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캡틴 – 하

  • 장르: 역사, 판타지
  • 분량: 172매
  • 소개: 아무도 몰랐던 어느 장교 이야기. ※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 발췌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및 원작 수필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 더보기
작가

어 캡틴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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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나오긴 했지만, 내가 꼽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바로 학교에서 일했을 때다. 솔직히 난 타고난 교사는 아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잘 다뤄야 하고 사람 대하는 데 여유가 있어야 하니, 어쩌면 끔찍하게 안 맞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일을 하면서 행복했다. 부족하긴 했지만, 적어도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이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애들은 나를 편하게 여겼다. 다른 선생들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들어 권위를 세우지 않았으니까. 요즘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그때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교무실에서는 애들 버릇을 잡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든지, 현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꼴같잖게 착한 척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 한두 해가 큰 물의 없이 지나가며 수군거림도 줄어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마을 최초로 신식 교육을 실시한 이 학교의 전대 교장이라는 사실을 듣고, 동료들은 내 교육 방식이 괴상한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고 말했다.

 

– 그게 효과가 있어?

 

그들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 힘들진 않아요? 난 도저히 매 없이 못 하겠던데. 애들이 말을 안 듣잖아요.

 

– 저는 특별히 어려운 건 못 느꼈어요.

 

내게는 이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사실 뭐라고 대답해도 상대는 이해 못할 사람일세, 라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끔 상상했다, 학교에 입학할 아이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하는 장면을. 쉬는 시간이어도 일어나면 안 되고, 화장실 갈 때도 꼭 말을 해야 한대. 수업 시간처럼. 니나 언니가 욜 선생을 조심하랬어, 완전 미쳤대. 쉬는 시간에 누가 화장실 간다고 말했더니, 말투가 맘에 안 든다고 거울 앞에서 피멍 들 때까지 자기 얼굴을 때리게 했대. 엎드려뻗쳐나 물구나무, 얼차려는 기본이고, 각목 같은 걸로도 뚜드려 팬댔어. 다른 선생들도 그런다던데? 그 반이 그 반이지 뭐. 첫날부터 안 맞기나 빌자. 어쩌면 애들한테 학교는 수용소 같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생소한 걸 배워야 하는 곳. 소리지르고 비꼬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어른들 뿐인 곳. 아니면,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걸 당연하게 여겼으려나. 아이들은 조금 주눅들긴 했어도 대체로 활기차 보였고, 일부 사디스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는 체벌을 규칙에 따라 적용했다. 사랑의 매는 어디에나 있는 유구한 전통이었다. 내 주변에서는, 신식 교육을 들여온 우리 아버지만이 그 효과적인 교육 방식을 거부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학교 선생이 우리를 때리는 것도 반대했다. 글씨를 삐뚤빼뚤 써도, 수업 시간에 잡담을 해도, 교과서나 책상에 낙서해도, 심지어 친구를 때리고 나쁜 말을 하고 쓰레기통을 발로 차 넘어뜨려도 아버지를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말로 해결할 일로 애를 때리면 어떡합니까, 그게 아버지의 일관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괴짜에 범생이였고, 우리 아버지는 학교 주임선생이었지만, 나도 매를 맞았다.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는 덜 맞은 편이다. 주임교사 아들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안 때리는 아빠 밑에서 오냐오냐 큰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선생들이 나를 조심스러워했다. 그래도 아무튼 체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매 맞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가급적 평범하고 눈에 안 띄는 편이 좋고, 우리 아버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을 끄는 사람이니까. 형은, 딱 한 번, 체벌당한 일을 가볍게 흘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갔을 거다. 그 일은 우리 둘 모두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학교에서 튀는 건 좋지 않다. 우리는 맞았고, 억울하게 혼이 났고, 놀림 당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에게는 함구했다. 아버지가 까맣게 몰랐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 그 모든 일들을 제대로 안다면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

 

