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피와 커피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뱀파이어 #성장 #하이틴
  • 평점×44 | 분량: 104매
  • 소개: 어느 날 내가 뱀파이어가 되었다. 먹을 수 있는 건 피와 커피 뿐. 그런데 짝사랑하는 애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더보기

한 잔의 피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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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따님은 뱀파이어가 확실합니다. 한 달 내로 발현이 이루어질 겁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난 멍하니 의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뱀파이어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았다. 엄마 역시 입을 떡하니 벌린 채였다. 그 정도로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뱀파이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뱀파이어’라 불리는 자들이 있다. 삼십년 전, 극심한 전염병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심한 열병과 복통에 시달렸으며, 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전염율이 높았고 치사율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많은 이들의 목숨이 빼앗겼다.

전염병의 발발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백신이 개발되었다. 절반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할 정도로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감염자들은 알고도 백신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링겔로만 영양분을 투여받는 삶을 더는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특이점이 발견되었는데, 이전에 먹던 대신 새로운 음식만을 섭취할 수 있단 것이었다. 그 음식은 바로 ‘피’였다. 포유동물의 혈액과 음료 몇 개만이 이들이 삼킬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피를 먹고 살아간다니, ‘흡혈귀’나 마찬가지 아닌가? 인간의 피도 먹을 수 있을 터인데, 이런 야만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많은 논란이 이어진 끝에 이들의 권리는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병에 걸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자식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힘이 없는 일반 사람들이 문제였다. 법적으로 권리가 보장되었음에도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간다. 여전히 수많은 차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아빠는 뱀파이어였다.

그 피를 이어받은 나 역시 뱀파이어가 될 것이다. 주요 발현기를 지난 상태였기에 안심했는데, 대체 왜? 왜 이제야? 의사선생님, 이건 뭔가요?

“나 어떡해, 엄마.”

“뭘 어떡해. 피 빨면서 살면 되지.”

나의 걱정에도 엄마는 과하게 쿨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곤 엄마가 만들어 준 초코라떼를 잔뜩 빨아들였다. 달달하면서도 깊은 초콜릿 맛이 입 안 가득 찼다.

“뭐가 문제야. 지금이랑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없긴, 나 왕따 되면 어떡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흡혈인을 배척하는 사회였다. 더욱이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다. 내가 흡혈인이라는 것을 알면, 친구들조차 나와 멀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먹던 음식들도 다 못 먹잖아.”

“커피는 마실 수 있어.”

“그딴 걸 왜 먹어? 난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이 또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흡혈인이 되면, 지금 입 안에 있는 초콜릿조차 삼키지 못한다. 맛이 쓰레기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이렇게 달콤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어떤 걸까.

“안녕하세요.”

종소리와 함께 울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괴로운 고민에서 깨웠다.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특별한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선?”

선이었다. 선은 우리 반 반장이자,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다. 공부도 손꼽히게 잘하고, 노래도, 운동도, 미술도 잘 한다. 선을 보고 있으면 가끔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정도로 선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좋았다. 말은 잘 걸지 못했지만.

“제이! 반가워. 여기서 일하는 거야?”

“뭐야, 아는 애야?”

그리고 옆에는 요한이 있었다.

“우리반 제이잖아.”

“아, 몰랐네.”

나는 요한이 정말 싫다. 조랑말처럼 생긴 주제에 키가 크고 운동을 좀 잘한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 더욱 짜증나는 점은, 선과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고 매우 친한 척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핸드드립 커피 따뜻하게 한 잔 줄래? 요한 넌 뭐 마실거야?”

“난 그냥 아이스티.”

둘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던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주문 목록을 읊으면서 물었다.

“엄마, 선이 자주 와?”

“선이 왔어? 단골인데 왜, 아는 애야?”

“아, 왜 자주 오는 거 말 안했어! 그럼 나도 맨날 왔지!”

“그러게 진작 와서 일 좀 돕지. 하랄 때는 안 하고.”

선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날렸다는 생각에 몸부림치자, 엄마는 익숙하다는 듯 날 무시하고 커피를 내렸다. 종이 위에 커피 가루를 쌓아두곤, 주전자에 있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나 이거 알아. 애드립? 그런 이름이었는데.”

“핸드 드립이겠지. 어휴, 방해하지 말고 다시 카운터나 보고 있어.”

다시 카운터로 쫓겨난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선과 요한이 친분이 있단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 둘이 놀러다니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설마 사귀고 있지는 않겠지?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한 일이었다.

“내가 싫어하던 걔, 사실 모기새끼였더라?”

“흡혈인 말이야?”

그러던 중 둘의 대화에나온 한 단어가 내 귀에 박혀, 훔쳐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그래서 존나 팼지. 벌레들은 자기들끼리 피 뜯어먹고 살지 왜 밖에 나오는 거야?”

“어휴, 왜 사람을 때리니.”

요한의 말을 듣는 순간 누가 내 머리에 오물을 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 가서 저 말을 하는 요한의 입에 쓰레기를 구겨넣고 싶었다.

사실 요한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요한은 흡혈인을 매우 혐오했고, 학교에서도 종종 그들을 욕했다. 중학교 때 학교에 있는 흡혈인을 괴롭혀 전학가게 만들었다는 일을 큰 소리로 떠벌리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을 때와 지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가 흡혈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욕설의 대상이 내가 되어버렸으니.

“아, 전화 왔네. 나 먼저 나가있는다.”

요한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때 음료가 다 만들었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음료 두 잔을 가져와 선을 불렀다.

“고마워. 근데 다른 것도 같이 살 수 있을까?”

“물론이지! 뭔데?”

“캔 아메리카노 열 개만 주라.”

“열 개?!”

우리 카페에서는 직접 내린 커피를 캔 용기에 담아서도 판매하고 있었다. 대부분 테이크아웃 음료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많이 만들지는 않는다. 끽해야 하루에 열 개 정도. 그런데 남은 음료 모두를 선이 쓸어가고 있었다.

캔을 주섬주섬 담고 계산했다. 선은 이 커피를 모두 마시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 나눠서? 무슨 쪽이든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나보다.

선에게 봉투를 건넸다. 바로 나갈 줄 알았던 선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 네가 사장님 딸인줄은 몰랐어.”

“어…그러게? 나도 몰랐어.”

“아하하, 그럼 또 보자.”

나는 잠시 이전 상황을 곱씹다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엄마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니. 선 앞에서 멍청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그렇지만 역시 선을 만날 수 있어,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수확이 있었으니, 선이 우리 카페 단골이며 커피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선은 커피를 좋아한다. 내가 커피를 잘 만들게 되어 선에게 주면, 맛있는 커피이니 물론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커피를 만든 나는? 물론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백퍼센트, 확실하다.

계산을 끝낸 나는 엄마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우겠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꼭 최고의 커피를 만들어내겠다고. 엄마의 표정은, 내가 흡혈인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그딴 거 왜 먹냐며? 사약 같다며? 커피를 먹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최고의 커피를 내려?”

“아냐, 이제 먹을 거야. 먹을 수 있어.”

그 날 나는 커피 세 잔을 마셨다. 엄마는 좋은 커피를 내리려면 맛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내게 다른 방식으로 내린 커피 세 잔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조금씩 홀짝대다, 결국 전부 마셔버리고 말았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엄마는 빈 잔을 보고 경악해, 내 등짝을 때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