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아저씨

  • 장르: 로맨스
  • 분량: 85매
  • 소개: 세든 명자와 홀아비인 집주인 변해인 간에 참사랑을 이야기다. 더보기

변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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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봉산 서쪽기슭에 자리한 산동네로 올라가는 골목길들은 좁고 가파르다. 그래서 큰비가 오는 날이면 급한 도랑이 되고, 한 눈이 오는 날이면 속절없이 엉덩이로 타는 썰매장이 된다. 예전엔 강 건너 압구정 나루가 보인 무수막 수철리 나루터 앞이었던 아리수빙판위에 잔설을 한 아름 앉은 큰 냇바람이 논골 금남장터를 한바탕 휘젓고는 산동네로 올라가는 골목 사이사이로 빠져 들어갔다. 그중 한 줄기가 두 사람이 간신히 비껴지나갈, 연탄재로 뒤범벅이 된 폭 좁고 가파른 골목길한쪽 벽을 잡고 반질반질한 까만 얼음판을 피하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올라가는, 작은 가방을 들고 빠끔 눈만 보이게 군용목도리로 머리와 얼굴과 목을 감싼 명자에 스웨터뒷자락을 부풀리며 떠밀어 올린다. 오르다 대문이 나오면 손에 쥔 찢어낸 신문지 가장자리 빈칸에 연필로 적은 주소와 문패랑 비교하면서 오르다가 달린 문패를 보기위해 검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빙판을 어렵사리 넘어선 명자가 손바닥너비에 문지방에 올라서서 주소를 보려는데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몇 번지를 찾는데요?”

 

내려다봤다. 밑창과 등을 새끼줄로 동여맨 생살이 드러난 군화에, 검은 색으로 물들인 군복에 야전점퍼를 걸치고 군용목도리와 방한모를 둘러쓴 40초반에 건장한 사내가 코앞에 서자 번지가 적힌 찢은 신문쪽지를 내밀며 말한다.

 

“이 주소요.”

 

사내가 쪽지를 받아 보고는 의아해하며 묻는다.

 

“무슨 일로?”

 

“아세요?”

 

“물론 알지요. 한데∼”

 

명자는 안도하는표정을 지우며 말한다.

 

“그 댁 변 씨 아저씨를 뵈려고요.”

 

“내가 그요 만∼”

 

명자가 반색하며 꾸벅 절한다.

 

“재수 오라버니가∼”

 

“아! 재수가 부탁하던 그 색시구만 그래서 부지런히 오는 길인데 잘 되었소. 들어

 

갑시다.“

 

해인이 자물쇠를 열고 외짝대문을 열자마자 세찬바람이 대문을 활짝 열어 제키며 동무하자한다. 슬레이트지붕 위에 눈들을 휘휘찬찬하며.

 

 

 

1평 조금 넘는 크기마루에 걸터앉아 동여맨 새끼줄을 풀어내고 군화를 벗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묻는다.

 

“산달이 언제라고요?”

 

“석 달∼”

 

“그러면 넉넉잡아 내년 5월까지면 되겠어요?”

 

명자가 반색하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리 길게 신세져도 되요?”

 

“이왕이면 당홍치마라고∼색시도 표 씨요?”

 

“아니요. 도가예요.”

 

“도씨?”

 

해인이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머금고 묻는다.

 

“그러면?”

 

“이종오라버니세요.”

 

그 사이 해인이 군화를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서며 말한다.

 

“들어와요. 추운데.”

 

명자가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내려놓고 빠끔 눈만 보이게 머리와 얼굴과 목을 감싼 군용목도리를 푼다. 한눈에 드는 미인이다. 적당한 몸집에 알맞은 몸매. 변 해인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킨다.

 

 

 

이 집은 변 해인이 1년 넘게 직접15평이 남짓한 터에 작은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부엌달린 안방과 건너 방 1개와 지붕과 연이은 슬레이트를 천정삼은 마당한구석에 변소와 수도달린 세면장 겸 빨래터가 있는 쪽 마당을 어른어께 높이에 시멘트부록으로 둘러쳐진 담은 외짝 철문을 달은 집이다. 해인은 같은 값으로 산후를 위해서라며 극구 사양하는 명자에게 쓰던 안방을 내주고 건너 방으로 잠자리를 옮겨간다. 건너 방 냉구들이 신세 좀 져야겠다고 달려들자, 이번 쉬는 날 아궁이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몇 번을 뒤척이다가 어렵사리 잠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결코 잊을 수도 없었지만 잊고 살아야했던 아스라한 저편기억을 불러내는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는 체취에 버물린 따스한 입김과 잠 깨움에 부드러운 흔들림이 당겨오던 잠을 그만 놓쳐버린다.

