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은 지금

  • 장르: 판타지, 기타 | 태그: #이웃집슈퍼히어로 #김이환 #초인은지금 #초인 #초인법
  • 분량: 111매
  • 소개: 강남구를 수호하는 초인법이 만들어진다면?! 적나라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생생 초인 추적기. 초인법을 둘러싼 찬반 논란, 과연 이 나라의 운명은? 더보기

초인은 지금

미리보기

“신의 음성 같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녀가 말했다. 일민 미술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일 년 전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놀라울 만큼 침착한 태도였다.

“테러범이 부모님을 살해하는 동안 저는 복도에 숨어 있었는데, 소리가 들렸어요. ‘범죄자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목소리가요.”

“초인이 범죄자에게 한 경고였죠. 초인의 성대는 인간과 달라서 인간의 목소리보다 멀리 울립니다. 신의 음성이라, 그렇게 느낄 법도 합니다.”

“저도 나중에 초인 카페에서 자료를 읽어보고 알았어요. 추적자 님이 카페에 올리신 자료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초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저 쪽에 있었습니다.”

나는 차도 건너편의 교보생명을 가리켰다. 일민 미술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자 경찰이 주변을 통제했고, 나는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친 다음에야 광화문에 도착했다.

“당시 근방을 지나던 목격자들은 신이라도 재림한 줄 알았다더군요. 초인이 대기권에서 급 하강 하다가 감속 없이 갑자기 정지했기 때문에 소닉붐이 발생하면서 충격파가 주변에 울렸을 겁니다. 목격자들은 그 광경을 본 것이죠. 효자동까지 소리가 들렸다고 하더군요. 초인은 서울 안에서 초음속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때는 상황이 급박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왜 대기권 밖에 있었는지는 이유를 아직…….”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내리고, 나와 그녀를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탑승했다. 2년 전 끔찍한 테러가 벌어진 곳이지만, 공휴일인 오늘 중심가의 유명한 건물인 이곳에는 손님이 많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 나는, 1층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어떤 긴장감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열심히 자료를 모았지만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테러라서 거의 강박적으로 수집에 매달렸는데도 여전히 그렇죠.”

“추적자 님이 모은 자료 정말 많던데요.”

“따져보면 많지도 않습니다. 경찰이 언론에 공개한 것을 수집했을 뿐이니까요. 대신 정확한 정보를 찾으려 노력하죠. 아, 다른 사람에게 없는 정보도 있군요. 목격자 인터뷰를 많이 했죠.”

“저도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이죠?”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초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4층에서 내렸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테러범과 마주친 장소였다. 총으로 무장한 세 명의 테러범이 건물에 1층에 잠입해 카페 손님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위층으로 올라왔다.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총성을 듣고 엘리베이터나 비상구를 향해 밑으로 내려왔다가 테러범에게 사살되거나 인질로 잡혔다.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의 출구와 통로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선택할 도주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41명이 사망했다.

그녀와 그녀의 부모는 밑으로 내려오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쪽으로 가요.”

그녀와 그녀의 부모는 건물 4층에서 열린 전시회 때문에 이곳에 왔다가 총성을 들었다. 전시장의 다른 사람들이 확인해 보겠다며 밑으로 내려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쯤 테러범들은 경비원을 사살하고 건물의 출입구를 잠근 다음 준비해 온 현수막(‘초인을 반대하라’)을 건물 외벽에 내걸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현수막을 보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 사람들이 모였다가 테러범이 밖을 향해 난사한 총에 놀라 다시 흩어졌다. 그 때문에 행인 2명이 부상을 입고 동아일보의 유리창이 일부 파손되었다.

“여기에요.”

그녀는 4층의 전시장으로 나를 천천히 안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3층으로 내려갔다가 복도에 쓰러진 시신을 목격하고 다시 4층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출구를 찾아 5층으로 올라갔지만 비상구가 닫혀 있었다. 먼저 올라갔던 사람들이 문을 잠근 것이다. 다시 4층으로 내려온 그들은 비어 있던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 밑에 숨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같은 책상에 숨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판단이었어요. 한 명이 발견되더라도 다른 사람은 살아남길 바라신 거죠.”

