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신명(神命)

  • 장르: 판타지, 호러
  • 분량: 99매 | 성향:
  • 소개: 신명은 푸르니 아무도 이를 거역할 수 없으리라. 더보기

푸른 신명(神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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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가 끈적거렸다. 혀를 내밀어 핥아보니 쓴맛이 났다. 비탈길을 걸어 올라오며 애기똥풀을 잡히는 대로 뜯은 탓일까.

 

경련은 멎어 있었다. 귓속을 가득 채운 이명 역시 사라졌다. 산바람이 수풀을 천방지축으로 들이받고 다녔다. 등을 곧게 펴고 대모(玳瑁)로 만든 안경테를 매만졌다. 천만다행으로 안경알을 깨뜨리지는 않았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저고리 앞섶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안경알이 지저분해서인지 눈앞이 온통 희뿌옜다.

 

윤필로 그린 듯 윤기를 머금은 능선을 따라 떡갈나무, 층층나무, 오동나무와 참나무, 소나무 따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산 전체가 수실을 고루 써 수놓은 치마폭 같았다. 바람이 느려졌다. 그럼에도 나무들은 멈추지 않고 흔들렸다. 잎 가장자리를 오므리는가 하면 가지 끝을 마주 비비며 쉴 새 없이 부딪쳤다. 결과(結果)를 떨어뜨렸고 씨방을 터뜨렸으며 잔뿌리를 꿈틀거렸다.

 

숲은 고요했으나 그 아래에서는 무수한 말[言]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이를 뒤늦게 깨달았다.

 

오라버니가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나를 반기며 물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 찾아도 보이지 않아 걱정했는데.”

 

“여기저기 좀 둘러보느라고요.”

 

나는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몸이 불편한 게냐. 대답해보아라,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 거니.”

 

“아니에요,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웃으며 오라버니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에도 이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다.

 

“그럼 다행이고.”

 

오라버니가 내 어깨를 당겨 안았다. 우리는 나란히 선 채로 경사지를 따라 완만하게 펼쳐진 구릉지를 내려다보았다.

 

“저기를 좀 보아라. 좋은 터이지 않니? 볕이 잘 드는데다 경사가 가파르지도 않지. 비탈이 심한 곳에서는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가 나기 십상이거든. 또 계곡이 지척에 있어 물을 얻기도 쉬울 거야. 경아야, 우리는 여기서 살게 될 거다. 논배미를 일구고 조와 수수, 기장을 심을 거야. 어떠냐, 우리의 앞날이 그려지지 않느냐.”

 

기대감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나는 오라버니의 면면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그의 눈가에 주름살이 생겨 있었다. 고향 땅을 떠난 지 스무날 만에 희었던 피부는 까맣게 그을렸다. 그런가 하면 그가 입은 삼베 저고리의 깃이며 소매에는 잔뜩 때가 타 있었다. 진창을 지나며 튄 흙물 때문에 바지는 온통 얼룩덜룩했다. 나는 깍지 못한 그의 손톱 밑에 흙 몇 톨이 끼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오라버니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새 삶을 살게 될 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우리 손으로 하나하나 새롭게 만들어가는 거야. 저 아래 세상은 잊을 거다. 우리는 산 밑에서 태어났을지 몰라도 산 위에 묻힐 거다. 그게 내 바람이야.”

 

그때 범연 할아범이 떨기나무 사이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한 발로 바윗돌을 누른 채로 먼 데를 응시하며 말문을 뗐다.

 

“독초가 많고 나무뿌리가 깊어 터를 닦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독사는 어찌나 기승을 부리는지. 방금도 청년 하나가 뱀에게 물려 처치해주고 오는 길이에요.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정녕 이 산에 정착하실 생각입니까.”

 

“아직도 그 소리인가. 물론이네.”

 

오라버니가 평소답지 않게 역정을 부렸다. 범연 할아범이 타이르듯 점잖게 반문했다.

 

“도련님께서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숲에 어떤 괴담이설이 깃들어 있는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갑시다. 움직입시다. 다른 땅을 찾읍시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일세, 누구도 살리고 죽이지 않아!”

 

오라버니가 일갈했다. 범연 할아범이 눈 밑 살을 불끈거렸다. 그러다 오라버니가 끝끝내 굽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는지 광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가 열띤 목소리로 내처 주장했다.

 

“그러나 전세와 군포, 노역과 공물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 무능한 나라님과 제 잇속만 챙기는 탐관오리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어. 두 번, 세 번, 죽이고 또 죽일 수 있네.”