 

“아저씨, 안방에, 이브자리 봐 났어요.”

 

해인은 눈을 감은 채 등을 보이고 돌아누우며 말한다.

 

“그런데요?”

 

“온기 돌 동안만∼”

 

대꾸가 없자 다시 묻는다.

 

“방걸레질도 할 동안만이라도 안 돼요?”

 

그 말에 해인이 눈을 뜨자 옆에 다소곳이 앉았던 일복차림명자가 잽싸게 방문을 연다. 얼음장 같은 냉기를 품은 바람이 같이 놀자 하비작거린다. 어쩔 수 없이 일어서는데 명자가 풋풋한 봄나물냄새를 풍기며 먼저 나가 안방 문을 열고 선다. 물 찬 제비다. 방을 비우며 딴에는 치우긴 했지만 홀아비 석삼년에 이가 서 말이 어디 가겠는가? 한데 들어선 안방은 그 사이 놀랍게 변해 있다. 거미줄이 쳐져있던 방구석이랑 발바닥을 끈적이게 하던 성가신 방바닥이랑 먼지들이 덕지덕지한 구석구석이랑 모두 반지르르 하다. 겸연쩍은 해인은 얼른 펴 놓은 이부자리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옷을 입은 채로 벽을 보고 눕는다. 고단함과 요가 품은 따스함과 아우러지면서 사르르 잠이 찾아든다.

 

“아저씨, 저녁상 차려놨는데요?”

 

잠결에 저녁상? 누구지? 하다가 명자생각에 벌떡 일나 앉는데 소주반병에 소주잔이 놓인 조촐한 밥상이 차려져있다. 국수 한 그릇으로 대강 때운 시장 끼가 와락 덜미를 잡아챈다. 수저를 들다 부엌으로 나가는 명자를 보고 해인이 말한다.

 

“색시, 난 자작 술에다, 혼자 먹는 밥엔 질력이 난 사람이요.”

 

그 말에 명자가 등진 채 걸음을 멈춘다.

 

“어이, 밥이랑 수저랑 가지고 들어와 반주 같이해요.”

 

“술도 못하지만 감히 겸상이라뇨?”

 

“까니 때마다 겸상하고 반주하기 싫으면 수일 내 짐 싸가 나가요.”

 

그 말에 얼른 부엌에서 밥과 수저를 들고 들어오지만 명자는 절에 간 색시다.

 

“안 무너져요. 앉아요.”

 

눈으로 밥그릇을 놓을 자리를 찾는 명자에게 해인은 얼른 찬그릇들을 좁힌다. 그 자리에 들고 온 것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해인이 소주병을 들며 묻는다.

 

“잔은?”

 

“다른 잔을 못 찾아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숨에 비운 잔을 내민다.

 

“받아요. 얼른.”

 

두 손으로 받아든다.

 

“조금만∼”

 

하는 사이에 소주가 찰랑찰랑 이다. 명자가 쏟아질까 밥상에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려는다.

 

“손위 사람이 주는 술잔을 마시지지도 않고 내려놓는 건 주도에 어긋나는 거요.”

 

명자가 고개를 돌려 찔끔 마시고 내려놓자 술 고파요 채근한다.

