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피, 새벽의 눈물 – 上

  • 장르: 판타지
  • 분량: 157매
  • 소개: 신(新) 아라짓 왕국, 대호왕 6년, 최후의 대장간으로 찾아가 바라기의 칼집 제작을 의뢰하는 사모 페이의 이야기 더보기

황혼의 피, 새벽의 눈물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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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선이 설정되기 전까지 이어진 나가와의 전쟁은 무수한 병장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대형 공성 병기부터 시작해 암살에 특화된 작고 치명적인 날붙이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무기의 대부분이 최근 800여 년간이 아닌 옛 전란의 시대에 확립되었다.
무기의 역사는 더 이상 살상이 일상이 아닌 시대에 이르러 발전을 멈추고 수백 년 전에 정체되어 있다. 사람을 해하는 도구를 무엇하러 발전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적은 접어두기를 바란다. 우리는 종전의 시대가 아닌 휴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중략)

수많은 무기 중에서도 검은 표준 무기로 손꼽힌다. 형태에 따라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며, 무인이 아니라도 가축을 도살하거나 과실의 껍질을 벗길 때조차 칼을 사용한다. 검은 다른 무기와 달리 고유의 ‘집’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검을 제외하고 창도 활도 도끼도 정형화된 보관용 덮개가 없다. 필요나 기호에 따라 제작되기도 하지만 검만큼 필수적이지는 않다. 유독 검에 집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것이 베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베는 것은 찌르는 것만큼 치명적이지 않다. 필연적으로 다른 무기보다 날이 더 날카로워야 한다. 예리해야 하는 만큼 소지자에게 위험할 수 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도 집이 필수적이다.
날을 보호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 칼과 칼집의 관계는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민속학적 관점에서 검과 집의 결합은 부부의 연을 상징하며 영원의 언약을 뜻한다. 그래서 검사는 칼을 아끼는 것 이상으로 칼집 또한 소중히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기인 바라기의 칼집에 대해 의문은 깊어진다. 영웅왕은 한쪽 팔을 잃고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를 하나의 고동에 붙여 만든 쌍신검을 종신토록 휘둘렀다. 그때부터 영웅왕은 칼집 없이 바라기를 들고 다녔다. 이는 칼을 칼집에 넣어둘 틈도 없이 노구를 이끌고 쉼 없이 전장을 누볐다는 증거일 테지만, 대체 칼집은 어디로 갔을까?
바라기는 극연왕 대에 사라진 것으로 전하지만, 영웅왕 시절 이미 유실되었던 칼집의 행방을 어찌하여 아무도 좇지 않았는지 필자는 궁금할 따름이다. 칼집의 중대함을 아는 자로서 바라기의 실종에만 집중하고 그 반려인 칼집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던 지난 역사를 애석히 생각한다.

– 헤스토스 파이 <무기대논고> 중 발췌

빙원의 추위는 비늘을 세웠다. 마지막 언덕을 넘자 이보다 더 추울 수 없으리라는 예상은 무참히 박살났다.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을 때도 시련이 되는 추위였다. 눈발 섞인 강풍을 동반한 날씨는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방문객에게 썩 꺼지라며 사정없이 소금을 뿌려대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 해까지 저물어 최후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여정은 걷잡을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사모는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이 추위를 온전히 느끼고 있느니 차라리 냉동 가사 상태에 빠져 짐짝마냥 배달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째 하는지 몰랐다.

조금이라도 추위에서 달아나기 위해 티나한의 등에 파묻다시피 숨기고 있던 얼굴을 겨우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모를 걱정스럽게 주시하고 있던 것인지 비형이 나늬를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와 티나한의 옆에 섰다.

