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잇는 향기

  • 장르: 일반, 로맨스 | 태그: #카페인 #갑질 #공밀레 #커피 #차 #연구원 #환경 #경제 #인연 #번아웃증후군
  • 평점×15 | 분량: 180매 | 성향:
  • 소개: 카페인이 필요한 여자와 환경을 사랑하는 남자의 티격태격 로맨스. 카페인과 갑질과 인연의 상관관계. * * * “왜 우리는 잠도 실컷 못 자고 그걸 이기려고 카페인을 마시면서... 더보기

인연을 잇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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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를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흠, 얘기가 좀 긴데……. 그래? 어려운 얘기도 있는데? 알았어. 그게, 너희가 태어나기 한 5년 전이었어. 엄마가 대학원 졸업하고 회사 들어가서 반년 좀 지났을 땐데, 엄마는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이었고 어떤 노땅, 아니 베테랑 연구원 밑에서 일하고 있었지. 베테랑? 뭔가를 엄청 오랫동안 해서 되게 잘 하는 사람, 그래그래, 전문가. 암튼 서로 소 닭 보듯 했는데 그날 갑자기…….

 
* * *
 

현대인의 아침을 여는 향기, 바로 커피 아니겠어? 음, 향긋하다, 향긋해. 초콜릿처럼 깊고 진한 아로마. 게다가 여름엔 역시 아이스아메리카노지. 아아, 자메이카 블루 산맥이 내려다보이는 푸른 하늘을 나는 것 같구나.

 

파티션에 들어서자 고지성 책임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닥에 남은 커피를 조르륵조르륵 해치우고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윤 선임.”

 

“네?”

 

“커피 엄청 좋아하나 봐요?”

 

“네. 왜요?”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다 그제야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커피는 좋아하는데 뒤처리는 맨날 왜 그럴까?”

 

그의 시선이 내 책상위에 흩어진 컵과 병을 향했다. 종이컵, 플라스틱 컵, 편의점 커피, 크기도 브랜드도 다양하다.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머리를 긁적였다.

 

“아, 하하, 죄송해요. 버리는 걸 깜빡했네.”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몽땅 집어넣자, 지성이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냥 그렇게 버리면 단가?”

 

“그럼 뭘 어떡해요? 청소 아주머니가 분리수거 해 주시잖아요.”

 

“분리수거만 잘 되면 내 알 바 아니다?”

 

“업체에서 재활용하겠죠.”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지성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걸로 윤 선임 책임은 다했다 이거네. 플라스틱 재활용률이 몇 퍼센튼지 알아요?”

 

이 인간이 왜 이래? 기분 좋게 출근했더니 아침부터 깽판을 놓네. 하긴 수질오염 어쩌고 하면서 빨래, 샤워, 머리 감기까지 비누만 쓰는 사람한테 뭘 바래. 어쨌든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나보다 여섯 살은 많은 직속 상사한테 더 따질 용기도 없었다. 연말 평가 시즌에 날 평가하게 될 사람이잖아? 그때, 발리로 휴가 갔던 신채은 책임이 루왁 커피를 돌리고 있었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윤 선임, 커피 좋아하죠? 이거 맛있더라고.”

 

“감사합니다.”

 

“고 책임은 커피 안 마시니까 패스. 괜찮죠?”

 

“저야 땡큐죠. 동물 학대 커피는 몇 억을 준대도 안 마실 거거든요.”

 

지성의 말에 채은이 “동물학대?”하고 반문했다.

 

“이건 고양이를 가둬놓고 커피만 먹여서 만든 루왁이 아니라,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농장에서,”

 

“정말 고양이를 위한다면 농장에 가둬놓지 말고 알아서 먹고 살게 풀어줘야죠. 솔직히 루왁이 그 돈 주고 먹을 만큼 맛있는 것도 아니고요.”

 

채은의 입이 벌어지다 그대로 멈췄다. 누가 리모콘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그녀는 품에 안긴 커피들을 잠시 내려다보다 조용히 다른 파티션으로 향했다. “잘 다녀오셨어요?”, “우와, 잘 먹을게요.”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채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린 루왁 커피를 어떡할까 망설이다 일단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왕 생산된 거 먹어줘야지, 그냥 버리면 사향고양이들이 고생한 게 아깝잖아? 다만 회사에선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여느 때처럼 여자연구원들의 티타임이 벌어졌다. 모두 채은이 돌린 루왁 커피를 내려 마시고, 난 엄마한테 갖다 드린다는 핑계로 인스턴트커피를 타 마셨다. 그날의 뒷담화 주인공은 고지성 책임이었다.

 

“……말하는 싸가지가……”

 

“그러려니 하세요. 원래 그런…… 뭘 바래……”

 

“지 혼자 다 아는 척…… 콧대만 높아서……”

 

“……맛만 좋구만…… 둔한 인간……”

 

사실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루왁이 무슨 맛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저 그거 한 모금만 먹어봐도 돼요?”