 

 

 

식사가 끝나고 혼자 밥상에서 술잔을 기울고 있는데 낯선 소리가 들려와 문을 열고 내다본다. 어둠이 널을 뛰고 있는 마당에 걸린 빨래들을 털며 걷는 소리다. 수건을 머리에 쓴 명자뒷모습은 영락없이 아내모습 같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다 돌아서는 명자얼굴을 보고 주저앉는다. 무너지는 억장은, 억지로 우겨넣고 봉했던 사무친 그리움을 서리서리 꺼내 든다. <영진엄마!> 1.4후퇴 때 변해인은 함경도에서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오폭으로 수많은 피란민들과 함께 모두를 잃는다. 그리고 단신 월남한 그는 이제 불혹을 내려산다. 연줄연줄 하여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구청똥지게운반 직에 취직한다. 구청똥치는 차 하나에 운전기사, 조수석에 타며 져온 똥통을 받아 탱크구멍에 붓고 덮개를 여닫고, 호수잠금장치를 관리하는 반장, 뒤에 매달린 똥지게운반 담당 셋, 모두 하여 다섯이 명줄을 건다. 해인은 책임감이 강한데다가 매사에 성실함을 보여 남보다 빠르게 힘깨나 부리는 반장이 된다. 반장이 되면서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시공무원이라 제때는 나오는 월급에다 월급 서너 배가 되는 부수입이 생긴다. 산꼭대기 사는 사람들, 좁은 골목 끝에 사는 사람들, 돈푼께나 있는 사람들, 공중변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제때, 바닥이 다 들어나 보일 때까지 그리고 깨끗하게 치워달라는 뜻으로 건네는 울며 겨자 먹는 식에 웃돈 까닭이다. 아무튼 웃돈이 없는 집은 똥이 넘쳐도 기다려야하고 바닥까지 싹 치우질 않고 남겨 둔다던지, 질질 흘리며 치운다던지, 뒷마무리를 적당히 해 준다던지, 물청소해 준다는 핑계로 물을 왕창 붓는다던지, 터키 식 변소를 가진 부자 집이나 공중변소는 변소 뒤편으로 호수로 배출하는데 호수가 짧다는 등의 갖가지 핑계로 똥지게로 퍼 나른다던지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렇다고 상대할 수가 없다. 똥이 무서워가 아니라 더러워서라는 속담처럼 한 방울이라도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가 흘려 놀까해서다. 그럼, 받은 웃돈은 어찌하는가? 절대 독식할 수가 없다. 똥치는 차운전기사와 통을 받아 올려 탱크 안으로 쏟아 붓는 반장 눈에 벗어나 미운털이 박히는 날이면 청하는 곳은 차가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저와도 뒷전인 까닭이다. 거기다가 가파르고 힘들고 빈자들의 골목을 배당시킨다. 그리고 감원이 있거나 차가 고장이 나거나 하면 틀림없이 그들 몫인 연유다. 그런 일도 없지만 만약에 액수가 부족한 날이면 자기 돈이라도 질러 넣어야한다.

 

 

 

똥치는 차가 왔다는 신호인 손 종소리나 확성기가 울리지 않아도 냄새로 온 동네가 절로 안다. 당시 서울건물들에 변소문화를 살펴보면 외국인과 관련된 건물들이나 딴에는 현대식건물이라는 건물들과 소수부유층과 고위층집들을 제외한 대다수 4대문 안에 가정집들과 적산가옥이라는 일본인이 살던 집들을 포함한 변소는 평균7-80㎝폭에 1m 전후 길이에 잠금장치가 없거나 있는 문과 바닥은 송판이나 시멘트로 만든, 쪼그리고 앉아 변보기에 적당한 직사각형구멍을 뚫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들여다보여 송판덮개로 닫아 사용한다. 하지만 4대문 밖이거나 빈촌은 드럼통 또는 반 드럼통이나 구덩이를 판위에 송판 2장을 걸쳐놓고 문에는 아예 장금장치가 없다. 그래서 특히 공중변소에서는 문에 달린 끈을 항상 잡고 있어야하는데 밑 닦느라고 이를 놓치는 날이면 흉한 꼴을 보거나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여름에는 구더기운동회를 구경을 해야 하고, 날아오르는 파리들을 엉덩이춤을 추어야하며, 겨울에는 석순처럼 올라온 똥 더미를 잘 피해 앉아야한다. 갓 퍼낸 변소를 사용할 때는 물청소로 묽어진 똥물 튀김을 맞지 않으려면 요령껏 엉덩이를 들어야한다.