 

오라버니가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범연 할아범을 쏘아보았다.

 

“저 땅에는 희망이 없어. 자네도 똑똑히 목격하지 않았나. 병해에 충해, 수해에 한해까지. 온 나라가 무덤으로 뒤덮일 지경이었지. 그래서 백성들이 시체로 썩어가는 동안 나라님은 뭘 했나. 관리들은? 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구휼하기는커녕 성문을 걸어 잠그고 비단 금침 속에 틀어박혔지. 역귀가 물러간 다음은 어떤가. 고통 받은 이들이 일어나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나. 천만에. 가뜩이나 헐벗은 자들을 수탈해 빈 곳간을 채우는 데 여념이 없었지.”

 

범연 할아버지의 이마에 핏대가 불끈거렸다. 그 역시 되새기고 있는지 몰랐다. 수난의 세월을, 죽지 못해 견뎌야 했던 하루하루를, 눈물로 떠나보낸 가족들을.

 

그의 나이 예순 동안 그토록 모질었던 시절은 없었다.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 하루라도 빨리 겨울을 방비해야 하네. 이듬해를 준비해야 하네. 할아범도 그리 생각하지 않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응수하는 범연 할아범의 태도가 몰라보게 누그러져 있었다. 오라버니가 천진하기까지 한 말투로 웅변했다.

 

“선현들께서도 이르지 않았겠나. 산을 배후에 두었으며 물이 풍부한 고장은 부강할 것이다. 바람이 거센 지역을 피하라. 토질은 양질이어야 하니 반드시 파 확인해보아라. 저 아래를 보게, 낙엽수가 무성해 갈잎이 많으니 자연히 땅이 기름지지 않겠는가.”

 

그 즉시 범연 할아범이 입매를 쌜그러뜨렸다. 그에게 오라버니는 여전히 현실과 이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샌님에 불과할 뿐이었을까.

 

반면 범연 할아범은 서책을 믿지 않았다. 그것들은 쉽사리 찢어지고 벌레 먹었을 뿐더러 까맣게 덧칠돼 본래 의미를 잃기 십상이었다. 현명한 저 노인은 종이 위 글줄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만진 것들에서 이치를 깨우쳤다. 그의 세계는 먹과 종이와 붓이 아닌 흙과 빗방울과 씨앗, 바람과 벌레, 제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갈 때 이마를 타고 흐르는 구슬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단순한 고담만은 아니라면요?”

 

범연 할아버지가 오라버니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반발심을 나조차 헤아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 사람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도련님,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오라버니가 픽 웃었다. 그 무렵 그는 완전히 평상심을 되찾은 상태였다.

 

“책임지겠네.”

 

오라버니가 거듭 강조했다.

 

“내가 다 책임지고 말고.”

 

범연 할아범이 기운이 빠진 듯 머리를 숙이고는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반면 오라버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머리에 얹은 갓이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저 자리에 망루를 세우는 게 좋겠다는 둥 한껏 들떠 주절거렸다.

 

솔개 한 마리가 창천을 날았다. 저 금조의 눈에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고울까. 미울까. 무시무시할까. 그러다 시선을 돌리고 오라버니가 주장한 대로 울창한 저 숲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며 마당, 산울타리와 텃밭 따위를 그려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바람결에 홀씨가 섞여 있었다.

 

 

 

그 병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의원들조차 이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어디에서 어떻게 기원했는지는 더더욱 깜깜했다. 분명한 건 역신이 길을 따라 유랑했다는 점이었다. 떠돌이 장사꾼들과 어울려 피난민들의 무리에 섞여 이 고을 저 고을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군자들이 쓴 서책에서도 그 병마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등잔 기름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책을 탐독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나만큼 서책을 많이 읽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툭하면 넘어지는데다 행동거지가 굼떠 종들에게조차 얕잡아 보이기 일쑤이던 나와는 전혀 달랐다. 선명한 검은 눈동자로 상대를 집요하게 노려볼 줄 알았다.