오랫동안 혼자 궁금해 한 또 다른 것은, 수많은 아이들이 매 맞는 걸 무서워하고 싫어하는데도 왜 체벌이 없어지지 않는지였다. 울고불고 하던 그 많은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매 맞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동급생들을 여럿 알았다. 그들은 무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억울해하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내가 잘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렇게 굳어진 채 사회로 흩어졌다. 어른이 되어 마주친 그들은 대부분 체벌을 당연하게, 적어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내가 잘해야지’라는 생각은 아이들에게 반영됐다. 얻어맞고 우는 애들을 봐도 그때의 억울함은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덜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어른으로써 체벌에 반대했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모두 나 같아서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 보기에 어떻든 내 마음은 어린애였으니, 선생보다 학생들이랑 더 가까운 게 당연하다. 나는 자라지도 못했고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겉보기로는 빼다박았지만, 속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냄새를 잘 맡았다. 그 애들은 내게 호기심을 가졌고, 낯설고 경계하면서도 쭈볏쭈볏 다가와 나를 탐색하곤 했다. 그렇게 나를 안전지대 삼은 후에는 자주 놀러왔다. 점심 시간마다 난 물고기에게 둘러싸인 산호 같았다. 보통은 어디 앉아서 지켜봤지만 때로는 아이들 무리에 섞여 놀기도 했다. 특히 저학년 애들은 날 도토리 취급하면서도 꼭 자기 팀에 넣고 싶어했다.

 

그 날들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학교에서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있던 거다. 거기서는 운동장 전체가 훤히 보였다. 햇살이 내리쬐고, 아이들은 뛰어놀고, 내 옆에는 모나가 앉아있었다.

 

모나는 겉도는 아이였다. 매 학년 매 학기마다 꼭 한 명쯤은 있는 슬픈 외톨이. 그 애들이 어울릴 수 있는 상대를 찾아주는 것도 담임이 하는 일 중 하나다. 사교적이고 마음이 열린 동급생, 또는 처지가 비슷한 다른 외톨이, 내지는 기타 등등의 마땅한 상대를 붙여주면 곧 언제 슬펐냐는 듯 활기차지곤 했다.

 

그런데 모나는 좀 달랐다. 그 애는 외톨이여서 슬픈 게 아니라, 슬퍼서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학기 초만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애였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 하거나 못 하지도 않았고, 수업 시간에 질문을 퍼붓는다거나 남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했다. 내가 고학년 담임이 된 건 그 해가 처음이었고, 반에는 모나보다 두드러지는 애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다.

 

어느 날, 모나가 코피를 쏟기 전까지는.

 

– 선생님, 쟤 피 나요!

 

다급한 부름에 달려가보니 모나가 고개를 숙이고 코를 감싸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책상은 이미 쏟은 코피로 흥건했다. 학생과 선생 모두가 놀란 와중에 모나만이 침착했다. 그 애는 자기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를 잠잠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모나를 급하게 보건실로 내려보냈다.

 

솔직히 모나가 코에 솜을 끼우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이걸로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코피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더니 급기야 머리가 아프다는 말까지 추가됐다. 결국 나는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보건 선생에게 자문을 구했다.

 

– 이젠 머리도 아프대요.

 

– 그러시겠지.

 

보건 선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 증후군 같은 거야. 왜, 예민해서 유난 떠는 애들 있잖아. 그런 애들이 새학기 되면 꼭 열 몇 명씩 와서 배 아파요, 머리 아파요, 코피 나요, 그러지. 냅두면 알아서 괜찮아지니까 걱정 말아. 왜, 윌로우엘름 선생은 이런 애가 처음인가?

 

콧속에서 동맥이라도 터진 것처럼 피를 흘려대는 애를 말하는 거라면, 네. 처음이에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날 갸륵하게 보는 보건 선생을 내버려 두고 나왔다.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보건 선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모나가 수업 도중에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졌고, 모나의 부모님은 내게 면담을 신청하지 않았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모나가 학교에서만 코피를 흘리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모나는 이제 아침 조례가 끝나자마자 보건실로 내려가서, 점심 때 잠깐 올라왔다가 하교 시간까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누구부터 찔러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우선 보건 선생을 다시 만나서 확실한 소견을 들어야 할까, 아니면 일단 부모님께 연락해서 모나의 상태를 알려야 할까, 혹은 먼저 모나랑 얘기를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책을 나섰다가, 운동장 옆 계단에 앉은 그 애를 봤다.

 

다들 뛰어노는 점심 시간이었다. 남자애들은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축구를 하고, 그네에는 줄이 늘어서고, 어느 고학년 아이가 추종자들 앞에서 철봉 시범을 보였다. 운동장에 없는 애들은 교실에서 재잘대고 있을 시간이었다. 모나는 햇살에 달궈진 계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혼자서.

 

– 마실래?

 

나는 내가 마시려고 들고 있던 코코아 잔을 내밀며 물었다.

 

모나는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잔을 넘겨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애 옆에 앉았다.