 

 

 

이왕 나온 김에 그 당시 똥통을 져 나르는 사람들에 장비를 살펴보자 미군판초를 잘라 만든 발목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그 천으로 앞을 싸맨 낡은 군화, 같은 용량에 마무로 만든 똥통 2개와 좌우에 똥통을 달 지게, 긴 막대 끝에 달은 미군헬멧, 그리고 퍼다 남은 똥에 분량측정이나 얼거나 굳은 똥을 헤졌거나 똥이 아닌 물건을 꺼낼 때 사용하는 갈고랑이막대, 새끼로 말아 만든 수세미대용 청소막대, 그리고 군용가죽장갑이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고무장갑이 기본이다. 신참들은 수건을 마스크 대용으로 사용한다.

 

 

 

그들이 필히 몸에 익혀야하는 최우선기술은 좌우에 매달똥통에 수평유지에 필수인 분량조절이다. 그 다음이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릴 때, 좁은 골목길에서 게걸음 할 때, 급커브를 돌 때, 층계를 오르고 내릴 때, 미끄러운 빙판을 걸을 때, 행인과 마주쳤을 때 피하는 요령과 지어온 똥통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 흘리지 않는 기술 등이다. 그래서 이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자만이 반장기회가 주어진다. 여하튼 이 집은 해인 역시 여니 피란민들처럼 억척스럽게 수중에 들어 온 돈은 기초생활비 외는 모두 저축하여 시공무원이라는 뒷배로 시소유지를 불하받아 움막을 치고 살면서 건축자재를 하나씩 사모아 직접지은 집이다. 물론 호형호제하는 표 재수에 도움을 받았지만.

 

 

 

해인은 방문을 얼른 닫는다. 서리서리 꺼내진 사무친 그리움이 냉큼 방안을 차지하면서, 가벼운 짐이라 치부하려던 명자가 마치 먼 길을 떠났던 아내가 돌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들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리움이란 놈과 외로움이란 놈이 슬그머니 담 넘어 줄행랑을 치는 것을 빈 술잔을 만지작거림으로 별리하고 있는데, 명자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 목욕간에 펄펄 끓는 물 한 솥 준비해 놨으니 목간하세요.”

 

대꾸를 않자 재촉한다.

 

“물 식겠어요. 얼른요.”

 

해인이 마지못해 방문을 열고 나서자 명자가 다림질하여 갠,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공손히 내밀며 말한다.

 

“목간하시고 입고계신 옷들을 벗어 놓고 나오세요.”

 

해인이 마지못해 옷가지를 받아든다. 어느 새 방안에서 상치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몸놀림이 잽싸다. 오랜만에 집에서 몸을 씻고 거울이 안방뿐이라 하는 수 없이 들어가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데 묻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가도 돼요?”

 

“자기 방에 들어오면서 묻는 사람도 있어요?”

 

명자가 윗목에 앉는 것을 보고 해인이 일어서며 말한다.

 

“색시는 번개요. 그 사이 지저분했던 방을 이리 깨끗하게 치우고 빨래랑 다림질이랑 단숨에 해치우걸 보니.”

 

해인이 나가려하자 명자가 말한다.

 

“앉으세요. 아저씨.”

 

“왜요?”

 

“냉구들이 데워질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아저씨, 얼마를∼”

 

해인이 모른 척 묻는다.

 

“무엇을 말이요?”

 

“방세랑 전기세랑∼”

 

재수 누이동생이니 내게도 그와 진배없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방세랑 전기세는 빈집 지켜주고 소제비와 세탁비로 탕감하고 끼니는 밥상 차려주는 대가로 서로 퉁 쳐요.”

 

잠시 쳐보던 명자가 말한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네, 아저씨를 오라버니로 부르게 해주시고∼ 말씀 낮추시고 너 또는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요.”

 

“그럼, 나도 조건 하나 붙이지. 절대 누이돈은 한 푼도 쓰지 않는 다는.

 

“네, 오라버니.”

 

다음 날 해인이 출근한 사이 집안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먼저 DDT와 석회유황혼합체냄새가 진동하는 속에 전 살림살이가 마당으로 옮겨지고 죽어 자빠진 이와 빈대와 벼룩 그리고 바퀴벌레와 집게벌레 등을 쓸어내고 먼지와 거미줄이 털어 내지면서 그릇과 가구 그리고 문들과 바닥과 벽과 천정이 제 빛깔들을 찾는다.

