황제가 그를 밀어냈다. 힘은 없었지만 완강한 거부의 몸짓에 단야는 순순히 밀려났다.

 

 

 

“혼옥주가 필요했구나. 그걸 가지러 온 게냐? 어림도 없다. 난 그걸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어.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고. 왜인 줄 아나? 내가 그걸 갖고 있어야 그대가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목숨처럼 소중한 은검을 내가 갖고 있어야 했다. 내가 맞았지? 그대가 요구하는 것을 보니 내가 맞았구나. 역시 맞았어.”

 

 

 

울면서 웃다가 또 표독스럽게 웅크렸다.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신은 언제든지 돌아옵니다.”

 

“거짓말!”

 

 

 

황제가 악을 썼다. 기력이 쇠잔하여 다 죽은 짐승마냥 꺽꺽거렸다.

 

 

 

“그러면 왜 떠나갔느냐? 저 먼 동부로, 춥고 험악한 동부로.”

 

“신은 오직 폐하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원하지 아니하였다! 내 뜻이 아니였어! 그것도 모르는가? 그대는 그토록 모르는가?”

 

 

 

황제가 갑자기 앞섶을 풀어헤쳤다. 열 다섯 소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앙상하게 말라 늑골이 도드라진 비참한 광경이었으나 제국의 무장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황제는 품에 숨겨놓았던 구슬을 자랑스레 꺼내보였다.

 

 

 

“내가 이걸 지켰다. 흉측한 무리들이 이걸 빼앗으려 했으나 내가 지켜내었다. 은성공, 내가 그대의 은검을 지켰다. 놈들이 아무리 윽박지르고 조르고 회유하여도 나는 이것을 지켜내었어. 저 간사한 무리들, 사이한 무리들로부터…”

 

 

 

황제가 또 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돌려주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인가?”

 

“아무 것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폐하.”

 

 

 

그는 혼옥주를 받아들었다. 소녀가 품에 품고 있던 구슬은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폐하는 제국 만백성의 어버이시며 문무 백관을 다스리시는 군주이시옵니다. 이미 폐하께서 가지신 것을 다시 폐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것이 되어라, 은성공.”

 

 

 

황제가 다시 안겨왔다. 검불처럼 작고 마른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어당겼다.

 

 

 

“날 안아다오.”

 

 

 

그는 황제를 감싸안았다. 황제가 발버둥쳤다.

 

 

 

“그렇게 안지 말고 여인을 안 듯이 안아라. 나를 그대의 것으로 만들어라. 어서, 어서. 이제 은검마저 주었으니 내게 남은 것이 그것밖에 없다. 황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강철같이 단련된 무사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마구 깨물기 시작했다. 귀도 물어뜯고 턱도, 빰도, 어깨도, 물어뜯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어뜯었다. 근육까지 닿는 상처는 없었으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몹시 흘렀다. 단야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돌연 나직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매가 나무에 내려와 쉴 적에

 

구름이 해를 덮었다.

 

깃털을 고르니 바람이 험하다.

 

창칼을 다듬는 자

 

피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늘을 배회하는 매의 그림자

 

내 육신 스러지면

 

너와 같이 쉬련다

 

 

 

전몰한 장병들을 위로하는 장송곡이었다. 자장가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는 같은 노래를 반복하여 불렀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제는 마침내 잠잠해졌고, 흐느끼다 이윽고 잠이 들었다.

 

 

 

피와 눈물로 더럽혀진 얼굴을 닦아주려다 그만두었다. 황제가 다시 깰까 두려웠던 것이다. 황제를 용상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앞섶을 여며주었다. 또 그 위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었다. 그는 뒷걸음질쳐 세선각을 나왔다.

 

 

 

“신 단야, 퇴청하겠습니다.”

 

 

 

갑자기 울음소리가 커졌으나 그는 뿌리치고 걸어나갔다. 가을 바람이 스산하여 추운 것을알았다.

 

 

 

 

 

제 3막. 평생의 지기와 술과 칼을 나누다

 

 

 

 

 

운룡궁을 나와 말을 끌고 길을 걸었다. 제국의 수도 경성은 인구가 일만여 호에 달하니 진실로 역사에 유래가 없는 대도시였다. 그만큼 도시가 넓다 하나 운룡궁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또 여러 관청과 대부호, 관료들과 유수의 가문들이 땅을 많이 차지하였기에 필연적으로 많은 인구가 좁은 땅에서 번잡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허나 경성의 대로를 걷는데도 이전의 영화는 간 곳이 없고, 칼을 차고 창을 든 병사들만이 간혹 보일 뿐이요 백성은 거의 보기가 어려웠다. 장사치가 몇 명 거리에 보였으나 맥이 없고 또 물건 살 사람도 없으니 외려 착잡함을 더할 뿐이었다.

