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영웅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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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스카이시티가 지어진 지 처음으로 자살 소동에 휘말린 날이었다. 하루 30만 명이 드나드는 대형 건물인 스카이시티는 최근 수상한 소문에 휘말렸다.

스카이시티 어딘가의 벽에 금이 가고, 심지어 벽 자체가 기울어지는 등, 붕괴 조짐이 보이는데 관계자들이 숨긴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은 여러 소셜 사이트에 올라오면서 빠르게 입소문으로도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이시티는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장소 중 하나였다.

그 날도 스카이시티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는데, 그 여자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을 높게 들었고, 풍선을 잡아달라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여자를 발견했다.

“아빠, 아빠!”

7층 발코니의 아슬아슬한 바깥 가장자리에 선 여자를 본 아이는 울음을 뚝 멈췄다. 아이의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여자를 가리켰다. 그 때 마침 여자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흘러내렸다.

“뭐야, 저 여자! 미쳤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시선이 여자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갖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119 구조대에 연락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어셋을 끼고 스카이시티 내부를 순회하던 안전요원들이 우뚝 서서 여자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곳은 스카이시티의 메인 이벤트홀이었다. 여러 팝업스토어며 레이저쇼 등의 이벤트가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동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항상 인파가 북적거렸다. 여자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점점 더 사람이 많아졌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혹은 소셜 사이트에 이 소식을 날리느라 바쁜 사람들 속에서 김준영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40대 언저리로 보이는 여자는 아름다웠고, 부유한 차림이었다. 멍한 눈길이 정처 없이 홀의 공중을 배회했다.

준영은 180센티미터를 넘는 큰 키에 어깨가 벌어진 체격으로, 천산 그룹의 점퍼를 입고 이어셋을 귀에 끼어서 마치 스카이시티의 보안관계자처럼 보였다. 여자를 올려다보는 준영의 얼굴에는 난처한 의문이 가득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해도 스카이시티의 메인 이벤트홀은 자살을 시도하기에 몹시 부적합한 장소였다. 옆에 서 있던 소년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쓱 꺼냈다. 소년은 준영과는 달리 후드티셔츠에 운동화로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손목에는 남색의 밴드를, 귀에는 같은 색의 이어셋을 꽂았다. 분주히 스마트폰을 만지던 소년, 민태이가 준영에게 말했다.

“형. 누가 119에 연락했나봐요.”

태이의 말은 사실 질문이었다. 119의 무전을 도청하겠느냐는 의미였다. 또한 계획을 미루고 저 여자를 구출하겠느냐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하던 준영은 태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스마트폰을 만지던 태이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준영의 이어셋으로 도청한 무전을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준영은 태이의 밴드와 색만 다른 손목의 밴드를 건드렸다. 소년의 밴드와 같은 모양이었지만 색만 달랐다. 밴드가 준영의 이어셋으로 음성을 내보냈다. ‘통신을 거는 중입니다.’ 그러자 태이의 밴드도 부르르 떨었다. 준영은 태이를 비롯해 두 사람에게 통신을 걸었고, 거의 동시에 둘 다 통신을 받았다.

‘응, 오빠.’

준영의 비서이자 집사인 지윤의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셋에서 들려왔다. 준영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어셋 마이크에 속삭였다.

‘태이가 나와 같이 있으니 네가 해 줘야겠어, 드론을 날릴 거니까 카메라 확인해.’

‘알았어. 무슨 일 생겼어?’

‘응, 나중에 말해줄게.’

준영은 지윤이 말없이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곧바로 통신이 끊겼다. 준영은 미소지으면서 태이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서 상황 지켜보고 있어. 나는 돌아볼게.”

태이는 만지던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끄덕거렸다. 준영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기둥 뒤로 가서 주머니에서 작은 드론을 꺼내어 작동시켰다. 네 개의 날개가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곧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저 작은 드론이 단 카메라가 지윤에게 메인 이벤트홀의 영상을 전달할 터였다. 준영은 이 곳에 온 목적을 찾기 위해 메인 이벤트홀을 떠났다.

태이가 소셜 사이트에서 스카이시티의 기울어진 벽 사진을 발견했을 때, 준영은 망설이지 않고 스카이시티 조사를 결정했다. 스카이시티가 무너지고 있다면 더더욱 준영이 나서야 했다.