 

그리고 둘 다 말이 없었다. 모나는 다루기 난감한 동물을 대하듯 코코아 컵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뭐라고 말문을 터야 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떠오르는 것들이라곤 ‘학교 생활은 어떻니?’ 같은 것들 뿐이었다. ‘친구들이랑은 잘 노니?’, ‘공부는 할 만 하니?’ 등등. 백만년 만에 가족모임에서 만난 삼촌이면 모를까, 반에서 매일 보는 담임이 할 말은 아니었다.

 

– 선생님.

 

모나가 문득 말했다.

 

– 선생님은 학교생활 괜찮으세요?

 

– 응?

 

– 학교요. 괜찮으세요?

 

나는 이 엉뚱한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솔직히 좋지는 않아.

 

교사들 틈에서는 외톨이고, 애들 다루는 것도 사실 쉽지 않았다. 매일 대여섯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해야 하고, 와중에 애들도 단속해야 한다. 칠판에 글씨를 적고, 몰래 욕이 적힌 쪽지를 주고받는 애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질문에 답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을 조용히 시키고, 쉬는 시간에는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애들이 치고받으면 달려가서 말리고, 다시 수업을 하고… 나는 이것들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물었다.

 

– 너는 어때?

 

모나는 자기 발가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뭐, 그냥 그렇죠.

 

– 요즘 많이 힘드니?

 

모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 보건실에 자주 가는 것 같아서. 혹시 많이 아프면 큰 병원에…

 

– 전 괜찮아요.

 

모나가 말했다.

 

– 진짜로요. 그냥 요즘 좀 피곤한가 봐요. 아님 사춘기거나… 저번에 집에서 코피 난 적 있었는데,

 

– 집에서?

 

– 네. 집에서 코피 쏟았는데, 책이 다 젖었거든요? 근데 아빠 말이 자기도 제 나이 때 그랬었대요. 그런 걸 보면 유전인가?

 

나는 실없이 웃는 모나를 보며 집에서는 멀쩡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조용히 폐기했다. 남은 건 카우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후두둑 코피를 쏟는 모나였다. 지나가던 가족들은 그닥 놀라지도 않는다. 엄마는 무심하게 휴지를 건네고, 아빠는 자기도 어릴 때 그랬노라고 말한다. 지금은 다 나았지. 상상 속에서, 모나 아버님이 웃으며 말했다. 애를 안심시키려는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한 마디는 모나의 고통을 지워버렸다. 모나가 휴지로 코를 막자 가족들은 도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모나의 고통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머릿속 거실의 풍경에 숨이 막혀서 신경을 돌리려고 물었다.

 

– 부모님께 말씀드렸니?

 

– 뭘요?

 

– 코피. 자주 난다고.

 

– 했어요. 전에도 이랬다고. 요즘 자주 이런다고.

 

–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 네.

 

– 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 다른 병은 없는지 확인한다거나…

 

– 안 했어요. 그런 거 확인해서 뭐해요.

 

모나는 뒤꿈치로 계단을 쿡쿡 찔렀다.

 

– 모나야.

 

– 네?

 

– 너는 학교생활 괜찮니?

 

모나는 잠시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눈.

 

– …아뇨.

 

– 뭐가 제일 힘들어?

 

– 애들이요.

 

교실에 들어오면서부터 위축된다. 이유도 모르게 숨이 막히고, 심장이 쿵쿵 뛴다. 그 와중에 뒷자리 애는 동작이 굼뜨다고 잔소리를 퍼붓고, 쉬는 시간이면 누가 자꾸 시비를 건다. 모나는 더듬더듬 그렇게 말했다. 내용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하소연이었다. 선생님, 얘가 때려요. 선생님, 쟤가 괴롭혀요. 하루에 두어 번은 꼭 듣는 흔해빠진 투정들.

 

애가 예민한가 보네. 머릿속에서 보건 선생이 말했다. 성질 좀 고치라고 그래. 너무 까다로워도 인생 살기 불편하다고.

 

나는 코피 흘리는 모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슥 문지른 손등을 따라 뺨에 번지던 핏자국, 순식간에 젖어버린 책상, 코를 막은 손가락 사이로 뚝뚝 흐르는 피. 보건실로 사라지던 축 처진 뒷모습. 말은 별 일 아니게 들리는데, 행동은 커다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모나의 얘기에 성실하게 반응하며 그 말과 행동의 차이를 어림해 보았다. 힘들겠다. 짜증나겠네. 속상했구나.

 

– 선생님이 도와줄까?

 

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어이없는 걸 넘어 비현실적인 얘기를 들은 것처럼.