그녀의 가족은 운이 좋지 않았다. 4층에 도착한 테러범들은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책상 밑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폈고 사람을 발견하면 총을 쏘았다. 가족들은 몰랐으나 사무실에는 그들 말고도 다른 사람이 숨어 있었다. 쉰 살의 회사원이던 김모씨 역시 책상 밑에 숨어 있다가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녀가 있던 책상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테러범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이 지점이에요.”

사건 발생 이후 사무실은 옆의 전시장과 통합되었다. 그녀는 전시장 중앙 비어있는 바닥에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테러범들이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책상 밑에서 나와 그들에게 덤볐다고 그녀는 말했다. 부모님이 무장한 테러범들을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지 테러범들을 유인하려 그러셨던 거예요.”

테러범들이 아버지를 사살하고 어머니를 인질로 붙잡는 사이, 그녀는 책상 밑에서 나와 복도로 도망쳤다. 계단으로 내려가려다가 올라오는 또 다른 테러범을 보았고, 숨을 곳을 찾아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벽에 설치된 소화전함을 열어 그 안에 숨었다. 테러범들은 4층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사살했으나 소화전함 안에 있는 그녀를 찾지는 못했다.

그녀는 말했다.

“원래 소화전함은 안에 소방호스가 들어 있지만 그 소화전함은 비어 있었어요.”

“소방법 위반이군요.”

“건물 주인이 소방법을 지켰다면 저는 죽었겠죠.”

그동안 테러범들은 그녀의 어머니를 데리고 5층으로 올라갔다. 잠겨 있던 비상구 문을 부수고 들어가 5층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대부분 사살하고 일부는 인질로 붙잡았다.

그때쯤 테러범도, 그리고 소화전함에 있던 그녀도 초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테러범들에게 투항하라고 외치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초인은 테러범들의 총소리를 듣고 온 거죠?”

“사람들의 비명도…….”

우리는 비상구 계단을 통해 3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마흔 한 명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가 있었다. 희생자 유족 단체가 세운 것이다. 비석 앞에 있는 많은 꽃다발 위에 그녀도 들고 있던 나머지 국화들을 놓았다.

그녀는 말했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요.”

“기일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투표 때문이겠죠.”

“추모비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요. 살인자는 아직도 살아 있는데…….”

테러범들은 초인의 경고를 듣자, 초인이나 경찰이 건물에 진입하면 인질을 사살하겠다고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초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로 5층 창문을 깨고 들어가 그곳에 있던 테러범을 붙잡았다.

5층의 테러범은 초인이 다가오자 인질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소리를 들은 1층의 테러범도 인질을 살해했다. 바로 경찰이 건물에 진입하여 1층의 테러범을 사살했으나 인질들을 구하지는 못했다. 3층의 테러범은 경찰이 오자 항복했고, 체포되었다. 1층의 테러범과 달리 3층에 있던 테러범은 인질을 살해하지 않았다.

경찰이 5층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 있던 인질과 테러범이 사망한 다음이었다. 초인은 건물을 떠나고 없었다.

5층의 테러범은 초인이 죽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테러범은 목과 얼굴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사망 원인은 질식이었다.

나는 말했다.

“초인은 테러범을 죽일 생각이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단지 테러범을 저지하려 목을 잡았을 겁니다. 그러나 초인이 대기권을 이동하는 동안 공기와의 마찰이 신체를 고온으로 달궜고, 뜨거운 손으로 테러범의 목을 잡았다가 화상을 입힌 것이죠. 화상 때문에 테러범의 기도가 부풀어서 질식했고요.”

“경찰은…….”