스카이시티는 준영의 조부이자 천산 그룹의 전회장인 김주만의 숙원이었다. 준영의 조부는 관광, 문화, 쇼핑, 사업을 모두 포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산 그룹의 모든 행사를 치러낼 수 있는 건물을 원했다. 나아가 서울뿐 아니라 한국의 랜드마크가 되고 국제적인 행사까지 모두 치를 수 있기까지를 바랐다.

그래서 스카이시티는 천산 호텔, 천산 백화점, 메세나 시네마, 천산 컨벤션센터, 메세나 아트홀을 모두 연결한 대형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해 준영의 조부는 수많은 사람들의 돈과 눈물과 목숨을 받으며 사업을 추진했다.

준영의 발이 천산 그룹의 브랜드 광고 앞에서 멈췄다. 극장용으로 촬영한 브랜드 광고가 쇼윈도에 설치한 와이드 TV에서 방영되었다. 준영의 조부는 수많은 원한과 피의 산을 쌓으며 이 천산 그룹을 이루었다.

준영은 그 조부가 가장 사랑했던 손자였다. 김주만은 준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정도로 집착했다. 그 애정의 방식을 가족 중 아무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가족 중 조부를 증오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준영은 조부의 가장 사랑하는 손자가 되었다.

조부가 그렇게 갑자기 죽지만 않았더라도 조부는 준영에게 모든 것을 물려줬을 것이다. 지금은 철영, 화영, 준영 삼 남매가 천산 그룹을 각기 나누어 승계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조부가 준영을 후계자로 삼는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남매가 나누어 승계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때문에 형과 누나의 적의는 뜨겁고 상속 싸움은 치열했다.

아마 준영의 속내를 알았다면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준영은 상속분뿐 아니라 천산그룹의 전부를 써서라도 조부를 대신해 속죄할 작정이었다. 조부에게 가장 사랑받은 준영은 재산보다 먼저 조부의 모든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때 준영의 밴드가 진동했다. 준영은 브랜드 광고 앞에서 발을 떼면서 밴드를 두드려 통신을 받았다.

“응.”

이어셋 너머에서 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상태가 좀 이상해요. 주의하세요.’

태이는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끊었다. 그리고 곧 밴드가 태이의 메시지를 음성으로 전달했다. 무전 도청을 연결했다는 메시지였다. 준영은 밴드를 두드려서 태이가 넣어준 앱과 연결했다. 이어셋으로 119의 무전이 흘러나왔다. 119와 경찰은 협조해서 투신을 시도하는 여자의 가족을 찾는 중이었다. 준영은 원래의 목적대로 스카이시티의 붕괴 지점을 찾으면서 119의 무전에 귀를 기울였다.

메인 이벤트 홀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경하던 군중 속에는 여자를 그렇게 만든 주범인 정혜나도 섞여 있었다.

혜나는 태연히 인파 속에 묻혀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난간을 쥐고 있었다. 혜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곤 몹시 만족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자의 얼굴에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절망에 빠진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혜나가 옷을 사러 스카이시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을 벌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스카이몰의 로드샵을 돌다가 천산 백화점으로 이동했던 혜나는 여자 화장실에 딸린 파우더룸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주름이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편안하면서도 세련되게 신경 쓴 차림이었고, 행복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분위기를 띠었다. 여자가 화장을 고치면서 켜놓은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는 캠핑 가서 미소짓는 4인 가족의 사진이 있었다.

혜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자의 손을 쥐었다. 손을 잡힌 여자가 놀라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빼내려고 하는 순간, 혜나는 여자의 정신을 휘어잡고 미약한 저항을 짓밟았다. 파우더룸에는 둘밖에 없었다. 혜나는 무난하고 순탄하게 여자의 정신을 무릎 꿇렸다.

여자는 혜나가 시키는 대로 파우더룸의 의자를 끌고 와서 혜나의 앞에 앉았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혜나가 사로잡은 후에는 혜나가 보았던 행복한 분위기와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혜나는 급속도로 여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때서야 여자를 빨리 놓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혜나의 능력은 특별하고도 강력했지만, 지배가 끝난 후에는 그 시간만큼 죽은 듯이 잠들기 때문이었다. 충동적으로 지배한 여자 때문에 긴 후유증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때 서너 명의 쇼핑객이 대화하면서 파우더룸에 들어왔다. 혜나는 여자를 데리고 일어섰다. 여자를 풀어주기 전에 가벼운 여흥을 즐길 생각이었다.