 

누가 한 잔 내려줘서 마셔봤다. 쓴 것 같기도 하고 시큼털털한 것 같기도 하고, 괜한 느낌인가, 좀 구린 것 같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밍밍했다. 원두를 재탕이나 삼탕으로 우린 맛? 아무튼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걸 파는 카페가 있다면 굳이 거기까지 가서 내 돈 주고 사 먹을 것 같진 않다는 거였다. 이게 얼만지 들으니 더 그랬다. 일반 루왁 커피도 꽤 비싸다고 하던데 이건 동물 복지 인증을 받은 농장에서 만든 거라 더 비싸다고 했다.

 

주말에 서울 집에 올라가 엄마한테 루왁 커피를 끓여 주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시켜봤다. 엄마는 몇 모금 마시고 인상을 찡그렸다.

 

“양말 빤 물 같은데, 엄만 좀 별로다.”

 

“그래? 그럼 버려야겠다. 루왁이래서 뭐 좀 다른 줄 알았더니, 그냥 그렇네.”

 

엄마의 표정이 돌변했다.

 

“루왁? 어쩐지 향이 참 특이하더라. 그게 얼마짜린데 버려. 놔둬, 엄마가 마실 테니까.”

 

나중에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대접하면서 얼마나 유명하고 비싼 건지 자랑을 하시겠지?

 

나는 커피전문점에서 텀블러를 하나 샀다. 안 그래도 매장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던 디자인이라 주저 없이 카드를 긁었다. 커피를 주문하며 텀블러를 내밀 때마다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걸 보면 고 책임도 아무 말 못 할 거다.

 

기대는 부서졌다.

 

“스테인리스 텀블러?”

 

“네. 튼튼하고 오래 가잖아요.”

 

“그거 만드는 데 에너지랑 자원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요? 씻을 때 들어가는 물이랑 세제는? 나중에 폐기처분할 때도 그렇고.”

 

“당장은 그렇지만 멀리 보면 이게 친환경적이잖아요.”

 

“맞는 말이긴 해요. 최소 천 번을 쓴다면.”

 

속으로 뜨끔했다. 천 번이면 하루 한 번 쓴다 칠 때 3년이 걸리니까. 내가 과연 이걸 3년이나 쓰게 될까? 신상품이 계속 쏟아질 텐데? 그때 지성이 지적했다.

 

“저번에 무슨 협력업체에서 계약 기념이라고 텀블러 돌리지 않았나? 그것까지 하면 2천 번은 써야 본전 뽑겠네요.”

 

아차,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때 받은 텀블러는 서랍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거다. 사실 집에 가면 그거 말고도 여기저기에서 얻은 텀블러가 두어 개 더 있다. 근데 걔네들은 안 예쁘다구. 어떤 건 업체 이름도 적혀 있는데, 실험실에서 아세톤을 가져와서 닦아보면 지워지려나, 아니면 위에 뭘 붙일까,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지성이 물었다.

 

“아침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네? 아아, 그거요. 뭐, 복원률이 꽤 괜찮게 나오긴 했는데…….”

 

지성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꽤 괜찮은 게 정확히 얼만데요? 윤 선임,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윤 선임은 이제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고 사회인이라고. 내가 뭘 물어보면 정확한 수치로 말해 달랬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컴퓨터를 뒤져 실험 결과 파일을 열었다. 지성이 옆에 와서 화면에 얼굴을 박고 중얼거리자 그가 늘 쓰는 비누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이 정도면 좋아지긴 했는데 스펙인(spec-in)은 안 되겠네. 내일 오는 개시제랑 합성팀에서 돌리는 바인더(binder)가 좀 괜찮으려나? 하아…… 빠듯하네요. 아무튼 수고했어요.”

 

우리 팀은 LCD에 들어가는 감광재를 개발하는데 고 책임, 이 선임, 민 선임, 나까지 네 사람이 맡은 프로젝트는 컬럼스페이서(column spacer)다. LCD는 두 개의 기판을 붙여 놓은 건데, 앞면은 빨강(R), 초록(G), 파랑(B)의 세 가지 색소를 코팅해 다양한 색상을 구현하는 컬러필터 기판이고, 뒷면은 각 RGB 화소의 빛의 밝기를 조절하는 TFT 기판이다. 컬럼스페이서는 두 기판 사이에 액정을 채울 공간(space)을 만들어주는 기둥이다. 따라서 압력을 버티는 힘이 좋아야 하고, 뭔가에 눌린 뒤에도 원래대로 돌아와야 하는데 아직 품질이 일본 J사 제품을 못 따라가고 있다.

 

그룹 계열사 중에 디스플레이를 제조하는 기업이 있어서 우리가 부품을 개발해 주면 양쪽 모두 이득일 거란 생각에 그룹 전체가 소재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몇 십 년에 걸쳐 쌓은 노하우를 몇 달 만에 이뤄내길 바라는 사람이 많아, 고 책임은 윗분들한테도 고객사에서도 이리저리 쪼이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날 저렇게 쪼아대는 건가.

