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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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 눈이 내리던 겨울날이었습니다.

아기를 가진 왕비는 창밖을 바라보며 뜨개질을 하다 손을 다쳤습니다.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흰 눈에 붉게 번졌습니다.

그걸 보며 왕비는 생각했어요.

눈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어.

흰 눈같이 눈부신 살결과 피처럼 빨간 입술을 가진 아이가.

나레이터를 맡은 아이가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 낭랑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퍼지자, 시끌시끌하던 6학년 4반 교실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이미 여러 번 맞춰본 대본이었지만 실제 동작과 함께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번에 남아서 연습을 할 때, 역할이 작다며 몰래 가버린 아이들도 모두 남아 있었다. 선생님이 감독 역할까지 반 아이들에게 맡긴 자율 연습이라 이렇게 다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궁금한 것이다. 실제 연기와 함께 하면 어떤 모습인지.

백설공주의 친엄마 역을 맡은 아이가 손동작으로 뜨개질을 하는 것을 보며 소희는 심호흡을 했다. 대사는 이미 완벽하게 암기된 상태였지만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실수하지 않으려 간밤에 소희는 대본을 또 외우고 또 외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연습이고, 아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대본을 들고 연기를 할 터였다. 그렇게라도 돋보이고 싶은 것이 소희의 마음이었다.

친엄마 역을 맡은 아이가 내려가자 소희는 아이들 앞에 섰다. 교탁을 옆으로 치우고 책상을 뒤로 물려 놓아서 공간이 꽤 넓었다. 이제 여기는 소희의 무대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팔을 휘휘 저으며 소희는 거울을 보고 한껏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우니?”

“왕비님이 가장 아름답지요.”

소희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서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긴장이 감돌았다. 이 순간을 연기하기 위해 미리 연구를 했다. 만화의 왕비와 최대한 비슷하게,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살려 실력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왕비의 장면은 특이하게 객석과 배우가 직접 교감하는 장면이 있었다. 소희는 여자 아이들 몇 명을 지적해 즉석에서 자신의 외모와 비교하며 잘난 체를 했다. 소희의 매끄러운 연기와 거울의 아부가 더해져 교실에는 은근한 흥이 올랐다.

“지금은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우니? 물론 내가 제일 예쁘겠지?”

“왕비님도 아름답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백설공주 님이십니다.”

거울의 말에 소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양 어깨를 바르르 움직였다. 박력 있는 연기에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공주를 숲으로 끌고 가라. 그리고 죽여서 그 증거로 공주의 간을 가지고 오거라. 만약 그대로 하지 못하면 네 목숨이 성치 않을 것이다.”

소희는 사냥꾼 역을 맡은 아이를 향해 위엄 있게 말하며 치를 떨었다. 그 기세에 압도된 듯 교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소희는 곁눈질로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만족스러웠다. 며칠간 시간을 내어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기대한 대로 흘러간 것 같아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이제 백설공주의 차례였다.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할 터였다. 분명 백설공주를 맡은 유리는 대본을 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연기에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희는 옆으로 물러서서 반대편에서 준비하는 유리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소희의 예상과는 달리 유리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대’ 가운데로 들어온 유리는 손을 포개어 베는 시늉을 하고 옆으로 누웠다. 그리고 잠깐 잠들어있는 척 하다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 낯선 곳에 온 것처럼 유리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천진한 얼굴이 정말로 공주 같았다.

“어머,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버지! 어머니! 유모! 거기 아무도 없어요?”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소희의 연기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었다. 한 번도 오지 못했던 장소에 있는 양 유리는 몸을 떨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사냥꾼 역을 맡은 아이가 나타났다.

“공주님, 일어나셨군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이것은 왕비님의 뜻이니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요?” 순간 유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니야, 어머니가 그럴 리 없어.”

사냥꾼이 종이를 말아쥔 ‘칼’로 유리의 심장을 겨누었다.

“고통 없이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저씨, 제발 살려주세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유리는 정말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처럼 허리를 굽혀 그를 제지했다.

“이러면 어떨까요? 그냥 돌아가실 수 없으니까, 저를 죽인 걸로 하는 거에요. 저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요.” 유리는 손을 내저으며 그를 설득했다.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도 사람 죽이기 싫으시잖아요.”

어느 새 교실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유리의 연기에는 보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다음에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유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주와 사냥꾼의 일대일 장면이 끝나자 아이들은 ‘오오’ 하며 박수를 쳤다. 순식간에 교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니, 뭐야. 여배우 경연대회야?”

“다들 왜 이렇게 잘해?”

웅성거리는 아이들 앞으로 다시 소희가 나섰다. 이번에는 왕비가 사냥꾼과 독대할 차례였다. 들뜬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희는 시선을 집중시키려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도저히 첫 장면만큼 기운이 나지 않았다. 지난밤에 열심히 연습했던 것이 헛고생처럼 느껴졌다.

왕비가 백설공주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소희는 유리를 이길 수 없었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