 

– 어떻게요?

 

– 애들한테 널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고, 부모님께도 네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씀드릴게.

 

– 왜요?

 

– 네가 힘드니까?

 

– 그러니까 왜요.

 

어째서요. 모나는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씹었다.

 

– 꾀병일 수도 있잖아요.

 

– 그렇게 생각 안 해.

 

–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 아픈 건 사실이잖아. 힘든 것도 사실이고.

 

– 별 거 아니라잖아요.

 

– 별 거야.

 

나는 힘주어 말했다. 모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모나의 몸에서 유일하게 힘있는 부위였다. 가끔 뒤꿈치로 바닥을 찍어대고, 허공을 걷어차는 발들.

 

–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 응.

 

– 이상하네.

 

모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슬퍼 보였다.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 선생님 진짜 이상해요.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장난스러운 투로 그래서 싫냐고 물었던가. 모나는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울었던 것도 같다. 내가 달래줬던 것 같다. 괜찮아, 모나야. 괜찮아. 선생님이 도와줄게. 애들한테도 얘기하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릴게.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가끔 이렇게 같이 앉아있자, 라고, 점심 시간에 햇볕 쬐면서 잠깐이라도, 내가 네 말을 듣겠노라고, 말했던 것 같다.

 

 

 

트럭 사건으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레옹은 이제 내게 익숙해진 것 같다. 그는 내가 있든 없든 다른 현지인 직원들과 편하게 수다를 떤다. 탕비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걸 나도 슬쩍 건너듣곤 한다. 가족들 얘기, 우스개소리,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소문 같은 것들. 롤렉 씨는 애가 하나 더 생겼는데, 이미 넷이나 감당하는 중이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냐 양은 기회가 될 때마다 최근 유행하는 농담거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몇몇은 난해하고 몇몇은 수위가 장난 아니라서 다들 으엑 소리를 내며 질색했다. 열차와 대담함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나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루는 이름이 리슈인 어떤 청년이, 대형 군용 트럭이 인력거를 들이받은 이야기를 했다.

 

“안에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냥 밀고 지나갔대요. 사람들이 쫓아가면서 그만 멈추라고 소리치는데, 트럭은 계속 달리고, 인력거 안에는 튕겨나가지 않은 한 사람이 남아 있었고… 그러다가 인력거가 차 바퀴에 뒤엉켜서 멈춰 섰죠. 군인들은 차에서 내려 인력거를 떼어내 버린 뒤 다시 트럭에 올라 제 갈 길을 갔대요.”

 

나는 요아힘이 예전에 했던,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다가…’라는 말이 뭘로 이어질 뻔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알아요, 리슈. 나도 봤어.”

 

롤렉 씨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부지기수지.”

 

로제에서는 어떤 간 큰 강도가 두 명의 경찰관에게 발포했다는 이유로 그 동네 사람 백 명이 총살당했다. 토마 다리에서는 군인 두 명이 민간인을 희롱하다가 반항했다는 이유로 그 가족들을 전부 끌어내 죽였다. 저번 주에는 격리 구역의 산부인과에 돌격대가 난입해 아기들을 자루에 처넣고 쓰레기차에 실어 보냈고, 그 전에는 스키를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 다섯 트럭을 동부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끌고 갔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못 나온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기 때문이다. 특수한 고문실, 구타를 동반한 야만적인 심문, 끔찍한 수준의 강제 노동. 연기를 피워올리는 건 가스실일까? 아니면 산 채로 불태우는 화장장? 사람들은 그 위에 걸린 구름들이 수증기가 아니라 영혼이고, 비워진 격리 구역에 살던 이들은 노동 수용소에 간 게 아니라 휘발유 차량 속에서 배기 가스를 마시고 죽었다고 수군댄다.

 

이건 우리 사무실에서, 현지인 직원들로부터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 어떤 간부도 장교도 병사도 이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신문과 라디오에서 말하는 찬란한 승리와 장밋빛 미래 어쩌고를 그리느라 바빠서 이 도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체육대회 규모가 줄어드는 걸 보면 우리가 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케르 연방은 이 나라까지 내려와 엎치락뒷치락 하고 있고, 동부전선에서는 최근 참전한 밀트베터 왕국이 완전 날아다닌다. 밀트베터 왕국은 엄청난 산업 강국인데 특이하게도 보통선거로 군주를 뽑는다. 세계사 수업 때 애들한테 선거군주제와 공화제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애들은 선거로 뽑으면 무조건 총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현실이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개념들이 분명하고 단순하며, 상황과 생각이 잘 맞고, 단어들이 변질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요지경이진 않을 텐데.