하늘에서 흩날리는 굵은 눈발은 새하얀 살점이었다. 그 살점이 영원한 겨울의 대지를 덮고 하얀 피를 흘리며 설원을 조성했다. 비늘이 떨어져 나갈 것 만치 공포스러운 추위는 그렇잖아도 사모의 의식을 가득 채운 누군가를 더 가열히 떠오르게 했다. 무섭도록 차갑고 날이 선 피가 흐르는 길, 이 혹독한 대지를 걷는 일은 레콘이 아니더라도 숙원을 가진 자라면 응당 치러야 할 고행일 것이다. 각오를 재편하며 사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호친에서 출발해 평균 열흘 정도 소요되는 일정은 보름에 걸쳐 늘어지고 있었다. 강철 같은 레콘의 체력은 티나한을 지치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몇날며칠 똑같이 새하얀 풍경이 펼쳐지는 데 염증을 느꼈다. 무엇보다 극연왕이 만든 도로가 현대 레콘의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얼음의 원재료인 ‘그것’에 대한 공포심은 아라짓 4대 왕의 경이를 가뿐히 무시했다. 발밑으로 특정 액체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뛸 수도 없어 티나한은 짜증스러웠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도깨비 비형에게도 추위는 고난이 되지 않았다. 굳이 문제 삼을 것이 있다면 바람의 영향이 불가피한 비행체 나늬였다. 조금이라도 풍속이 세다 싶으면 안전 비행을 핑계로 비형은 이동을 중단했다. 티나한이 산사태가 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꽝꽝 얼어붙은 설산 한 귀퉁이를 주먹으로 후벼 파서 얼음집을 만들면 그 속에서 쉬었다 가기를 반복했다. 행여 사모가 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러는 것이었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이런 환경에서도 죽음과 거리가 멀다. 삶과 죽음을 견주었을 때 삶이야말로 결단코 고통으로 분류해야 할 만큼 괴로울 뿐이지. 지금 사모에게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약한 바람조차 살인적이었다.

티나한과 비형은 힘들어하는 사모를 지켜보며 별수 없이 사라진 길잡이를 떠올렸다. 나가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내. 고된 여정 속에서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일행을 위해 길을 닦았던 그는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왕의 고통을 덜어 주었을 것이다.

대호왕 사모 페이와 길잡이를 잃은 옛 수탐자 두 사람은 최후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에 서 있었다. 목적지가 비로소 지척에 다가온 덕분에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강행돌파를 선택했다. 사모의 육체는 주인에게 작작 좀 하라며 결사반대를 하고 있지만 영혼은 1초라도 빨리 가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영이 육을 이긴 결과 험궂은 날씨를 뚫고 서둘러 이 강행군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사모는 결심을 굳혔다.

처음에 비형은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티나한은 표정이 밝아지려다 헛기침을 하며 짐짓 점잖게 반대했다. 결론적으로 한시 바삐 제대로 된 곳에서 추위를 피하는 편이 낫다고 합의를 보았다. 과연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이 나가에게 얼마나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둘 다, 괜찮아?”

사모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의지와 달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티나한과 비형에게 물었다. 지독히 아름다운 목소리는 극한의 상황과 맞물려 가련함을 부추겼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폐하가 걱정이지요. 어디 편찮은 데는 없으십니까?”
“그러게 말야. 누구한테 할 소리를. 왕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고.”
“괜찮아. 도깨비불이 있으니까. 흑사자 모피도.”
“그렇다고 해도 유쾌한 날씨는 아니잖아.”

이 절체절명의 혹한을 기껏해야 유쾌하지 않은 날씨 취급하는 레콘에게 사모는 새삼 위대함을 느꼈다. 물론 그녀가 업힌 등을 뒤덮은, 평소보다 다섯 배는 부풀어 오른 깃털은 티나한이 강추위를 어렵지 않게 견디는 까닭을 즉각 납득하게 해 주었다.

문득 같이 따라가겠다고 그르렁거리며 떼쓰는 것을 어렵사리 떼어놓고 온 마루나래가 떠올랐다. 그곳이 어디든 사모가 가는 곳이면 따르려는 대호와 두억시니 금군은 일부러 하늘누리에 두고 왔다. 이 혹독한 추위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거니와 사모가 왕이 아니었던 시절부터 그녀를 열렬히 왕으로 추대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과 잠시나마 거리를 두고 싶었던 심정도 있었다. 티나한도 비형도 이제 사모를 이름보다 왕의 존칭으로 부르는 데 익숙할지언정.