“경찰은 화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며 초인이 테러범의 목을 졸랐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밝혔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인은 한 번도 범죄자를 죽인 적 없죠. 항상 생포했어요. 굳이 원칙을 깰 이유가 없습니다. 불행히도 5층의 인질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상황을 증언해 줄 증인이 없습니다. 저는 초인의 행동이 일종의 과실치사였다고 보고, 집필 중인 제 책에서 이 쟁점을 다루려 합니다.”

“어머니도 5층에서 사망한 인질 중 한 명이었어요.”

십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마흔한 명이 사망한 테러다. 경찰 간부 몇 명이 책임을 물고 직위를 내놓았다. 하지만 사건의 정황을 봐도 그렇고, 구조자의 증언과 수감된 테러범의 자백을 종합해도, 테러범의 목표는 되도록 많은 사상자를 만드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목표는 초인이 보는 앞에서 살인을 저질러, 사람들과 초인이 만들었다고 믿었던 안전한 사회를 부수는 것이었다.

“초인에게 억압된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해 저질렀다고 테러범들은 말했습니다만…….”

“당연하게도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죠.”

그녀는 말했다.

그녀와 3층의 인질 네 명, 그렇게 다섯 명만이 살아남았다. 언론이 가장 많이 소개한 생존자는 그녀다. 나이도 어렸고 딸을 살리기 위해 대신 희생한 부모의 이야기도 극적이어서 언론은 그녀의 증언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에게 쏟는 관심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다.

“올 것이 왔군요.”

그녀가 말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추모비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많은 기자들이 보도 사진이나 방송 자료화면을 확보하려 서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추모비는 좋은 자료화면일 것이다. 기자 몇 명은 벌써 그녀를 알아본 눈빛이었다.

투표하셨어요? 기자들은 성급하게 외쳤다.

“나는 미성년자라 투표권이 없는데…….”

그녀는 중얼거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도망치고 싶어요.’ 우리는 비상구로 나간 다음 문을 닫고 잠갔다. 반대편에 남은 기자들이 문을 두들기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거친 함성에 놀라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 두들기는 소리와 고함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서야, 나는 돌아보았다.

“오래 서 있었나요?”

“네.”

“한동안 괜찮았는데 오늘 여기로 오느라 긴장해서 그런 가 봅니다. 건물 밖으로 나가죠.”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호흡은 돌아왔지만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 때문에 괴로웠다. 뛰는 심장에 신경 쓰느라, 그녀가 손바닥으로 계속 눈을 비비고 있는 줄은 몰랐다.

눈물을 닦은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눈물이 안 날 줄 알았는데, 나네요.”
“그런데 왜 존대를 하세요? 저는 여고생이고, 추적자 님은 아저씨잖아요.”

“어차피 인터넷에서 만났으니 존댓말을 쓰죠.”

우리는 미술관을 나와 청계천을 지나고 있었다. 개표방송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기 때문에 시청까지 천천히 걸어갈 계획이었다. 뭐라도 먹으면서 가면 어떻겠냐고 그녀에게 말했으나 그녀는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초인 카페 사람들도 시청에 많이 있을까요?”

“그렇겠죠. 아직은 광화문 쪽에 모여 있을 겁니다. 지금 만나봤자 신경만 쓰일 테니 시청 앞에 도착하면 연락해 보죠.”

“그래요……. 오늘 초인이 나타났다는 제보는 없어요?”

“아직 없습니다.”

초인의 위치를 추적하려고 스마트폰을 구입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든 초인 커뮤니티에 접속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직업도 없는 내가 매달 비싼 사용료를 내면서 스마트폰을 쓰는 것이다. 초인의 정보가 등록되는 커뮤니티는 세 곳이 있다. 네이버 초인 카페, 디시인사이드 초인 갤러리, 그리고 트위터다. 트위터가 가장 소식이 빠르다. 초인을 목격하거나 초인이 비행하면서 만들어 내는 소닉붐을 들은 사람은 해시태그 ‘#초인은지금’을 붙여서 장소와 시간을 트윗 한다. 나는 트윗의 정보를 모아 초인의 이동 경로를 기록했다. 일민 미술관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걸어가는 지금도 태그를 검색 중이지만, 소식은 없었다.