혜나는 여자의 핸드백을 뒤져서 여자의 차를 알아냈다. 여자의 차는 의외로 천산 호텔에 있었다. 천산 호텔의 이벤트 숙박권을 쓰는 중이었다. 혜나는 천산 호텔의 주차장까지 내려가면서 여자의 손에 항상 갖고다니는 지포라이터를 쥐어주었다. 불을 붙인 지포라이터를 여자가 자신의 차 안에 던져넣으면 간단하게 여자의 일상을 망가뜨릴 수 있을 것이다.

혜나는 여자를 여자의 차 쪽으로 보낸 뒤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혜나의 예상대로 여자가 지포라이터를 켜고 차 문을 연 순간, 주차요원들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뭐하는 겁니까!”

여자는 주차요원에게 지포라이터를 빼앗겼다. 그 때까지도 혜나는 여전히 여자의 정신을 지배하며 놔주지 않았다.

주차요원들은 경찰을 부르려고 했고, 혜나는 여자에게 자신의 객실에 머무르겠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여자가 주차요원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혜나는 메인 이벤트 홀로 내려왔다. 혼자가 된 여자는 혜나가 시키는 대로 객실 발코니로 나와, 난간을 넘어서 바깥쪽에 섰다.

혜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이제 혜나가 손을 떼도 사태는 멈출 수 없이 굴러갈 것이다. 혜나는 여자에 대한 정신지배를 끊었다. 언제나처럼 견딜 수 없이 잠이 몰려들어왔다. 뇌를 쥐어짜는 듯한 피로가 혜나를 덮쳤다. 혜나는 비틀거리면서 군중을 헤치고 메인 이벤트홀을 벗어났다. 혜나가 미리 봐뒀던 장소가 있었다.

준영은 여전히 목적지인 붕괴지점을 찾고 있었다. 그동안 준영은 태이, 지윤과 함께 균열이 있을 법한 후보지를 추려냈고, 그 후보지를 일일이 발로 다니며 확인해 왔다. 이제 그 리스트는 끝이 보였다. 대여섯 군데 남은 후보지에서 더 이상 찾지 못한다면 이 모든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준영은 심호흡을 하면서 벽을 두드렸다. 벽지는 복도의 벽과 동일했지만 소리도, 촉감도 달랐다. 가벽이었다. 준영은 가벽의 끝에 있는 관계자 외 접근 금지의 문을 열었다.

마침내 눈앞에 기울어진 벽이 나타났다. 누군가 가벽을 세우고 통제구역으로 만들기까지 했지만 결국 숨기지 못한 붕괴의 징후였다.

준영은 옷깃에 달았던 배지형 초소형 카메라의 전원을 켜면서 지윤에게 알렸다. 은신처에 있던 지윤은 준영이 보낸 영상을 받아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찾았네.’

무심하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지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준영은 슬쩍 미소를 띠었다. 기울어진 벽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촬영하던 준영은 벽의 뒤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췄다. 카메라가 매트리스 위에 누운 소녀를 비췄다. 지윤이 숨을 들이켰다.

‘헉…… 죽었어?’

뼈마디가 툭툭 불거질 만큼 깡마른 소녀는 희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었다. 푸른 핏줄이 선 눈꺼풀이 불룩하게 감겨서 마치 시체 같았다. 준영은 소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피부는 따스했고, 에어컨디셔너가 없는 장소 때문에 땀이 살짝 배었다. 느리고 약하게 뛰는 맥이 손끝에 잡혔다.

“아냐…… 후, 놀랐네. 왜 이런 곳에서 자는 거지?”

준영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먼지와 흙이 뭉치로 굴러다녔고 소녀가 자는 매트리스는 찢어져서 스프링과 내장재가 튀어나온 데다 신발자국까지 여기저기 찍혔다. 그 위에서 아랑곳없이 자는 소녀를 바라보던 준영은 조심스럽게 소녀의 어깨와 무릎 아래에 손을 밀어넣고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들어올렸다.

‘왜 거기서 자는지 이상한 거 같은데. 깨워서 물어보고 옮기는 게 어때?’

지윤이 넌지시 말했지만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상태가 나빠보여. 안 깨우는 게 좋겠어.”

지윤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준영은 지윤의 성격상 소녀를 녹화한 영상을 저장하고 신원을 확인해 볼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준영의 통화하는 목소리에도, 옮겨지느라 몸이 흔들려도 깨지 않았다. 준영이 소녀를 천산 백화점의 파우더룸에 옮겨놓을 때까지 내내. 파우더룸에 있던 여자들이 준영을 보고 놀랐지만, 준영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큰 소파에 내려놓은 뒤 재빨리 파우더룸을 나섰다.