 

총통은 우리 민족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머리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있다. 집권한 이후로 그를 향한 비판이 싹 없어졌다는 게 좋은 예다.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존중할 거라고 해 놓고는 식민지를 몇 개나 만들었고,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에 강제 수용소를 세웠다. 이 전쟁은 민족의 터전을 회복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성전 같은 게 아니라 남의 나라 자원을 두고 벌이는 통 큰 싸움에 불과하다. 여태 있어왔던 다른 전쟁들처럼. 끔찍한 상상을 자아내는 강제 수용소의 내부는 의외로 단출할지도 모른다. 다들 시궁쥐는 열등하고 미개한 존재로, 군인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괴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듯이. 레옹은 비워진 격리구역이나 수용소 얘기를 들어도 담담해 보이지만, 그 속이 어떤지 누가 알까. 가끔은, 모나에게 그랬듯 충동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걸 듣는 일은 없을 거다.

 

한 30년쯤 후에는 가망이 보이려나. 전쟁이 끝나고 이 나라가 해방되고 우리 둘 다 살아남는다는 전제 하에, 30년쯤 지나면, 나쁜 기억은 좀 바래고 괜찮아져서, 편지도 주고받고 집에 초대해서 차 한잔 하며 툭 터놓을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 점심 시간에 탕비실에서 수다 떠는 직원들을 지켜보면서 슬쩍 그런 상상을 했다. 햇볕 드는 거실 탁자에 놓인 찻잔 같은 것들을. 레옹의 새로운 집과 새로운 가족들과… 요아힘도 있을까. 그 친구 소식을 들은지 너무 오래됐다. 나는 아직도 그의 연락처를 모른다. 레옹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둘이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 서로 연락하고 지내는지 어떤지 모르겠어서. 대신 신문이나 소문에서 자네카 시 얘기가 나오면 열심히 귀담아 듣는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그런 게 생기기 전에 요아힘 가족들이 이사 갔으면 좋겠다. 군인들이 들이닥치지 않을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물론 꿈 같은 얘기다. 이 나라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암세포에 점령당한 몸처럼 사방이 아비규환이다. 이 동네에서는 우리 군이 사람들을 죽이고, 저 동네에서는 지하 반정부 단체나 아케르 연방이 시가전을 벌이고. 이런 상태에서 사지 멀쩡하게 국경을 넘어가려면 초인적인 수완이나 하늘의 도움 같은 게 필요하다. 나는 가끔 요아힘을 위해 기도한다. 그 친구가 가게를 오랫동안 지키느라 평생의 운을 다 써버리지 않았기를. 엄청난 행운의 사나이라서 가족들과 함께 끝의 끝까지 무사하기를.

 

그리고 가끔은, 아주 조금, 그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기를 바란다.

 

안다. 욕심스런 생각이다. 난 너무너무 안전하니까. 젊은데도 후방에 있고, 녹색 군복에 중위 계급장을 달고, 체육관에서, 삼시세끼 잘 먹으면서, 시체 대신 서류에 파묻혀 산다. 내 주변에서 맴도는 죽음은 갑작스런 공개처형이나 수용소행이라기보다는 과로사나 교통사고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런 정신머리를 갖고도 여태 축출되지 않고 무사하지 않았나.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고. 나는 목숨을 위협받지 않고 너무너무 잘 지낸다. 지나치게 잘 지내서 감사기도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도 모른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케르 연방이 린드레이크 근처까지 내려왔다. 린드레이크는 여기서 도시 두 개 정도 떨어져 있다. 소식을 가져온 병사들은 망할 놈들이 그렇게까지 가까워졌다며 치를 떨었다. 물론 그 사람들은 계속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꾸준한 노력이 새삼스럽게 빛을 발한 것 뿐이다. 며칠 후 나는 린드레이크에 인부들을 보낼 계획이니 기차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해 수로를 파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출발 당일에도 기차역에 갔는데 인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직업 소개소에서 전해 듣기로는, 모집 공고를 냈지만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직원은 이 나라 사람들이 점점 말을 안 듣는다고 푸념했다.