 

나는 늦둥이로 병약하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쁜 내 숨소리에 걱정스러워하며 하루에도 수차례씩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고 했다. 나는 젖을 늦게 뗐고 걸음마는 두 돌이 가까워서야 간신히 시작했다. 나들이는 한 절기에 한 번 허락될까 말까였다. 그런 내게 오라버니는 유일한 동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습관적으로 눈을 찌푸린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도 오라버니였다. 그는 어머니를 설득해 내게 안경을 구해줄 것을 권했다. 나는 성읍에서 제일 먼저, 유일하게 안경을 쓴 여자아이였다. 수정을 갈아 만든 안경알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비단으로 지은 안경다리를 종일 머리에 두르고 있으면 어느 샌가 관자놀이가 무지근해지면서 두통이 일곤 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안경테를 찾아 무심결에 손을 놀렸다.

 

그해 봄, 내가 살던 고장은 평안했다. 나와 내 가족이 기거하던 고택 역시 그러했다. 고요한 밤 안채에서 난데없는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낮에 창포를 캐러 냇가에 나갔다고 했다. 단오를 앞둔 날이었다. 어머니와 대동했던 몸종 분이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물속에 엎어져 있던 사내아이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리보전한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일가붙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곡하는 와중에 오라버니는 행랑채로 가 같은 증세를 보이는 분이를 세세하게 관찰했다. 그런 다음 아버지를 찾아 분이를 격리하는 한편으로 지금 즉시 장사를 중단하고 어머니의 주검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광분했다. 어디서 감히 그 따위 언사를 일삼느냐고 일갈하더니 하인들을 불러 오라버니를 광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들 간의 불화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성부터 무척 닮아 있는 사내들이었으나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조석으로 죽이며 물 따위를 가져와 광 안에 몰래 넣어주었다. 그 지경에 처해서도 오라버니는 뉘우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에도 별반 상처입지 않은 듯했다. 고리짝에 기대 미늘창 너머 꽃가루가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일렀을 따름이었다.

 

“손을 자주 씻도록 해라. 물은 반드시 끓여 마시고. 네 몸이 약한데 자칫 병을 옮지는 않을지 걱정이구나.”

 

분이의 병세는 차차 누그러졌다. 마을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흉흉한 소식들에 겁먹고 있던 하인들 역시 천천히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오라버니가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꽃상여가 산길을 올랐다. 상여꾼들이 상여메김소리를 불렀다. 어른들은 노잣돈을 상여에 꽂으며 연신 상여꾼들을 독려했다. 매장을 마치고 선산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빈 상여가 문턱을 넘어 마당 한 편에 멈추었을 무렵에야 나는 안채 마루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라버니였다. 무슨 수로 광을 빠져 나왔는지 몰라도 그는 얼굴 가득 조소를 머금은 채로 무릎께를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이가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머리에 쓴 건을 벗어 우그러뜨렸다. 오라버니는 경멸을 감추려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차디찬 시선을 던졌다.

 

“분이가 아이를 품고 있었다는 건 아시겠지요? 네, 아버지, 분이가 죽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자식은 저와 경아, 둘 뿐이겠군요.”

 

이튿날 새벽 아버지는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의원에게 약 처방을 받아왔으나 소용없었다. 하루에 세 번 약을 달여 올렸으나 아버지의 병상은 조금의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즈음 돌림병은 성읍 전체로 퍼져 있었다.

 

오라버니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병자들을 격리시키고 그들을 보살필 때 코와 입을 여러 겹의 천으로 감싸라고 지시했다. 아버지는 날로 증상이 악화돼 임종 직전에는 정신마저 오락가락했다. 온몸에 열꽃이 만발한 채로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썼다.

 

“이 망할 것이, 내 몸에서 나가, 나가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이 든 것도 모자라 벌레들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민들은 볼품없는 수확에 망연자실했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태연히 전세를 걷으러 다녔다.

 

한 집안이 기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오라버니마저 범연 할아범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야산을 헤매야 했다.

 

그 무렵 오라버니는 밤마다 술에 취해 나를 붙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럴 때 그의 어투는 험악했으며 표정은 흉포했다.

 

“썩은 뿌리는 뽑아야 하고 충해를 입은 잎은 솎아내야 하지. 경아야, 부패한 과실은 도려내는 수밖에 없어. 바꿔야 해, 모조리. 낫과 괭이를 들어서라도. 자격이 없는 자들을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서 몰아내야 해.”

 

이듬해 역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개천은 말라붙었고 화초에는 잎눈조차 맺히지 않았다. 수피가 벗겨진 나무들이 피를 흘렸다. 야반도주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김을 매지 않은 논밭에는 잡초가 우거졌다.