 
*
 

평생 텀블러만 쓰겠다고 다짐한 걸로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내가 텀블러에 내린 커피를 홀짝대는 모습을 보며 지성이 혀를 찼다.

 

“하루에 커피 몇 잔이나 마셔요?”

 

“뭐어, 아침에 무조건 한 잔 먹고, 오후에 한 잔 더 할 때도 있고, 저녁에 일 있으면 마시기도 하고…….”

 

“그렇게 마시면 잠이 와요?”

 

“그럭저럭이요.”

 

사실 하루에 세 잔씩 마신 날은 잘 못 잘 때도 있다. 큰 문제는 아니다. 다음 날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피로감은 사라지니까. 잠은 원래 주말에 몰아서 자는 거 아닌가?

 

“커피 값만 한 달에 이십 만원은 쓰겠네.”

 

이젠 내가 돈 쓰는 것까지 간섭이야? 어이가 없다, 정말. 내가 커피를 이십만 원어치를 사 먹든 백만 원어치를 사 먹든 자기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환경오염 시킨다고 뭐라 하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이건 개인 기호의 문제잖아?

 

“전 이게 취미거든요. 이 정도 쓰는 게 뭐가 어때서요? 낚시 다니는 사람도 있고 뮤지컬 보러 다니는 사람도 있고 사진 찍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빚내서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또박또박 따지고 들자 지성이 피식 웃었다.

 

“커피가 왜 그렇게 싼지 알면 편하게 못 마실 텐데.”

 

“왜 그렇게 싼대요?”

 

“직접 알아 봐요.”

 

“싫은데요. 제가 왜요?”

 

“그럼 자아, 이건 주의를 끌기 위한 극단적 표현이에요. 윤 선임이 커피 마실 때마다 제3세계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아이들도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 둬요.”

 

이건 또 뭔 소리야? 기가 턱 막혔다. 내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아동을 학대하고’ 있다고? 뭐 하나 먹을 때마다 골치 아프게 그런 거까지 따져야겠냐? 하지만 ‘아동학대’라는 말에 내 손가락은 절로 키보드를 두드리게 됐다. 커피 산업에서 돈을 버는 사람을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아픈 역사 때문이었다. 식민 통치의 잔재이면서도 당장 버릴 수 없는 밥벌이 수단이라는 아이러니. 커피콩을 따는 노인들의 거친 손,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 아아, 어째야 할까.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카페가 회사 근처에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여기에서만 커피를 사 먹자. 회사에서 마실 것도 인터넷으로 샀다. 일반 커피보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 돈으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농가의 살림이 피면 좋은 거잖아? 이제 고 책임 앞에서 당당히 마실 거다. 이것 봐, 나 이렇게 사려 깊은 여자라구.

 

이틀 후, 새로운 개시제가 또 오고 내 커피도 왔다. 개시제를 바꾸자 스페이서 형태가 더 반듯해지면서 강도와 복원률이 좋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고객사에서 원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고 책임의 시름이 깊어지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합성팀에 들락거려야했다.

 

“바인더 아직 안 됐어요?”

 

“기다리세요. 다 되면 바로 갖다 드린다고 했잖아요.”

 

마음은 급하지만 할 일이 없다. 입사동기들을 탕비실로 불러 공정무역 커피를 내려줬다. 커피애호가라면 커피 산업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널리 알리고 공정무역 커피를 사 먹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데 지성이 물 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유일하게 마시는 액체인 물을 마시러 온 모양이었다. 그는 유리컵을 사용한다. 이것저것 따졌을 때 그게 제일 친환경적이라나.

 

“윤 선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으으, 도대체 뭘요?”

 

“공정무역이라는 게 정말로 공정한가.”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진짜,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아주 기본적이고 간단한 경제 원리, 수요와 공급. 공정무역을 해서 커피 값을 더 쳐 주면 어떻게 될까요?”

 

“농부들이 사는 게 나아지겠죠.”

 

“그렇겠죠? 그럼 주변에서 그걸 보고 ‘나도 커피 농사지을래’ 이러겠죠.”

 

“그럼 다 같이 잘 살게 되겠죠, 뭐.”

 

입에서 차츰 딱딱거리는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지성은 변함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생각해 봐요. 생산량이 늘어도 수요는 그대로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가격이 뚝 떨어지겠죠.”

 

동기 중에 누군가가 대답하며 끼어들었다. 그 녀석을 째려보는데, 고 책임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렇지! 그런데도 시세보다 값을 더 쳐 주기가 쉬울까요? 가격 차이가 더 커졌는데도?”

 

“그럼 정부에서 도와주겠죠. 우리도 농산물 가격 폭락하면 정부가 나서잖아요.”

