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여자는 늦었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했다. 하루에 여덟 군데씩 요양 보호 서비스를 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게다가 이번 방문처의 노인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탓인지 그녀에게 꽤 집착하는 편이었다. 일을 마치고 갈라치면 노인은 그녀의 옷자락을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이 외로움에 못 견뎌 하는 순수한 행위였다면 여자도 좋게 타이르듯 떼어 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여자가 일하던 중 어쩌다 드러난 맨살을 그나마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슬며시 만지고는 배시시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노인의 성치 못한 몸과 홀로 사는 외로움을 감안하더라도 가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그러쥘 때면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 노인이지 실제 나이는 예순셋 밖에 안 되었다. 삼 년 전에 일찌감치 찾아온 뇌경색으로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고 오른쪽 다리도 심한 관절염으로 혼자서는 거동이 어려웠다. 그런데다 옆에서 돌보던 그의 아내도 일 년 전 갑작스럽게 발견된 암이 악화하여 두 달 전에 세상을 떴다.

노인에게도 두 명의 자녀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여자가 요양 보호 활동을 한 후 어디에 사는지 아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고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장성한 딸만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후 집의 대문 열쇠를 요양 보호사인 여자에게 건네주려 한 번 만났을 뿐 그 후로는 아버지를 보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는 어떻게 자식들이 병든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으나 요양 보호사라는 처지에 주어진 일만 하면 될 뿐 너무 깊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을 햇볕이 선명하게 내리쬐는 시골 길은 전날 저녁 무렵 내린 비로 여기저기 울퉁불퉁 패인 웅덩이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슨 흠집이 난 낡은 대문 앞에 다다른 여자는 열쇠를 꺼내 구멍에 꽂았다. 한데 문은 열쇠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스르르 열렸다. 순간 여자의 가슴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훑어 내려갔다. 전날 일을 마치고 이 집을 나설 때 분명히 자신이 잠가 놓은 대문이 왜 저절로 열리는지 의아했다.

노인이 어딜 가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는 남의 부축 없이는 다니기 힘들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안 좋았다.

여자는 조심스레 문을 밀어젖혔다. 늘 보던 널찍한 앞마당은 온통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묘한 광경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질퍽거렸을 흙 마당에 제법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은 지금은 굳어져 있었다.

남자의 운동화 자국으로 보였는데 이상한 것은 발자국의 형태로 보아 들어온 자국은 대문이 아니라 그 왼쪽 담벼락부터 시작된 점이었다. 그것은 발자국의 앞머리 방향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발자국은 담벼락으로부터 시작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대문 쪽으로 다시 나온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의아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그런 것에 신경을 쏟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불길한 마음을 억누른 채 노인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의문의 발자국은 마당에만 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올라가 거실로 면한 마룻바닥부터 노인의 방문 앞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또렷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노인의 방문은 약간의 틈을 보인 채 안쪽으로 조금 열려 있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하얀 전등 불빛이 방의 천장으로부터 흘러나와 방안은 어둡지 않았다. 여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또다시 불길한 기운을 느꼈으나 직업적 의무감 때문인지 본능에 따라 손을 뻗쳐 방문을 밀었다. 다음 순간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방안의 끔찍한 광경은 여자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누워있던 침대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벽과 바닥에 이르기까지 온통 붉은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얼핏 보면 누군가 일부러 노인의 몸 위에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방안 장롱 서랍들이 모두 밖으로 삐져나와 내용물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여자는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듯 자리를 박차고 대문을 향해 마당을 내달렸다. 얼마나 급하게 뛰었는지 하마터면 대문 앞에서 걸려 넘어질 뻔했다. 대문 밖 한길에는 마침 한 노인이 경운기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는 두 손을 휘저으며 그를 불러 세웠다. 노인은 처음에는 멈칫했으나 여자의 내지르는 절박한 외침을 듣고는 이내 그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