 

개구리가 울던 밤, 나는 바느질감을 들고 언제나처럼 오라버니와 마주 앉았다. 무슨 생각인가에 잠겨 서책을 들척이던 오라버니가 불쑥 내게 말했다.

 

“경아야, 우리는 떠날 거다.”

 

“떠난다니 어디로 말씀이세요?”

 

“산속 깊숙이. 푸른 바람이 부는 곳으로.”

 

나는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오라버니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가주겠느냐. 경아야, 너는 어디든 나를 따라 와주겠지, 그렇지?”

 

안온했던 시절 오라버니는 나이 지긋한 농부들을 만나 그들이 구술하는 바를 종이에 받아 적곤 했다. 그에게는 경험으로 무르익어 말로 전해지는 앎을 글월로 남겨 학문으로 삼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지게를 메고 소를 몰았느냐고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생활이 고단해졌다고 한들 오라버니가 이 땅을 떠날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고택을 버릴 수 있을까. 오래 써 반질반질한 서안과 비단 이불을, 책가도가 그려진 병풍과 군불을 땐 아랫목을, 태생적으로 주어진 신분의 이득을, 노동하지 않고 먹고 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라버니의 결단은 예상 밖으로 굳건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범연 할아범을 설득했다. 수염은 물론이고 눈썹까지 하얗게 센 그는 하인들에게 단연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나는 범연 할아범이 오라버니의 계획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지혜롭고 어진 그 노인 역시 병마와 가뭄, 굶주림에 넌덜머리가 나 있었을까.

 

범연 할아범의 조력 때문인지 종들 대다수가 함께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웃의 몇 가구가 무리에 합류했다. 오라버니는 물밑으로 조용히 재산을 처분했다.

 

우리는 야음을 타 고개를 넘었다. 길이 이어지는 곳 어디에나 시체들이 즐비했다. 굶어 뼈만 앙상한 개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범연 할아범이 조총을 쏘자 놈들은 꼬리를 사리고 흩어졌다. 나는 맹수에게 파 먹힌 사내의 시체를 맞닥뜨리고 헛구역질했다.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걸음이 느려졌다. 여종들이 등짐을 추어올리며 그런 나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를 거듭하다 급기야는 장정들의 등에 번갈아 업혀 가까스로 산속 마을에 도착했다. 오라버니는 지친 다리도 쉴 겸 그 마을에 며칠간 머무르며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자고 했다. 그 결정에는 기진맥진한 나를 염려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산사람들과의 거래로 육포를 챙겼고 농기구 일습을 구했다. 염소와 닭, 돼지를 면포와 맞바꾸기도 했다.

 

산행을 앞둔 밤, 잠을 설치던 나는 오라버니와 할아범이 나누는 대화를 장지문 너머로 엿들었다.

 

“도련님, 뭇 사람들의 조언을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이야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산에 숲의 형상을 한 신이 깃들어 있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오라버니가 코웃음 쳤다. 범연 할아범이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항변했다.

 

“적어도 제게 그 같은 사연을 들려주던 자들은 모두 진실했습니다. 저는 거짓을 고하는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압니다.”

 

“이보게, 할아범. 그런 소문이 도는 산이라니 오히려 우리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우리는 인적미답인 땅을 찾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지. 산사람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산속에서라면 쫓겨날 걱정 없이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내 말이 틀렸나.”

 

“허나 도련님.”

 

“여기까지 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하나밖에 없네.”

 

오라버니의 태도는 완강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합세.”

 

그 산골마을이 우리가 들른 마지막 인가였다. 산길을 오르며 힘겨워하는 나를 이끌면서 오라버니는 말해주었다.

 

“숲은 넉넉하고 너그럽단다. 자신을 바쳐 남을 먹여 살리지. 경아야, 공허한 신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거라.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것들, 삶 자체야.”

 

나는 간절히 묻고 싶었다. 오라버니의 믿음이야말로 허상에 싹을 틔우고 있지 않나요.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왜 고향 마을을 떠난 건가요.

 

비탈길을 더듬으며 나아갈 때 닭 한 마리가 다리를 묶은 끈을 쪼고 달아났다. 나는 새끼 염소에게 머루 두어 알을 먹여주었다. 말은 안 했어도 모두들 내심으로는 두려워하고 있었으리라. 산은 거대한 존재였으니까. 그에 비하면 낱낱의 인간이란 티끌처럼 작고 하찮을 따름이었다.