 

“좋아요. 그건 그렇게 해결한다 쳐요. 실제로도 그렇게 한 적 있으니까. 커피를 비싼 값에 사서 시장에 안 풀고 다 갖다 버렸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고 뽀로통해졌다. 지성은 아랑곳 않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날 놀리는 것 같아 커피가 갑자기 쓰게 느껴졌다.

 

“문제는 커피 농사짓는 사람이 늘어나면 다른 농사짓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거예요. 감자나 옥수수 같은 거 말이죠. 그럼 모자라는 걸 수입해 와야 되는데, 현지 임금이 낮다보니 자급자족할 때보다 수입하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요.”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공정무역 하면서 돈을 더 벌게 되니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지성이 고개를 저었다.

 

“윤 선임이 공정무역 커피를 한 잔 사면, 한 500원 더 내나? 그럼 그 500원이 다 농부한테 갈까요?”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농가에 돌아가는 건 극히 일부고 나머지는 유통업체와 최종 판매자가 가져가는 거란다. 커피 농가는 여전히 가난하다고. 으아아, 말하자면 내가 ‘커피 생산지의 농업 경제를 교란시키고 대기업들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거였다. 이제 진짜 할 말이 없어졌다. K.O. 완패다.

 

지성이 탕비실을 나가자 동기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난 아니네. 네가 왜 맨날 욕하는지 알겠다.”

 

“완전 비교된다. 우리 박 책임님은 천사였어.”

 

그때, 한 녀석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며 키득거렸다.

 

“이야, 윤슬미, 섹텐 터지던데? 둘이 잘 해 봐.”

 

“미쳤어? 섹텐 같은 소리 하네. 지가 오만 데서 갑질 당하는데 풀 데가 없으니까 젤 만만한 나한테 저러는 거라고!”

 

“그래, 되게 재밌어 하는 거 같더라. 너도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찍소리도 못 할 텐데. 고 책임님 되게 유명하잖아. 연구소장님도 쩔쩔맨다던데?”

 

“아이고, 커피 맛 뚝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먹나.”

 

“공정무역 커피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 찾아보면,”

 

“한 두 개도 아닌데 어떻게? 아, 몰라, 몰라. 나 이제 커피 안 마셔!”

 
*
 

다음 주 금요일, 사업부와의 합동 업무 보고가 있었다. 사업부 사람들이 연구소까지 내려오고 우리 팀 사람들도 전부 회의에 참석했다. 사업부장은 꼰대의 전형이었다. 발표 내내 삐딱하게 기대앉아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적을 해대고 말꼬투리를 잡으며 이러쿵저러쿵 지시를 내렸다. 실상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사업부 사람들은 본인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팔아서 회사를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연구소는 놀고먹으면서 돈만 잡아먹는 한량 집단이었다. 그 돈과 우리의 피땀으로 자기들이 팔고 있는 제품이 개발됐다는 것도 모르나. 고지성 책임도 사업부장의 갑질을 피해가지 못 했다. 사업부장의 목소리는 마이크 없이도 대회의실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지금 디스플레이 쪽에서 불만이 많아. 스페이서 테스트하느라 양산 일정 틀어진 게 도대체 몇 번이냐고. 고 책임, 그게 그렇게 안 되나?”

 

“J사에서 특허로 다 막아놔서 저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진척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조금만? 그 조금이 얼만데? 정확한 날짜를 말해 봐.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있잖아? 감광재 국산화는 회장님 주관심사라고. 내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연구원들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품의만 띡 올리면 재료비다 출장비다 군말 없이 나오니까 돈 버는 게 쉬워 보이지? 그러니 칼퇴하고 주말 내내 노는 거 아냐!”

 

사업부장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지금까지 쌓인 한을 모두 풀어볼 작정인 것 같았다.

 

“사업부는 24시간 공장가동하고 주말에도 대기상태인 거, 알아, 몰라? 연구소에서 개발 잘못해서 불량 터지면 우리가 뒤집어쓰는 거, 봤어, 못 봤어? 인간들이 양심이 있어야지! 동료가 고생하는 거 보면서 놀고 싶어? 우리처럼 일했으면 진즉에 스펙인 됐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불쾌합니다, 상무님.”

 

얼음물을 끼얹은 듯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업부장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아 두 눈을 부릅떴다.

 

“불쾌? 불쾌라고!”

 

사업부장 뒤에 앉은 사람들이 양 팔로 X자를 만들어 보이고 머리를 흔들며 무언의 압박을 보냈지만 지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업부와 연구소는 일이 돌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연구라는 게 공장 돌리듯이 인풋한다고 아웃풋하는 게 아니란 말씀이죠. 저희라고 야근이며 주말 근무 안 하는 줄 아세요? 칼퇴하는 건 일정이 여유로울 때죠. 요즘 저희, 집에서는 잠만 자고 하루 종일 회사 나와서 일만 하고 있습니다. 가끔 일이 빌 때도 있죠. 재료가 아직 안 왔거나, 클린룸 쓰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그 동안 저희들 노는 거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계속 연구하고 특허 찾아보면서 고민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걸 다 노는 거라 보시니 어이가 없네요. 실험실에 틀어박혀 재료만 들입다 섞는다고 연구가 되는 게,”

 

“야, 이, 이……!”