 

주변이 매일같이 술렁였다. 달이 가까워지면 바다가 솟아오르듯이. 한동안 창 밖에는 상자와 자루와 가구를 가득 담은 이삿짐 트럭이 사람보다 자주 보였다. 물론 그 주인은 우리나라 사람들, 예컨대 요아힘의 가게 자리를 차지한 사업가 같은 이들이다. 여기 사람들은 떠날 이유가 없다. 아케르 연방이 이기면 우리는 없어질 테니까. 현지인 직원들은 전보다 희망적인 눈으로 출근하고, 우리 군은 간부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서로 상반되는 명령을 내리고, 누구는 아무 명령도 받지 못하고. 쟁여놨던 식량과 비품들은 불태우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다짜고짜 첩보부에 재배치됐다. 대대장님은 동정 한 푼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통보했다.

 

“갑작스럽게 결정해서 미안하게 됐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좋지가 않잖나. 곧 전투가 있을 거야.”

 

전투. 나는 그 단어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창문을 열었다가 달만한 운석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본 것처럼. 사실 총탄, 수류탄, 먼지투성이 병사들은 언제든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이었다. 후방에 예비역이라 여태 볼 일이 없었을 뿐이지. 그게 새삼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나는 작별인사도 못한 채 새로운 사무실로 끌려가서 아케르 연방군이 어디 있고 어디로 올 것 같은지를 적어놓은 서류에 파묻혔다. 새 상관인 쉬르머 중장은 첫날부터 날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새 사무실까지 따라오더니, 내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관찰하겠다면서 책상 뒤에 죽치고 앉았다. 나는 덜덜 떨면서 짐을 풀었다. 등 뒤에서 요아힘보다도 더 크고 풍채 있고 무시무시한 쉬르머는 눈을 부라렸다. 꼬투리가 잡히는 즉시 조져버리겠다는 태세였다.

 

이틀 후 린드레이크에서 아케르 연방군과 접전이 벌어졌다. 그날 우리는 전면 경계 태세에 돌입해 밤을 꼬박 세웠다. 경계명령이 없었어도 어차피 기관포 터지는 소리 때문에 못 잤을 거다. 그런 건 하루이틀 하고 끝나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포성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낮에는 물론이고 밤중에도 무슨 공사판처럼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소리 때문일까, 상황 때문일까. 나는 폭탄을 실은 전투기와 총 든 군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오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창 밖의 건물들은 처참히 무너졌고 사람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밤중에 깨서 창 밖을 보니 달이 있었다. 동그란 달. 그게 유난히 커 보였다. 유난히 가까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대기권에 들어와서 날 내려다 볼 것처럼. 기실 다가오는 건 달이 아니라 달만큼 커다란 일이었다. 그게 닥치면 난 어떻게 될까? 사람을 죽일 걸 걱정해야 할지 사람에게 죽을 걸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우왕좌왕하다 포로 같은 게 되겠지만. 나는 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넣고 체육관 직원들은 무사한지, 내 후임자가 해고하진 않았는지 걱정하면서 보냈다. 또는 아케르 연방이 언제 쳐들어올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내지는 왜 적군의 위치가 불분명하냐는 쉬르머의 짜증을 들으면서. 나는 그에게 적군의 동향을 하루 네 번씩 보고해야 했다. 첩보부는 연방군이 어디 있는지, 어디로 올 것 같은지를 면밀히 살피며 그들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싸운 건 연방군이 아니었다.

 

목요일 오후, 보고서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최고 수준의 경계령을 알리는 소리였다. 병사 하나가 뛰어 들어와 공격이 개시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확실히 아케르 연방군 얘기는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린드레이크 근처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나는 쉬르머가 이 일로 날 닦아댈까 봐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그는 이 뜬금없는 사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짐 싸서 대피하느라 바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 부상한 적은 적군은 연방군도 왕국군도 아닌 ‘지하 반정부단체’였다. 그동안 쭉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여 오던 이 나라 군인과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모여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그 용감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여덟 개 구역을 점령했지만 다음 날부터 곤란에 빠졌다. 우릴 깜짝 놀라게 하긴 했지만 무기고를 터는 데는 실패했고, 아직 대포도 탱크도 비행기도 갖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반면 우리 군대는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근처에 있던 병력을 싹 끌어모았다. 이틀만에 사단, 여단, 보병 대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진압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돌격대 대장은 도착하자마자 박격포부터 발사했다. 시가지에 있던 빌딩들이 거기 맞아서 무너져 내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뚜껑 열린 총통이 도시를 초토화하라고 명령했다. 사령관은 그 명령을 전하며 이 도시의 모두를 강도와 반역자로 보고 무자비하게 전멸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살은 그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민스키 사단은 지하실에 숨어있던 민간인들을 끌어내서 어른들을 다 죽이고 아이들은 탱크 앞에 묶어 인질로 삼았다. 빌레만 여단은 천사의 날개 병원으로 쳐들어가 환자와 직원들에게 화염 방사기를 쐈다. 한때 지하 반정부단체라고 불리던 반군은 당연히 더한 꼴을 당했다. 그렇게 다 죽여대는데도 포로가 많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제 내 오후 일정은 포로를 심문하는 걸로 꽉 찼다. 나는 좁아터진 심문실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반군의 규모는 어떻고 전략은 뭐냐는 질문을 반복하면서 보낸다. 심문 대상자 중에는 중학생 여자애, 전직 경찰, 성직자도 있었다. 다들 우리 군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징은 떼 내거나 천으로 가린 채였다. 여자애는 총상을 입었고 성직자는 왼쪽 장딴지살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의무실로 보냈다가 쉬르머에게 욕을 먹었다.