초인 갤러리와 네이버 카페에 올라오는 정보는 트위터와 성격이 다르다. 초인 갤러리는 방대한 양의 정보가, 언론보도와 뜬소문까지 인터넷에 떠도는 모든 정보가 모인다. 이 정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토론하는 곳이 네이버의 초인 카페다.

나와 그녀는 초인 카페에 딸린 소모임인 ‘구조자 모임’에서 만났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폭탄 테러 협박이 들어왔다는 뉴스 때문에 초인이 보일 줄 알았어요.”

“그 뉴스 덕에 군과 경찰이 병력을 강화해서 오히려 서울이 더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인은 어디 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소리를 듣고 있겠죠.”

구조자 카페는 초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가입한 모임이다. 원래는 기금을 위한 모임이었다. 초인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내는 소닉붐에 기물이 파손되는 일이 가끔 있는데, 이를 초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변상했던 것이다. 모임은 차츰 구조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친목 모임으로 발전했다.

우리는 모임에서 ‘여고생’과 ‘추적자’라는 아이디로 만났다. 나는 초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그와 접촉한 사람을 인터뷰해 왔으며, 오늘 그녀도 인터뷰하고 있었다.

“추적자 님은 초인이 사람의 목소리를 항상 듣고 있다고 주장하시잖아요. 그 중 비명소리를 들으면 도와주러 온다고 하시고요. 정말로 그렇게 믿으시나요?”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내린 결론입니다. 제 책에서 입증할 것입니다. 사람의 비명을 듣고 초인이 달려온다는 가설이 초인의 행동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아니, 일단, 제가 초인에 대해 세운 몇 가지 가정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초인은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우선 그것보다도 증거를 나열해 보자면…….”

초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흥분한 나머지 혼란스럽게 횡설수설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내가 나도 모를 말을 웅얼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물었다.

“초인을 처음 봤을 때라면, 동대입구역 화재 사고요?”

때마침 우리는 시청역 지하도를 가로지르는 중이다. 나는 사고 이후 지하철을 타기는커녕 지하도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최근에야 증세가 호전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개찰구 너머 승강장으로 내려가기는 꺼려진다.

“동대입구역에서 났던 화재는 아실 겁니다.”

“물론이죠.”

“초인이 나타나 사람을 구한 첫 번째 사고입니다. 지하철 화재는 차량과 건물의 폐쇄된 구조 때문에 한번 일어나면 끔찍한 대형 사고로 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대입구역 화재도 초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백 명 넘는 사상자가 났을 겁니다. 여덟 명의 부상으로 그친 건 천만 다행입니다.”

그 날 일을 되짚고 입 밖으로 꺼내놓는 행동은 나에게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장소에 꽃다발을 놓고 온 여고생 앞에서 내가 무슨 불평을 한단 말인가? 그녀가 경청하기 때문에, 나는 말했다.

“하필 제 출근길에서 화재가 벌어진 것은 그냥 불운이겠죠. 그날도 지하철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고, 저는 손잡이를 잡고 선 채로 반은 졸고 반은 지겨워하면서 출근길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이 동대입구역에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터널에 반쯤 걸친 채로 멈췄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는, 조금 움직이다가 꽝 소리가 나며 완전히 멈췄습니다. 저도 사람들도 소리를 질렀죠. 그리고 뒤쪽에서 무언가 다가왔습니다.”

“연기였나요?”

“아뇨, 어둠이 먼저 왔습니다. 객차의 전등이 차례대로 꺼졌죠. 멀리서, 그러니까 차량 앞쪽 전등부터 하나씩 꺼지고 머리 위의 등마저 꺼지면서 완전히 어두워졌죠. 사람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더니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누군가 차 안의 소화기를 꺼내달라고 했고, 꺼냈다는 대답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안내방송이 들렸습니다. 전등을 켜고 다시 출발하겠으니 차분히 기다려달라는 방송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차는 전등을 켜지도 출발하지도 않았죠.”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