 

입을 앙다물고 가슴을 들썩이며 씩씩대던 사업부장이 벌떡 일어나자 연구소장과 팀장이 달려가 달랬다.

 

“그냥 무시하세요. 고 책임이 원래 바른 소리, 아니 버릇없는 거 아시잖아요.”

 

“요즘 디스플레이에서 자꾸 쪼여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봅니다. 진정하십시오.”

 

사업부장이 다시 앉아 지성을 향해 삿대질했다.

 

“저거, 저거! 저렇게 막돼먹어갖고 뭔 고객 대응을 한다고! 안 봐도 비디오다, 디스플레이 가서 뭔 개소리를 할지! 고 책임!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내 똑똑히 두고 볼 거야!”

 

업무 보고는 어수선하게 끝나고, 다 함께 회식을 하러 삼겹살집을 향했다. 널따란 방에 여러 줄로 늘어선 테이블 위에 음식과 수저가 세팅돼 있고, 상마다 소주와 맥주가 몇 병씩 놓여 있었다. 파트 별로 삼삼오오 모여 앉자 고소하고 기름진 고기 냄새가 사방에 피어올랐다.

 

나를 비롯한 파트원들은 사업부장과 지성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보느라 대화도 많이 나누지 못 했다. 언제 사업부장이 쫓아와 아수라장을 만들지 불안하기만 했다. 지성도 더 이상의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 생각했는지 밥과 된장찌개만 묵묵히 퍼 먹고 있었다. 동물복지와 지구온난화 운운하며 고기도 잘 안 먹는 남자다. 술도 아예 마시지 않아, 우리 파트는 저녁 회식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저쪽 테이블에서는 사업부장이 벌겋게 취해서 부어라 마셔라 떠들고 있었다. 연구소장과 팀장이 찰떡처럼 들러붙어 아양을 떨어대니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사업부장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커다란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 사랑하는 우리 연구원들 힘내라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으니 많이들 드시고! 연구 열심히 해서! 우리 N화학을 세계 최고의 화학회사로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업부도! 발바닥에 땀나게 영업하고 생산해서! 연구소 팍팍! 뒷받침해 드리겠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엔 콜라보가 중요하다잖습니까? 자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쏘오맥 한 잔씩 말아봅시다! 끄윽, 자고로 뭘 하든 요 궁합이 잘 맞아야 돼. 그래야 애가 쑴풍! 쑴풍! 나오지, 안 그래?”

 

사업부장은 궁합 운운할 때는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쿵쿵 쳐대고 쑴풍쑴풍 할 때는 가랑이 밑에 양손을 모아 경박스럽게 흔들어댔다. 하나도 안 웃긴데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 동안 소맥이 빠르게 제조되고, 모두들 잔을 들어올렸다.

 

“감광재를 위하여!”

 

“위하여!”

 

“N화학을 위하여어어!”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세상에나, 사업부 회식은 확실히 다르구나. 단 한 명의 이탈도 없는 우렁찬 함성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럴 땐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원샷이다. 벌컥벌컥, 크으, 잔을 내려놓는데 물 잔을 대충 들고 있던 지성이 한 모금 들이켜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런데 하필 그걸 사업부장이 보고는 연구소장과 팀장을 양 옆에 끼고 이쪽으로 건너왔다. 눈동자에 초점이 풀리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고지성 책임, 내 아깐 미안했다. 우리 소속은 달라도 한 회사 식구잖아. 싸우지 말고 협력 잘 해 보자고.”

 

“죄송합니다. 제가 버릇이 없었습니다.”

 

“아니야, 자, 한 잔 따라 봐.”

 

사업부장이 빈 맥주잔을 내밀었다. 지성이 맥주병을 집어 들자 사업부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다, 나는 우리 스페이서 파트의 꽃, 이름이 뭐였지? 윤…….”

 

“윤슬미입니다.”

 

“그래, 윤슬미 선임한테 한 잔 받고 싶은데. 거, 가까이서 보니 엄청 미인이네. 술은 미인이 따라줘야 더 맛있는 법이잖아, 안 그래?”

 

뭬야? 슈발,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황이 나한테도 닥치는구나. 미인이라는 소리도 하나도 안 고맙다. 내가 왜 당신 따위한테 외모 품평을 받아야 되는데? 황당했지만 누구처럼 권력자 앞에서 입바른 소리할 용기는 없었다.

 

“……네에, 뭐어, 그럼…….”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며 맥주병을 집어 들자 지성이 술병을 빼앗아갔다.

 

“상무님, 제가 또 주제넘게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방금 하신 말씀은 요즘 같은 시대에 조금 위험한 말씀입니다.”

