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도 사건집 – 영원히 행복하게

  • 장르: 일반 | 태그: #전일도사건집 #은둔형외톨이 #영케어러 #중간착취
  • 평점×5 | 분량: 73매
  • 소개: 누구든 무엇이든 해 주는…아니 찾아드리는 탐정 전일도는 은둔형 외톨이인 동생을 방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언니의 의뢰를 받는데 나무로 된 평범한 방 문짝이 이렇게 무겁고 ... 더보기

전일도 사건집 – 영원히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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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삼켰다. 아니, 조금씩 야금야금 나를 갉아먹고 있었는데 마지막 한입에 나를 삼킬 때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 숨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눈만 겨우 빼꼼 내놓은 바라클라바를 뒤집어쓰고 팔짱을 끼고 책상에 발을 올리고 지나간 사건들을 회상한다. 1년의 마지막 달이라 그런가 괜히 울적하다. 열심히 일한다고 했는데 돌이켜 보니 제대로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다.

“대기업 취업을 꿈꾸는 조우리 씨는 아직도 취업준비생이고,”

옆에서 썽이가 말을 가로챈다.

“피임 안 해서 임신중단하게 만든 ‘오빠’랑은 헤어졌잖아. 네가 조우리 씨랑 병원에 같이 가 준 덕분에.”

나는 하던 푸념을 마저 이어서 했다.

“주연 씨는 아직도 아이를 낳을 지 고민하고 있고, 키즈 먹방 유튜버 달봄이는 동생이 먹방을 찍을 만큼 자랄 때까지 먹기 싫은 걸 먹어야 하고. 이번에는 곤충 쿠키였나? 승희 씨는 한 번 정규직이 되지 못 하고 계약직으로 나이만 먹다가 아마 평생 계약직으로 떠돌 것 같고, 최선임 씨는 장학금을 못 받아서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알바를 전전할 거고, 최루성 신파 못지 않은 장학금 신청서를 읽는 인혜 씨는 오늘도 울면서 일하는데 회사에선 업무 스트레스에 심리치료를 지원하진 않을 거고, 보람 씨는 택배일을 그만 둘 수 없을 거고…”

썽이가 내 말을 받아서 이었다.

“주연 씨는 엄마가 된다면 ‘주연 씨 다운 엄마’가 될 거고, 엄마가 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거고, 달봄이는 한 번 싫은 걸 싫다고 해 봤으니 싫어하는 건 안 하는 자주적인 아이로 자랄 거고, 승희 씨는 계약직으로 떠돌더라도 차로 건물을 들이받지는 않겠지. 최선임 씨랑 인혜 씨는 연애하면서 장학금 신청서 내듯이 공모전에 소설 내서 상을 받을지도 모르고. 보람 씨는 ‘그만두는 법’을 알게 되었겠지. 너를 만나서.”

이상하다. 썽이의 말이 힘이 되지 않는다. 썽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잘댄다.

“의뢰인들이 바뀐다고 해도 ‘아주 조금’ 이잖아. 나는 사건을 완벽히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 때 그 때 상황만 모면하는 거야. 내가 맡은 사건들은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해결되는 건 없어. 어쩌지? 이제라도 탐정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라도 해야 할까? 국회의원은 좀 어려울 것 같으니까?”

썽이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아주 조금’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런데 법을 바꾸는 공무원이 되려면 9급, 7급 공무원 시험이 아니라 5급 공무원이 되는 행정고시를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럼 그렇지. 쉽게 되는 일은 없지. 한숨이 나왔다.

“그럼 법도 못 바꾸겠고…”

썽이가 바라클라바 틈으로 나온 눈을 가려준다.

“좀 쉬어. 너 방학도 휴가도 없이 동동 거리느라 번아웃이 온 것 같아. 지금 안 쉬면 우울증 된다.”

쌍둥이 오빠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어 젖히며 큰소리를 낸다. 아니 내가 썽이랑 방 안에서 뭐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번아웃도 과로해야 오는 거지, 너처럼 일이 없어서 손가락 빠는 애한테 무슨 번아웃이야. 나와서 점심이나 차려. 번아웃일수록 움직여야 돼.”

바라클라바를 벗어 오빠에게 집어 던졌다. 신고 있던 수면 양말을 던지려다가 참은 거다.

“내 상태 모르면 가만 있어. 내가 지금 얼마나 피폐하냐면, 김경찬이 사기를 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아.”

오빠놈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마라탕 배달 시킬래?”

썽이도 동의해서 오늘 점심은 마라탕으로 결정되었다.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매운 맛이다. 마라탕을 다 먹고 나서 튀긴 빵을 연유에 찍어 먹으면서 오빠가 물었다. 저 인간은 어떻게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입 속에 뭐가 들었는지 다 보여주면서.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할 건데?”