 

우리는 고목 뿌리 사이에서 도롱이를 껴입은 채로 잠들었고 이마에 방울진 이슬방울을 훔치며 깨어났다. 젊은이 하나가 무턱대고 계곡에 뛰어들었다가 제 아비가 내어준 나뭇가지를 붙들고 구사일생으로 물밖으로 기어 나왔다. 아낙들이 벌집을 건드려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몇은 옻이 올라 고생했다.

 

어느 날 나는 소피를 보기 위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고라니와 마주쳤다. 놈은 꼬리를 쫑긋거리며 나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더니 껑충 뛰어 수풀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산세는 점점 험악해졌다. 아침부터 유난히 초조해하며 앞서 나가던 오라버니가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네, 여기야. 어서들 오게.”

 

우르르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 비탈 아래를 주시할 때 누구도 함부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 터는 오라버니가 입이 닳도록 설명한 장소와 닮아 있었다. 양지발랐고 아늑해 보였다.

 

우리는 비로소 머무를 땅에 다다랐다. 오라버니의 믿음은 보상받았다.

 

 

 

그날 밤 우리는 들메나무 둘레에 누워 마지막으로 야숙했다. 나는 꿈속에서 태산만큼 거대한 존재였다. 별빛에 목욕하고 새벽이슬에 머리를 감았다.

 

내 팔은 무수한 가지들이었고 심장은 수림 속에 감추어진 샘이었다. 내 발은 대지의 뼈를 디디고 있었으며 들꽃을 엮은 관을 쓴 머리는 구름 위로 치솟아 있었다. 나는 까풀이 없는 눈으로 옛 시절의 비밀을 꿰뚫어보았다. 수맥은 내 혈관이었다. 비탈에 난 토굴 하나하나가 나를 대신해 숨을 쉬었다. 내가 터뜨린 탄성이 산 자들의 노래에 섞여 메아리칠 때 마음이 없는 것들조차 기꺼워 어깨춤을 추었다.

 

그러다 잠에서 깼을 때 내 옆에는 염소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튿날 장정 몇이 땅을 파고 아낙들이 마른 풀을 엮어 움집을 만들었다. 굴피집을 세우는 동안 머무를 거처였다. 오라버니는 범연 할아범과 같이 하루에도 수번씩 산비탈을 오르내렸다.

 

괭이로 흙 표면을 흩어 토질을 살폈고 큰 돌이 어디에 얼마나 묻혔는지 파악했다. 풀 한 줌을 던져 나부끼는 모양을 관찰해 바람의 세기며 향방을 가늠하기도 했다.

 

나는 아낙들과 더불어 굴피나무 껍질을 모았다. 염소가 메애 울면서 나를 쫓아 다녔다. 웃을 때조차 어쩐지 화난 것처럼 보이던 중년의 여자들은 괄괄한 음성으로 뱀 굴이 어디에 있는지 땔감으로 적당한 나무는 무엇인지 따위를 알려주었다.

 

밤이면 움집에 모여 풀을 엮어 만든 요를 깔았다. 매일의 노동이 중요한 이 같은 숲속에서는 나이도 성별도 무의미했다. 누구도 신분의 차이를 입에 담지 않았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사양하지 않고 일했으며 거둔 것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은 정확히 그가 누운 자리와 같았다.

 

화덕에서 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나는 오라버니의 등 뒤에 달라붙어 몸을 옹송그렸다. 오라버니는 천성적으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등판에 식은 뺨을 뭉그러뜨린 채로 이 터에 처음 이르렀던 날 나를 전율하게 했던 목소리를 되새겼다. 그 푸르렀던 신명(神命)을 또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며칠 뒤 범연 할아범이 사람들을 불러 더 추워지기 전에 씨 뿌릴 터에 나무를 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이듬해 불을 놓기가 용이해진다고 했다.

 

몸을 쓰는 일에 어지간하게 숙달된 까닭인지 나는 낫을 손에 쥐고도 더는 무서워 떨지 않았다. 오라버니와 범연 할아범이 낙점한 장소는 과연 작물을 재배하기 적절한 곳처럼 보였다. 흙빛은 검었고 지형은 완만한데다 바윗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수풀에서 노루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그러나 범연 할아범이 쏜 조총은 간발의 차이로 놈들을 놓쳤다. 그 와중에 여자애 하나가 돌팔매질로 토끼를 잡아 또래아이들을 경탄하게 했다. 어린 아이들은 망태기를 걸머메고 덤불을 헤치며 새알을 찾았다.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은 색시가 감시라도 하듯 그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