 

 

 

레옹은 점심 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어깨 부분이 뜯어진 갈색 셔츠를 입고 있다. 얼굴은 수척하고, 눈은 트럭에 납치됐을 때처럼 겁에 질렸다. 경비병은 레옹의 어깨를 틀어쥐고 의심스럽게 묻는다.

 

“정말 아는 사람입니까?”

 

“그래. 아는 사람 맞으니까 그만 놓지.”

 

레옹은 경비병이 놓아주자 비틀거린다. 예전에, 돌격대 하사의 손에 요아힘이 흔들렸던 것처럼. 나는 그를 붙잡고 질문을 퍼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어떻게 지냈냐고, 집이 무너지진 않았냐고, 다른 직원들은 어쩌고 있는지 아냐고, 아직 식사 안 했으면 들어와서 뭐라도 먹겠느냐고, 캔 스파게티 좋아하냐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못한다. 레옹은 불안한 듯 경비병을 힐끔거리며 어제 찾은 캠프 얘기를 한다. 나는 그게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가 이제 안전하다고, 적어도 사방이 불타는 거리에서 지하실을 찾아 헤매는 처지는 면했다고 기뻐한다. 레옹은 중위님도 잘 지내시냐는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 나는 새 상사인 쉬르머 중장이 얼마나 고약한 사람인지에 대해 과장과 유머를 섞어가며 늘어놓는다. 덕분에 분위기가 좀 밝아지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도로 처진다. 하늘을 날고 싶어서 뛰었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병아리처럼. 레옹은 자기가 우리 군을 위해 일했다는 증명이 필요하다. 난리통에 채용증서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큰소리를 친다. 경비병이 여전히 그를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펜과 종이를 들고 나와 벽에 대고 진술서를 쓴다. 국방군 예비역 육군 보병중위 윌로우-엘름. 서명까지 완벽하게 해서 레옹에게 건네준다. 레옹은 그걸 소중히 품에 넣는다.

 

나는 모른 척 하는 데 실패한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날카롭고 실망스러운 사실을. 나는 그를 고용할 수 없다. 첩보부에서는 현지인 직원을 못 두게 하니까. 쉬르머가 나를 너무 부려먹어서 시간 내기도 불가능하다. 오늘 레옹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린 종전 후에나 봤을 거다. 레옹은 위험을 무릅쓰고 숙소 입구까지 와서 윌름 중위님을 만나야 한다고 우겼다. 경비병이 밀쳐내자 큰 소리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1층 휴게실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나가보니 경비병이 레옹을 경찰에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레옹은 그렇게 용기를 냈는데 나는 종이 한 장 밖에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고맙다고 한다. 그는 진술서와 함께 불타는 도시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돌아와서 스파게티를 먹고, 심문실로 간다. 그 안에는 레옹과 별다를 게 없는 청년들이 앉아있다. 나는 그들에게 반군은 어디 있는지, 전력은 얼마나 되고 전략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집단에 가담했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 웃으면 더 기괴해 보일 것 같아서 무표정으로 딱딱하게. 그러고 있자니 마음이 찝찝해진다. 누군가를, 레옹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다. 아까 내가 보여준 친절이 사기고 순 뻥인 것처럼.