“쉴 거야.”

내 딴엔 단호하게 말했는데. 오빠 새끼가 코웃음을 친다.

“내가 보기에 네가 가만히 있을 인간은 아닌데. 의뢰 들어오면 바로 뛰쳐 나가겠지.”

지가 뭔데 썽이와 반대되는 말을 해.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썽이 말대로 쉬어야 하지만 오빠 말대로 사건이 벌어지면 곧바로 밖으로 나가는 인간이 나다. 지금 메신저 알람이 울리자마자 긴 얘기를 손으로 타이핑하기에는 마음이 급해서 의뢰인의 폰 번호를 받아 냅다 통화부터 하는 걸 보니 오빠 쪽이 더 맞는 말 같다.

“혹시 배달앱이랑 착각하신 거 아니세요? 왜 일단 의뢰인님 댁으로 가야 하는데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집으로 가는 건 꺼림칙한데요. 탐정이지만 20대 여성이기도 하니까요. 제 안전은 제가 지켜야죠.”

스마트폰 너머의 의뢰인은 듣는 나까지 기 빨리게 후우 한숨을 쉬었다.

“뭐든지 한다면서요.”

“누구든 뭐든 찾아 드린다고 했죠.”

“어쨌든,”

의뢰인은 말싸움을 하지 않고 말을 뚝 자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집에서 안 나와요. 밖으로 나오는 걸 거부해요. 그러니까 탐정님께서 와 주셔야 돼요.”

“그건 제가 아니라,”

아니 이 의뢰인은 말 잘라 먹으면 맛있나. 계속 말을 끊어 먹네?

“알아요. 이런 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거. 그런데 정신과에 데려 가려고 하면 ‘내가 미친년이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발악하고, 심리상담센터로 가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요. 제가 그동안 번 돈은 다 생활비랑 엄마 치료비로 들어가서 저축해 놓은 돈이 거의 없어요. 돌아보면 허무하게도.”

탐정이 상담보다 싸게 먹히긴 하지.

“그리고 탐정님이 동생이랑 동갑이어서요. 언니보다는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나이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 보여주면 자극도 되겠죠.”

그래서 지금 내가 바라클라바를 쓰고 서은이의 방문에 기대 있는 거다. 똑똑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의뢰인인 서은의 언니 은신 씨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건네며 속삭였다. 마라탕에 연유 찍은 튀긴 빵에 맥주라니 오늘은 맵고 달고 취하고 골고루 먹는구나.

“엄마가 오래 아프셨어요.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직장인이었고 서은이는 대학생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분담을 했죠. 제가 밖에서 일해서 엄마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고 서은이가 간병과 집안일을 맡는 걸로요. 요양 병원은…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병원에 계셨어요. 침대 하나가 할머니에게 허락된 공간이었죠. 할머니는 엄마가 문병 갈 때마다 나 좀 집에 데려가 달라고 붙잡았어요.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자매한테 약속을 받아냈어요. 아무리 아파도 집에서 아프게 해달라고요. 동생은 하루 종일 엄마랑 있었어요. 엄마가 언제 갑자기 응급실에 가게 될 지 몰랐거든요. 간병하느라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어요. 탐정님, 사람이 오래 아프면 성질머리가 고약해지는 거 알아요? 아프니까 짜증이 늘고, 오래 아프다 보면 짜증이 성격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동생은 하루 종일 엄마를 돌보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 대신 엄마의 짜증을 받아낸 거예요. 이십 대 초반, 한창 하고 싶은 것 많고 놀고 싶을 때에 하루 종일 엄마랑 빛도 안 드는 반지하에서 오도카니 지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엄마가 고통 없이 얼른 돌아가시길 바란 적도 있었는데,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동생은 방안에 틀어박혔어요. 사람이랑 안 만난 지 오래 되다 보니까 이제 와서 밖으로 나가기 힘들었나 봐요. 동생에게 얼굴을 보진 않더라도 메신저로라도 연락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학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서 엄마가 쓰러지셨으니까 같은 과 친구도 없었어요. 복학을 망설이길래 그럼 일단 알바라도 하라고 했는데 알바 자리 하나 얻기 힘들었어요. 엄마의 짜증에 분노로 받아 치다 보니까 말투가 공격적으로 바뀌고 표정도 굳어졌어요. 편의점 알바를 얻을래도 면접에서 줄줄이 낙방하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다고 느껴졌나 봐요. 몇 번 알바 면접에서 탈락하더니 방문을 잠가 버렸어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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