 

“엥? 그래? 왜?”

 

“얼마 전에 전사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있었잖습니까.”

 

“아아, 하하하. 그렇지. 맞아, 맞아. 나도 저번 주에 교육 받았어. 그 뭐야,”

 

사업부장이 한 손에 턱을 괴고는 이마까지 찌푸리며 뭔가에 골몰하다 두 눈을 활짝 떴다.

 

“아 그래! 윤슬미 선임, 내가 아까 성적 수치심을 일으켰나?”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지금! 하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만 살짝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부장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지성이 먼저 말했다.

 

“상무님, 사죄의 의미로 소맥 한 잔 말아드리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쌓아온 포뮬레이션 실력으로 맛있게 말아보겠습니다.”

 

“허허, 그거 좋지. 그나저나 고 책임 실력이면 믿어도 되는 거야?”

 

“제가 감광재는 말아먹어도 소맥 제조는 잘 하거든요. 한 번 믿어보십시오.”

 

지성이 사업부장의 맥주잔에 맥주와 소주를 차례로 따랐다. 사업부장이 세 모금 만에 들이켜고 캬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야, 비율 죽이네. 포뮬레이션은 이렇게 잘 하는데 스펙인은 왜 못 해, 엉? 자, 이제 한 잔 받아.”

 

사업부장이 제 침이 범벅된 잔을 지성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저는 술이 약해서 요 소주잔에 조금만 받겠습니다.”

 

“어허, 사람이 왜 이래, 어른이 술 줄 땐 고맙게 받는 거야. 자!”

 

사업부장이 지성의 손에 맥주잔을 욱여넣더니 양손에 소주병과 맥주병을 하나씩 들었다.

 

“나도 옛날에 연구소에 있었던 거 알지? 내가 그때 실력을 한 번 발휘해 보겠어.”

 

그가 잔에 두 병을 동시에 갖다 대고 콸콸 붓자 금세 술이 차오르더니 곧바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지성의 바짓가랑이가 오줌싸개 어린이처럼 젖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 하하, 우리 상무님. 사랑이 너무 넘치시네.”

 

연구소장과 팀장이 사업부장의 팔을 붙들고 병을 빼앗아 내려놨다. 지성이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사업부장이 말했다.

 

“뭐 해, 얼른 안 들고. 시원하게 화해하자고. 이런 게 남자들 싸움이지. 여자들처럼 꽁 해갖고 큰 일 하겠어?”

 

그가 문득 무릎을 탁 쳤다.

 

“아이구 이런! 또 위험할 뻔 했다, 그치?”

 

사업부장이 히죽대며 돌아봤다. 그딴 개소리에 내 물개박수를 바라는 거냐.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니, 사업부장이 나보고도 한 잔 받으라며 술병을 내밀었다.

 

“남녀평등 시대면 여자들도 빼지 말고 마셔야지, 안 그래?”

 

그때, 지성이 술을 모두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상무님, 한 잔 더 말아드릴까요?”

 

“어? 어어, 그래. 야아, 이 친구 술 잘 하네. 못 한다고 맨날 빼더니만 순 사기였잖아?”

 

사업부장이 싱글벙글 술을 받아 죽 들이켜고 잔을 다시 지성에게 내밀었다.

 

“고 책임도 한 잔 더 해. 하나만 주면 정이 없다잖아.”

 

“죄송하지만, 이미 주량을 넘어서요. 간에 문제가 있어서 더 이상은,”

 

“이 친구가! 여기 간 멀쩡한 사람이 어딨다고! 한 잔 정도 더 하는 건 괜찮아. 자, 받아!”

 

“아닙니다, 상무님. 저 이러다가 정말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성의 얼굴이 그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은 체질이라 술을 안 마신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내가 나섰다.

 

“저어기, 상무님?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맥주잔을 공손히 내밀자 사업부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지금 뭐 하냐는 짓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지성이 쏘아봤다. 내가 사업부장의 칭찬을 들으며 원샷하는 사이에도 지성의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사업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자 그가 잔을 비우고 지성에게 내밀었다. 아까 그가 한 말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사양하자 실랑이가 계속 오가고 사업부장이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거 참, 술맛 떨어지게! 상사 말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란 거, 알아, 몰라! 이렇게 지맘대로니 스펙인 못 하는 거 아냐!”

 

지성이 눈썹을 움찔했다. 비상사태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연구소장과 팀장이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업무의 연장이라, 좋은 말씀이네요. 상무님, 연구원도 노동자입니다. 노동조합에는 가입 안 했지만 저는 노동자로서 법과 사칙에서 보장된 노동권을 갖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부당한 업무 지시를 거부할 권리가 있고요.”

 

“뭐야? 야, 이, 이, 아까부터 누구 앞이라고 막 나불대!”