 

학교 도덕 시간에 왕자와 거지를 가지고 수업을 했었다. 의무가 버거웠던 왕자가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자유를 만끽한 왕자는 성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으려고 했지만 문지기에게 가로막혔다. 문지기는 왕자를 거지라고 부르며 썩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그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웃는 표정, 화난 표정,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실험했다. 갑자기 그게 생각난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항상 단정한 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 꼬마들을 가르치던 모습 그대로다. 학교 근처 담장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있으면, 우리 반 애들이 지나가다 한마디씩 하곤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과자 있어요? 왜 선생님은 맨날 자전거 타고 와요? 저도 타고 오면 안 돼요? 오늘 수업 안 하면 안 돼요? 선생님은 선생님인데 왜 우리랑 같이 와요? 지각이에요, 선생님.

 

그렇게 아는 척 하는 아이들 중에 모나는 없었다. 그 애는 자주 지각을 해서 등굣길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대신 우리는 점심 시간에 만났다. 처음 얘기했던 계단에 나란히 앉아, 나는 듣고 모나는 얘기하곤 했다. 힘들어요, 힘들어요, 힘들어요. 하루치의 고통을 머금은 채 두서없이 나열되는 말들. 하소연하는 데 지치면 다른 얘기도 했다. 무지갯빛 노을을 보신 적 있어요? 아랫집 노랑이가 어제 새끼를 낳았어요. 책에서 봤는데, 문어는 산호초나 바다뱀 흉내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대요. 문어 엄마는 알을 지키다 죽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한댔어요.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알만 보다가 새끼들이 태어나면 힘껏 불어서 바다로 내보낸대요.

 

– 부럽다.

 

모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대놓고 드러낸 건 한번 뿐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애의 말에는 돌봄에 대한 갈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건 아무도 모나를 돌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학교도, 부모님도, 모나 자신조차도. 나는 우리의 첫 번째 대화 직후 모나 어머님을 만났지만, 어머님의 반응은 보건 선생의 그것과 똑같았다.

 

–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워낙 엄살이 심해서요. 학교 다니기 시작한 이래 매년마다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아요. 새학기마다 선생님이 싫어, 애들도 싫어, 불편하고 무서워서 못 있겠다고 징징대곤 하죠. 그러니 번거롭게 신경쓰지 마세요. 모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학기말 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잘 놀곤 했으니, 좀 기다리면 분명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나 확고해서, 나는 감히 매년 코피도 쏟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래서 모나 어머님은 모나가 보건실에 얼마나 자주 가는지, 수업을 얼마나 많이 빼먹는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렇게 모나를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 애가 그토록 무기력했던 건 어쩌면 자기가 내버려졌다는 인식 때문이지 않았을까. 모나는 여전히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엄살이라느니 유난이라느니 하는 말 없이 1초라도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반면 나는 열심히 도와줄 생각으로 그 애의 말을 들었다. 단조로운 넋두리 속에 숨겨진 외로움, 두려움, 불안에 귀를 기울였다. 폐쇄공포, 가죽으로 만든 수술대 같은 보건실 침대, 화단에 핀 칸나, 복도 구석에 전시된 물고기 박제.

 

자주 반복되는 이름들도 있었다. 수잔, 헤르만, 수잔, 헤르만, 헤르만, 수잔, 헤르만. 걔가 제 머리에 야구공을 던졌어요. 언제 그런 거야? 저번에요. 걔가 사과는 했니? 아뇨. 내가 뭐라고 해 줄까? 아뇨. 모나가 가져오는 사건들은 유감스럽게도 며칠 묵은 것들이었다. 그 애가 말하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지난 일들은 써먹기 곤란해서, 나는 현장을 잡기 위해 교실을 눈여겨 보았다. 이전에도 무슨 사고가 생길까봐 지켜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는 점이 달랐다. 교실에 있는 시간을 점점 늘려가는 모나에게 누가 접근하는지, 시비를 걸거나 괴롭히지는 않는지, 아니면 혹시 모나가 편안해 하는 상대가 있는지, 그 애가 모나와 친구가 되지는 않을지. 나는 일하는 틈틈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배배 꼬는 모나를 살폈다.

 

학교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쉬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수잔이 모나와 옥신각신했다. 대충 들어보니 다음 수업할 교과서 안 가져오고 뭐 하냐는 소리 같았다. 나는 쟤한테 한마디 해 줘야겠다 싶었고, 모나는 힘없이 일어나서, 교과서를 챙겨 돌아왔다. 그때 헤르만이 모나의 발을 걸었다. 콰당! 모나가 교실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입질을 감지한 어부처럼 벌떡 일어났다. 교실을 가로지르는 내 발걸음에 아이들이 놀란 눈을 했다. 일단 모나를 일으켜주고 챙겨준 다음,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헤르만에게 말했다.

 

– 헤르만,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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