 

 

 

“나으리, 한푼만 적선해 주십시오.”

 

 

 

더러운 아이들이 손을 벌리고 구걸했다. 그냥 구걸하는 아이도 있었고 어디서 꺾어온 꽃을 파는 아이도 있었다. 하나같이 비쩍 말랐고 기운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처음 한 두번은 동전을 떨구어 주었으나 세 번, 네 번 같은 일이 있자 더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돈을 잘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금방 퍼졌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데 한 무리의 부랑자들이 그를 포위했다. 손에 손에 조악하나마 칼을 들었고 눈이 희번득거리며 피맛을 여러번 본 듯 하였다. 긴 칼을 찬 제국의 무사를 상대로 노상강도 짓이라니, 본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성의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물러서라.”

 

“그게 뭔 소린가 잘 모르겠고, 나으리가 말도 있고 돈 좀 있어뵈는데 적선 좀 하시면 복 받을 거외다. 어서 당하고 왔는지 모르지만 몸도 성치 않은데 또 험한 꼴 보실 수 있겠소이까?”

 

 

 

킬킬대며 웃더니, 단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주춤하며 칼을 내밀었다.

 

 

 

“이러지 마쇼. 우리도 송장 치우면 영 찜찜하거든, 그냥 가진 것만 내놓고 가는 것이 이로울게요.”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려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하늘을 향하자니 부끄러움이 많고 땅에 탄식하자니 조상을 뵐 면목이 없었다. 앞을 보는 것 외에는 고개 돌릴 곳 조차 없었다.

 

 

 

“미안하구나.”

 

 

 

그는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 그 눈부신 일격에 질린 자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칼을 갈무리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 말을 나눠 먹어라. 주변의 굶주린 자들도 불러 먹여라. 허나 길가는 행인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길을 걸었다. 많은 관청들이 비어 있었다. 병사도 없고 나졸도 없는 관청들이 수두룩했다. 그 많은 병사들이 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 부랑자들이 들끓었고 백성들은 더욱 더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양무감 병기고도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다만 거신각에서만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무감 병기고는 각 군에 배치되기 전의 병기들을 보관하는 곳이었고, 그 중 거신각은 이름 그대로 거신병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허나 거신각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오직 하나의 거신병만이 남아 있었다.

 

 

 

백철로 만들어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외피의 갑주는 날렵하고 완곡한 곡선을 가지고 있다. 제국 십이검의 하나이며 그 역사는 제국의 건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작에 선계의 손이 닿았다는 설이 있으나 선도의 맥이 끊긴지도 천년, 이제와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너무 늦으셨습니다. 이제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시면 속이라도 덜 끓지요.”

 

 

 

노인은 망치를 들어 내리쳤다. 깡, 하고 불꽃이 일었다. 제국 십이검은 골격부터 갑주까지 백철로 만들어져, 설사 부서지더라도 혼옥주가 있는 한 스스로를 복구할 수 있었다. 허나 무구는 백철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애초부터 무구를 갖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선인의 도는 병기를 들지 않는다 하여 거신병이 전쟁에 쓰이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 또한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병기는 철에 여러 금속을 섞어 만들 수 밖에 없었고, 무뎌지면 날을 세워야 했는데 그 거대한 무구를 관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에 전부 달굴 수가 없어 일정 부위를 달구고 두드려 원하는 모양을 잡은 뒤 다음 부분을 다시 달구고 두드리는 작업을 연이어 하는데, 이 때 각 부위의 연결점은 덜 달구어진채로 두드려져 차후에 쉽게 깨어질 염려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그 연결부를 달구고 두드리는 작업을 거친다. 창이나 망치에 비해 도끼와 칼은 날을 세우기가 특히 어려웠는데 은성공 단야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무기가 칼이라 장인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단야는 돕지 않았다. 무사에게 무사의 도가 있듯이 대장장이에게는 대장장이의 도가 있다. 불과 철을 다루는 그들의 기술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가 함부로 다가설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웃통도 벗고 망치질에 매진했다. 한 번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 쌓은 세월이 묻어나온다. 그 박자, 그 정교함. 보이지 않는 철의 결을 따라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때려 형태를 만든다.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는 많으나 그 형태 속에 강인함을 새길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좋은 대장장이로군.”

 

 

 

서백이 말했다. 그는 정말로 술을 한 동이 둘러메고 있었다. 이미 몇 잔 했는지 얼굴이 붉었다. 단야가 돌아보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