“힘도 좋지……” 감탄하는 소리가 준영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 때 이어셋으로 듣고 있던 119 구조대원들의 무전 중 특정 단어들이 준영의 귀에 꽂혔다. 투신자의 남편은 연락이 되었으나 부산으로 내려간 참이고, 두 자녀는 아직 초등학생으로 어렸으며, 부모 쪽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구조대원들은 무전을 주고받으며 가족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구조에 나서기로 방침을 바꿨다. 준영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태이에게 통신을 넣었다.

“나야. 네가 송전실로 가야겠어.”

혜나는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대략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코 끝에 땀 냄새와 비누 냄새가 섞인 체취가 감돌았고 등과 무릎을 받쳐든 팔의 감촉이 더없이 단단했다. 누군가 혜나를 안아서 옮기고 있었다.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던 혜나는 노출된 어깨와 팔에 옮겨오는 체온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혜나는 화장품 냄새 속에서 잠이 깼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자기들끼리 뭉쳐 있던 사람들이 혜나에게 다가왔다. 그 중 하나가 말을 걸 즈음 혜나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 천산 백화점의 파우더룸이었다.

“정신이 들어, 학생? 아까 웬 총각이 데리고 오던데.”

“안아서 데려왔던데 무슨 관계야? 그 남자는 여기 직원 같던데, 아는 사람이야?”

“너 어디 아프니? 아프면 여기서 자는 게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지.”

혜나는 파리한 미소를 지었다.

“아…… 오빠가 절 데려왔나봐요. 오빠는 여기서 일하거든요. 오빠한테 연락해서 병원에 가야겠네요.”

혜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태연히 오빠라고 둘러댔다.

“바깥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가봐요. 무슨 일이래요? 오빠도 거기 갔나?”

혜나는 능청스럽게 그 남자를 찾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자살 소동이 일어났거든.”

“백화점에서 자살요?”

“내 말이! 아니, 백화점이 아니라 호텔이지만 말야, 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런 데서 자살하겠다는 거야, 제정신이 아닌 거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이 몸을 기울였다.

“그 여자, 논현동 사는 여자라며.”

“논현동?”

“남편이 제법 산대. 대형 로펌 변호사라는데.”

“그런데 자살을 왜 해?”

“주차장에서 불지르다가 들켰대. 그런데 경비가 경찰에 연락하니까 저러는 거래.”

“랄프로렌을 입고 페라가모 신은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불을 질러?”

듣던 사람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주변의 모두가 동감의 뜻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혜나는 킥킥 웃으면서 일어났다.

“학생, 좀더 쉬다 가지? 얼굴이 아직도 파래.”

“괜찮아요, 오빠한테 가봐야겠어요.”

혜나는 여전히 있지도 않은 오빠를 핑계로 댔다. 사람들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어여 가봐. 구조가 거의 끝났다니까, 학생 오빠도 이제 덜 바쁠 거야.”

“그래요? 구조가 끝났대요?”

“그런 거 아닐까? 곧 천산 호텔 입장 제한 푼다고 하던데?”

혜나는 손목의 시계를 흘긋 보았다. 잠들었던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였다. 혜나는 예상보다 경찰이 빨리 도착했다고 생각하면서 파우더룸을 나섰다. 천산 호텔로 연결된 통로에는 예상대로 경찰이 있었다.

스카이시티는 하루 평균 30만 명의 유동인구를 목표로 건설된 대형 복합건물이므로 경찰이 통로를 전부 막지 못할 거라는 혜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경찰은 천산 호텔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을 뿐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 덕분에 혜나는 천산 호텔에 수월하게 들어갔다.

여자가 자살 시도를 벌이는 객실은 7층이었다. 7층으로 올라가기 전 혜나는 천산 호텔 룸메이드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연스러운 태도로 탈의실에 들어갔다. 옷을 벗던 혜나는 팔뚝에 뭔가에 눌린 자국이 있는 것을 알아냈다. 혜나는 손가락으로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어디서 생겼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혜나가 몸을 닿았던 곳은 매트리스 정도 외에는 없었지만, 몸이 닿았던 사람은 있었다. 바로 혜나를 안아서 옮긴 남자였다. 그 남자의 옷에 있는 로고가 혜나의 노출된 팔에 찍혔던 것이다. 혜나는 핸드폰 카메라로 팔뚝을 찍어서 들여다보았다. 희미했지만 사진을 반전시켜서 보니 천산 그룹의 로고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나는 천산 그룹의 경비원이나 직원일 거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이 사건이 끝난 후, 사진이 실린 직원 명부를 뒤지면 누군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룸메이드 복장으로 비품이 실린 카트를 끌고 가는 혜나에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혜나는 복도의 배경이 되어서 움직였다. 경찰은 여자가 있는 7층 객실 쪽 통로만 통제했고, 경찰과 119 구조대원, 간간이 호텔 직원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초조한 듯이 전자담배를 물고 있는 구조대원이 있었다. 혜나는 천천히 비품카트를 밀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전자담배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연기를 타고 퍼졌다. 옆을 지나가던 호텔 직원이 전자담배에 대해 경고할지 망설이는 얼굴로 발걸음을 늦췄다. 호텔 안에서는 전자담배도 금지였다. 그것을 눈치챈 구조대원이 멈칫거리다가 전자담배를 떨어뜨렸다.