 

술잔이 날아가 깨지고 사업부장이 지성의 멱살을 향해 손을 뻗자 옆에서 우르르 달려들었다. 사업부 사람들이 사업부장의 팔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아이고, 상무님, 그만하세요.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내일 새벽에 건강검진 있으시잖아요. 이제 그만 드시는 게 어떨까요, 네?”

 

“이러다 간수치 높게 나와서 재검 받으시겠어요. 사모님이 전화하셨습니다. 오늘 일찍 주무셔야 되는데 왜 안 오시냐고요.”

 

“집사람이?”

 

사업부장이 딸꾹질을 하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의사 놈들 아주 돌팔이 새끼들이야. 평소대로 검사해야 몸 상태를 제대로 알 거 아냐, 안 그래?”

 

“그래도 상무님, 평소보다 쬐끔 더 드신 것 같은데요.”

 

사업부 사람들이 사업부장의 시야를 가리려는 듯 몇 겹으로 둘러싸고 나갔다. 방의 반이 텅 비어 버리고, 남은 사람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연구소장과 팀장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성한테 호통이라도 치면 어쩌나 하는 내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은 기가 질린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연구소장이 이만 파하자며 먼저 일어서자 연구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 팀원들이 한 잔 더 한다며 근처 호프집으로 향하고, 나는 지성과 함께 회사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나도 선배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횡단보도 옆에 홀로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이 외로워보였다.

 

“완전 엉망이네요. 회사가 이런 줄 알았으면 그냥 박사나 할 걸.”

 

“그쪽은 뭐 다른 줄 알아요? 교수들 갑질도 만만찮아요. 오죽하면 괴수라 부를까?”

 

나도 인정한다. 내 지도교수는 괴수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정한 모습만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 중에는 괴수 밑에서 온갖 삽질을 하는 애들이 많았다. 이런 게 사회구나 싶었는데 취직해보니 교수들은 양반이었다. 몇 번 더 겪으면 무뎌지려나. 나도 점점 변하겠지. 부조리는 그렇게 조금씩 삭아서 우리의 일부가 될 테고. 그런데 그 흐름에서 한 발 비껴선 사람이 옆에 있었다.

 

“성질 좀 죽이세요. 오늘도 두 번이나…….”

 

“부당한 걸 참고 견디면 세상이 바뀌나요?”

 

“그러다 잘리시면…….”

 

“이런 일로 안 잘리니 본인 걱정이나 해요. 그나저나 내가 잘리면 윤 선임이 제일 좋아할 것 같은데?”

 

지성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안 하네? 아깐 고마웠어요. 그래도 담부턴 그러지 말아요.”

 

“왜요? 고 책임님도 저 구해주셨잖아요.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지성이 피식하고 조용해졌다. 그때,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 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피나 한 잔 하실래요?”

 

“이 시간에?”

 

“이제 주말이잖아요.”

 

“미안. 난 카페인 분해 효소도 얼마 없어서요. 윤 선임도 밤새지 말고 잠이나 푹 자요. 월요일에 후회하지 말고.”

 

그는 자기가 머무르는 기숙사 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고, 저 답답한 남자. 커피를 사전적인 의미로만 아는구나.

 
*
 

주말이 지나고, 평소와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나는 지성에게 매일 구박을 들었고, 동기들을 만나면 그의 욕을 해댔고, 이 선임, 민 선임과 함께 온갖 조성으로 시료를 만들어 클린룸(clean room)을 들락거렸다.

 

클린룸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기판을 만들기 위해 미세 먼지를 제거한 작업실이다. 따라서 기압이 높은 데다, 들어가려면 헤어캡, 고글, 방진마스크, 방진복, 방진화를 겹겹이 착용해야 한다. 안에서 몇 시간을 작업하다 나오면 온몸이 압력솥에 푹푹 찐 가지처럼 늘어져 난 또 커피를 들이켜며 피로를 달래야했다.

 

지성은 N디스플레이 공장으로 출장을 다녔다. 거기에서는 우리 일이 어떻게 돼 가는지 자주 보고 받기를 바랐다. 그런 식으로 쪼아대면 결과가 잘 나올 거라 생각했는지 이메일이 아닌 대면 보고를 요구해, 지성은 사나흘이 멀다 하고 차를 몰아 대전과 파주를 왕복해야 했다. 그들은 그걸 협업이라 불렀다.

 

나는 지성 때문에 커피에 학을 뗀 상태였지만 내 돈 주고 산 커피를 버릴 수 없어 매일 조금씩 내려먹었다. 마침내 커피가 다 떨어지자 다른 걸 마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과 만천하에 다짐해 놓고 커피를 다시 마신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단 카페인이 들어있어야 한다. 카페인에 중독된 나는 아침 커피를 건너뛰면 오후에 심하게 졸리고 두통이 오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벌들은 카페인이 든 꽃꿀을 더 좋아하고 심지어 집착하기까지 한단다. 덕분에 꽃들은 당분이 적게 든 꿀을 제공하고도 벌을 더 많이 꾈 수 있다. 벌은 꿀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도 모르고 그 꽃들의 꿀만 찾으며 꽃가루를 열심히 옮겨주는 것이다. 이건 꽃들이 벌들을 착취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었다. 회사 곳곳에 설치된 커피 머신들을 보면 그 연구가 떠오르고 내가 그 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게 카페인이었다.

