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가면

왕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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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들과의 전투는 후덥지근한 열기와 함께 찾아왔다.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나가들은 북부의 인간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운 기온을 만들었다. 동시에 물리적으로는 나가들이 이겨낼 수 없는 완력을 발휘하는 레콘들이 흠뻑 젖을 정도로 비를 내렸다.

 

“이걸로 이번에도 레콘들은 안 나오겠네.”

 

무더위와 비. 변온동물인 나가들에게 최적의 기온에 나는 연신 땀을 훔쳤다. 기온이 점점 더워질수록 놈들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말로는 인간, 레콘, 도깨비들의 연합군이었지만, 레콘이나 도깨비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인간인 나조차도 걸음을 떼기 어려운 비를 피해 레콘은 숨어있을 뿐이었다. 피를 두려워하는 도깨비들이 전장에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반쯤은 불사신에 가까운 나가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었다.

 

물에 젖은 레콘이 얼마나 무력한지는 알고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레콘들은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폭풍처럼 밀려오는 나가 무리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도깨비들이 피가 무섭다는 이유로 꽁무니를 빼고 있다는 사실은 참기 힘들었다. 먼 옛날 아킨스로우 협곡에서 십만 나가들을 몰살시킨 게 도깨비 아니었던가. 지금이야말로 그때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피를 본 도깨비의 폭주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북부는 멸망하고 말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라수 규리하 상장군의 부대는 역전의 용사들이 모여 있어 상황이 좀 나았지만,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늘로 몸을 휘감은 나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나가를 직접 내 눈으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보기만 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혐오감이 일었다.

 

나가들의 부대는 무적이었다. 날씨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죽음을 모르는 신체를 가진데다가 천재적 전술을 구사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있는 곳이 평지가 아닌 성벽이라는 점이었다. 나가들은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오겠지만, 사수하기만 하면 된다는 가망은 있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나가들에게 화살과 바위가 날아갔다. 물론 이게 통하리라는 기대는 접어야 했다.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나가들은 화살에 맞아도 개의치 않고 성벽을 올랐다. 이번 전투가 처음인 신병들은 그 모습에 벌써 넋을 잃은 듯 손을 놓아버렸다. 멍청이들.

 

나는 성벽에 머리를 드민 나가에게 칼을 찔러 넣어 떨어뜨렸다. 아무리 나가라 해도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상처가 생길 것이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져 시야를 방해했다. 열을 감지하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나가들은 이 점에서도 유리했다.

 

“죽어!”

 

성벽을 올라온 나가의 몸을 찌르며 공포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죽어!”

 

두 번째 외침은 증오였다.

 

“죽어! 죽어! 죽어!”

 

이제는 짜증이었다. 그냥 칼 맞으면 좀 죽어. 나도 칼 맞으면 죽을 테니까. 그게 공평한 거지. 왜 안 죽는 거야.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 할 무렵, 갑자기 하늘이 밝아졌다.

 

“비가…”

 

그쳤다.

 

비를 내리던 먹구름 대신 하늘에 떠오른 건 거대한 용이었다. 드디어 나타났다. 나가들에 대해 신이 내린 공평함이었다.

 

 

북부에 망명한 나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불신이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 역시 머지않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들과 마찬가지로 날씨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에 더해 거대한 용을 부리는 그에게는 뇌룡공이란 이름이 붙었다. 뇌룡공이 없었다면 지금쯤 라호친 너머 최후의 대장간까지도 밀림이 생겼을 것이다.

 

아스화리탈이 나타나자 허무하게도 나가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성벽 밑에는 나가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나가들의 재생력은 일단 시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시체들을 확인하고 처리하는 “해체” 작업이 필요했다.

 

나가들의 재생력을 두려워 한 어떤 이는 나가의 시체를 수십 조각으로 잘라서 땅에 묻거나 강에 흘러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전력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가의 시체를 확인하고 목을 베고 불로 지지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일단 시체가 되었던 나가가 살아나 병사를 습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나가의 시체를 확인할 때 긴장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 땀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시체를 뒤지는 모습은 악귀나 다름없어 보였다.

 

“역시 먹는 게 제일 확실한 처리 방법이겠지?”

 

함께 시체를 뒤지던 팽수 잘도반이 말했다.

 

“뭐?”

 

“나가 시체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나가 시체 타는 냄새에 비위가 좋지 않던 나는 구토를 했다.

 

“야 미쳤냐?”

 

구토를 마치고 팽수 잘도반을 보고 말했다.

 

“나가 살육자 얘기 몰라?”

 

팽수 잘도반은 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도깨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한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나가 살육자?”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북부의 인간 중에서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가 나가를 사냥하던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나가를 확실히 죽이기 위해 삶아 먹었대.”

 

역시나 팽수 잘도반이 하는 이야기치고 진지하게 들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남부와 북부는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그런데 사막을 건너 밀림에 들어가 나가를 사냥한 인간이 있었다고? 몇 달째 나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지만, 내가 처치한 나가는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가들의 본거지에 잠입해 ‘사냥’을 해서 잡아먹기까지 하다니, 짧은 문장 속에서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미 헛소리로 판단을 내렸지만, 팽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가 살육자의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무용담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나가 고기 애호가가 왜 전장에는 코빼기도 안 비춘대? 나가라면 전채(前菜)부터 후식(後食)까지 풀코스로 준비돼 있는데?”

 

나는 팽수가 말문을 잃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가 살육자는 지금… 어디에도 없는 신, 자신을 죽이는 신, 모든 이보다 낮은 신의 화신을 찾아다니고 있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지금 나가들이 날씨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나가의 여신의 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나가들을 막으려면 나머지 세 선민종족의 화신들을 찾아내야 해. 셋이서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 몰라?”

 

나가들을 상대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신앙심이 희박한 나조차도 가끔은 신에게 기도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소망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은 놓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야.”

 

“또 뭔데? 알고 보니 어디에도 없는 신의 화신이라도 된대?”

 

“나가 살육자는 마지막 아라짓 전사이자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이었어.”

 

잠시 팽수 잘도반의 말을 머릿속에서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아라짓 전사와 키탈저 사냥꾼은 지난 대확장전쟁 당시 나가들과 싸우다가 멸망한 전설 속의 존재들이었다. 아라짓 왕국이 멸망한 것은 800여년 전, 키탈저 사냥꾼들이 사라진 것은 700여년 전의 일이다. 마지막 아라짓 전사, 혹은 마지막 키탈저 사냥꾼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아라짓 전사인 동시에 키탈저 사냥꾼이라니, 그런 황당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라짓 왕국이 멸망한지 얼마나 되는지 몰라?”

 

“나가들이 복용하는 소드락에는 인간의 노화를 멈추는 효과가 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나가 고기를 먹은 나가 살육자는 800년 동안 안 죽고 살 수 있게 된 거지.”

 

갈 수록 태산이구나 싶었지만, 일단은 팽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