혜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을 구르는 전자담배를 주웠다. 호텔 직원은 짧은 사이 전자담배를 제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말없이 지나갔다. 혜나는 구조대원에게 전자담배를 내밀었다.

“받으세요.”

“……고마워요.”

구조대원은 전자담배를 받아들었고, 손이 닿은 짧은 순간 혜나는 구조대원의 손을 마주 잡았다. 구조대원은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무슨 일인지 눈을 크게 떴다. 피로가 어린 얼굴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혜나의 손은 서늘했다.

‘왜’를 물으려고 벌어지던 구조대원의 입이 모양을 잃고 눈동자가 탁해졌다. 혜나는 구조대원의 피곤하고 지친 정신을 손쉽게 지배했다. 혜나는 미소지으면서 구조대원에게 낮게 속삭였다.

“힘들어하는 시민을 도와주러 갑시다.”

천산 호텔 송전실에서 내려오던 준영은 갑작스럽게 119 구조대원들의 무전이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무전에 집중했다. 경찰의 수는 구조대원들에 비해 적어서 구조대원들이 투신자의 구출을 도맡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구조대원 중 한 명이 투신자가 있는 층의 위층에서 구출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미 한 구조대원이 발코니로 가서 투신자와 공감과 신뢰를 쌓는 중이었다. 왜 새삼 갑자기 위험을 무릅쓰고 위층으로 가겠다는 건지 다른 구조대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전을 듣던 준영에게 태이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준영은 밴드를 두드려서 통신을 받았다.

‘형 말대로 스카이몰과 비즈니스 센터까지 다녀왔어요.’

“잘했어, 지금 어디 있어?”

‘메인 이벤트홀에 있어요.’

“계속 거기 있어.”

‘형은 어디 가실 거예요?’

준영은 비상계단을 내려가면서 대답했다.

“6층. 홍, 듣고 있어?”

소리 없던 지윤이 대답했다.

‘응, 얘기해.’

“이번에는 8층도 끝까지 촬영해.”

7층은 여자가 투신 시도를 벌이는 곳이었고, 8층은 그 이상한 구조대원이 위층에서부터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곳이었다. 무전 내용을 전혀 듣지 못한 지윤은 잠깐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CCTV는?”

‘알고 있어. 체크할 거야.’

“그래, 끊는다.”

통신이 일제히 끊겼다.

준영은 6층에 도착했다. 6층의 투숙객들 역시 소란스러워서 복도로 나와 무슨 일인지 구경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낀 그는 투신 시도를 벌이는 객실의 아래층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비어 있었다. 준영은 붕괴 지점이 호텔일지 몰라서 준비해뒀던 마스터키로 객실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이벤트홀을 보느라 바빠서 아무도 준영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준영은 커튼에 몸을 숨긴 채 테라스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비명을 올렸지만 대체로 호기심에 가득 차서 일제히 7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준영은 테라스 아래에서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꺄아아아아악!”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스치고, 뒤이어 비명이 터지는 순간 준영은 재빨리 리모트로 차단 장치를 가동시켰다. 천산 호텔, 비즈니스 센터, 스카이몰의 송전실에 설치해 둔 차단 장치였다. 순식간에 스카이시티 메인 이벤트홀을 비롯해 홀을 둘러싸고 있는 세 건물 모두가 정전되었다. 비상등과 장식용 야광등이 푸르게 빛났다.

준영은 엑스밴드를 얼굴에 뒤집어쓰면서 테라스로 뛰쳐나갔다. 구조대원과 투신자가 가깝게 붙어서 추락하고 있었다. 마치 구조대원이 떨어지다가 투신자를 잡아끈 것처럼.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