 

보이차는 가짜가 많다는 말에 주문하기 꺼려졌고, 홍차를 주문하자니 그것도 제3세계 노동력 착취와 아동학대와 관련해서 말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회사의 홍차 브랜드를 알게 됐다. 스리랑카 사람이 다국적 기업의 마수를 벗어나 자국민에게 이익을 돌려주려고 만든 회사라고 했다. 그들은 공정무역도 거부하고 있었다. 어차피 최종판매자인 선진국의 입김이 작용하는 데다 그쪽에서 시혜나 선심을 베풀 듯 제공하는 해결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창업주는 주체성과 자립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곧바로 홍차를 주문했다.

 

동기들과의 티타임에서 나는 힘차게 선언했다.

 

“이제 그 자식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어!”

 

주먹을 쥐고 흥분하는데 동기들이 뜨악해하는 얼굴로 내 뒤만 바라봤다. 얼른 뒤돌아보니 지성이 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자식이라…… N디스플레이 김 과장 말하는 거죠?”

 

그가 매정하게 말하고 총총 사라졌다. 이런, 젠장맞을!

 

홍차는 처음 마셔봤지만 특유의 풀 내음과 숙성된 향이 매력적이었다. 한 모금씩 삼킬 때마다 나는 셜록 홈즈와 함께 베이커 가를 거닐고 해리 포터와 함께 호그와츠를 날아다녔다. 게다가 블렌딩 종류도 많아서 기분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었다. 과일향이 첨가된 것은 오후의 권태를 상큼하게 날려줬고, 꽃향기가 첨가된 것은 머릿속이 혼란할 때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여유를 안겨줬다.

 

내친 김에 홍차에 어울리는 예쁜 잔도 주문했다. 커피는 머그잔에 마셔야 제 맛이지만 홍차는 찻잔에 마셔야 제 맛이니까. 찻잔 브랜드도 무궁무진해서 몇 번이나 카드를 긁으려는 걸 참아야 했다. 이미 텀블러 때문에 한소리 들었는데 찻잔이 매일 바뀌는 걸 보면 지성이 뭐라고 할까? 윤 선임, 도자기는 재활용 안 되는 거 알아요? 최소 몇 백번은 써야 본전 뽑을 텐데. 저런 소리 듣기 싫어 찻잔은 숨겨놨다가 그가 출장 갔을 때만 꺼내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가 밤이 깊어져서야 출장에서 돌아왔다. 팍팍 깨지고 왔는지 그새 몇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 아빠가 저러고 앉아 계실 때 내가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 참 좋아하셨었는데……. 내가 고 책임 어깨를 주물러 주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겠지?

 

다행히 난 좋은 소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N디스플레이 엔지니어들한테서 별별 쓴소리를 듣는 동안, 내가 만든 조성 중에서 스펙에 드는 게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데이터를 보여주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이 정도면 샘플 제출해도 되겠는데요? 윤 선임, 정말 수고 많았어요.”

 

고객사가 요구하는 스펙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무슨 실험을 더 할지 얘기를 나누고 일어서는데 지성이 내 책상을 힐끗했다. 아차, 찻잔 치우는 걸 깜빡했다.

 

“이제 홍차로 갈아탔나 봐요?”

 

“네…… 왜요?”

 

지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뭔데요? 안 어울리게 왜 간을 보세요? 그냥 지르시라고요.”

 

“아니, 윤 선임이 홍차 산업의 역사에 대해 아나 해서.”

 

“하! 당연히 알죠. 이번엔 다 조사하고 고른 거니까 뭐라 하지 마세요.”

 

내가 주문한 홍차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자 지성이 다 듣고 말했다.

 

“오케이, 좋아요. 다 좋은데, 탄소 배출 문제는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차는 나무에서 나는 거고,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하는 거 아니었어?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지성이 말했다.

 

“그거, 수입하는 거잖아요? 배에 실어서 인도양 태평양 거쳐 오는데, 그 동안 배가 연료 소모하면서 이산화탄소 뿜어대는 거 아나 모르겠네요.”

 

가지가지한다, 정말. 내가 그까짓 차 한 잔 마시는 것 갖고 왜 이런 타박까지 들어야 되냐!

 

“그럼 뭐, 국제 거래를 다 막자 이 말씀이세요?”

 

내가 발끈하자 지성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배출을 줄일 수 있으면 좋잖아요?”

 

“아오 진짜, 그거 얼마나 된다고! 어차피 저 아니어도 수입은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환경을 생각하시는 분이 왜 이런 일을 하세요? 환경 운동을 하시든가, 농사나 지으시지.”

 

내가 구시렁대자 지성이 피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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