“티나한의 등도 무척이나 아늑한걸.”
“아무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모셨던 몸이라고!”
“두말하면 잔소리죠. 티나한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동식 요람이에요! 탑승감은 어떠십니까, 폐하? 마루나래의 털만큼 둥실둥실한지요?”
“그래. 꼭 갓난아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너, 너희, 너희들! ……쯧. 지금이니까 봐준다.”

한때 살아있는 제단으로 운신했던 과거를 크나큰 자부심으로 여기는 레콘 전사에게 비형과 사모는 보모의 미덕을 논했다. 더 푹신하게 해주고 싶은 것인지 티나한이 깃털을 부풀렸다. 사모를 홱 돌아본 그는 부리를 딱 소리내어 부딪치더니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기운이 있다면 박장대소했을 텐데 사모는 힘없는 미소만 간신히 입가에 끌어올렸다. 제 꼴을 자업자득이라 자조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중얼거렸다.

“……미안해.”
“우리 사이에 무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두 사람의 즉답에 사모는 다 죽은 힘을 짜내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북부의 왕이 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구출대와는 줄곧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살벌한 동거의 나날이 지금보다 즐거웠다. 이제 사모의 곁에 없는 두 사람이 그 때는 있었다. 지금 사모를 지탱해 주는 두 사람 역시 사모가 느끼는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비형과 티나한 외에는 이 여행길에 함께할 수 없는 이유였다.

사모가 인원을 꾸리기도 전에 라수가 앞서 이 무도한 최후의 대장간행에서 왕을 모실 자로 티나한과 비형을 지목했을 때는 자못 놀랐다. 표면적으로는 잠행이기 때문에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여차하면 암살자로부터 누구보다 강력하게 왕을 비호할 수 있는 무력을 지녔으며, 그 모든 것에 우선해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을 배신하지 않을 자라는 점을 내세운 인선이라고 라수는 설명했다. 그녀의 사도가 왕의 마음까지 보필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최후의 대장간이 신성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시원해도 죽는 나가에게 이 길을 걷게 하다니. 하늘치가 추위를 싫어하는 거면 또 몰라, 여기 오는 길에 본 하늘치만 해도 다섯이야. 하늘누리라고 다를 리 없잖아? 라호친까지는 멀쩡히 타고 왔으면서 왜 그 너머는 안 된다는 거야? 최후의 대장장이님은 무슨 생각인지, 원.”
“아서, 티나한. 나를 만나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거 왕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최후의 대장장이는 아니더라도 그 뭐냐, 하인샤 대사원으로 치면 오레놀쯤 되는 다른 대장장이를 불러서 분부를 받잡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최연소 대덕과 이런 식으로 맞먹는 것을 레콘의 오만함이라 해야 할지 무례함이라 해야 할지 사모는 혼란스러웠다. 능력과 별개로 권위와는 거리가 먼 오레놀의 성품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대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하는 얘기야?”
“그러엄! 그 녀석은 하늘치 유적 탐사에 지대한 공을 세운 녀석이지.”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지.”

사모는 피식 웃었다. 레콘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그중에서 티나한은 대호왕을 왕이 아닌 사모 페이에 가깝게 대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폐하’가 아니라 ‘어이, 왕!’으로 부르고도 다른 신하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건국 공신으로 떠받들어지는 현실도 있겠지만 그의 본질이 오레놀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 그럼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 볼까?”
“아, 폐하. 조금 힘드셔도 대장간 입구에서는 어부바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티나한의 명예를 지켜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나. 내가 애먼 레콘 총각을 애 아빠로 오인하게 할 테니.”
“이것들이 진짜! 아우, 그 버릇없는 멍멍이들이 너를 태우기만 했어도.”
“……가자.”

사모가 등 깃털을 살짝 잡아당기며 신호했다. 티나한은 걷는 것과 뛰는 것의 중간쯤 되는 구보로 최후의 대장간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비형도 나늬에 올라 선발대처럼 앞장섰다. 비형은 먼저 대장간에 도착해 기어이 안에 있는 모든 레콘을 불러 모아 성대하게 왕을 맞이하게 할 것이다. 대호왕의 환영회를 겸해 티나한의 행색을 놀리려는 의도를 잔뜩 함축하여.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