 

 

 

잔설을 잔득 먹음은 강한 바람이 어둠을 골목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속에 해인이 비틀걸음으로 골목어귀에 들어서는데 어둠 속에서 명자가 불쑥 나타나며 부른다.

 

“오라버니”

 

해인이 자기 귀를 의심한다.

 

“춥고 어두운데 어떻게?”

 

명자가 얼른 손에 든 군용가방을 빼앗아들며 팔짱을 끼며 말한다.

 

“너무 늦어서요.”

 

속으론 좋으면서도 마지못한 척하는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앞을 보며 말한다.

 

“기다린 지 오래됐어?”

 

팔에 기댄다.

 

“조금요.”

 

“춥다. 어서 가자”

 

그날로 명자는 눈이 오나 진눈깨비가 오나 비가 오나 항시그곳에서 해인을 기다리고 해인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그것도 여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 행복할 수가 없다. 이 재미 탓에 즐기던 술자리도 마중시간에 맞추어 일어서는 버릇도 생긴다. 이뿐이랴? 아침마다 출근채비에, 전송해 주는 여자에, 퇴근하면 팔짱을 끼고, 차려주는 저녁밥상에, 반주대작에, 목욕준비에, 이부자리 펴고 개킴에, 말동무에, 빨래랑 청소랑 가려운 등 굵던 대나무효자손 대신에, 아픈데도 싫다는 기색 없이 주물러주는 젊은 여자가 있다는 묘한 설렘은 <왜? 그간 혼자 살았나?>하는 생각마저 슬며시 고개를 든다.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 속을 뚫고 달려오는 해인 머리 위로 비닐우산이 받쳐진다. “어떻게 알고?”

 

“라디오로 들었어요.”

 

명자가 우산을 해인 쪽으로 기우리자 재빠르게 명자 쪽으로 기우린다. 해인이 명자 쪽으로 기우리며 말한다.

 

“난 기왕 젖었으니 괜찮다.”

 

“그럼 다가서세요. 오라버니.”

 

해인이 다가들자 명자가 몸을 밀착시킨다. 온기가 전해지며 정감을 자아낸다.

 

“이런 날은 나오지 마라. 홀몸도 아닌데.”

 

“이 시간만 되면 마치 연인 만나려가는 것처럼 마음이 설래서∼”

 

해인은 가슴이 설레자 자신도 모르게 살포시 안으며 묻는다.

 

“출산이 언제지?”

 

“한 달∼”

 

이때 윗 길가에 대문이 열리며 아이를 업은 아낙이 우산을 받쳐 들고 골목을 내려선다. 서로 비끼어 서기엔 너무 좁아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에 해인이 말한다.

 

“우산 잡아.”

 

우산 단단히 잡은 명자를 얼른 안아든다. 졸지에 해인에 품에 안긴 명자는 넓고 따스한 가슴이, 해인은 싱그러운 여체가 너무 좋아 꼭 안기고, 강하게 품는다. 그 아낙과 간신히 비껴지나 한참을 올라가도록 그리한다. 미안한 명자가 말한다.

 

“오라버니.”

 

“싫지 않으면 아대로 집까지 가자.”

 

“힘들잖아요?”

 

“하나도. 그 보다 명자야, 우리 이대로 같이 살면 안 될까?”

 

명자도 그러고 싶었지만 너무 염치가 없어 답을 못한다.

 

“싫으냐?”

 

“족제비도 낯짝이 있어요. 오라버니.”

 

“청 들어 주어 고맙다.”

 

명자는 눈시울을 적신다.

 

 

 

아침에 산통이 시작되자 해인은 서둘러 표 재수에게 연락하고 동네산파를 부른다.

 

산파는 죽기 전에 형이라 부를 만큼 해인과 가깝게 지내던 동네연배 처다.

 

“형수, 뭘 준비해야합니까?”

 

“저녁때에 해산할 것 같으니 서둘지 않아도 돼요. 색시, 미역 사다 놓은 거 있어요?”

 

“네, 오라버니 미안하지만 부엌에 있는 미역이랑 돼지고기랑 가져주실래요?”

 

해인이 나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명자가 부엌문을 열고 말한다.

 

“네, 그거랑 신문지에 싼∼ 네 그거랑”

 

해인이 미역과 돼지고기를 들어오자 산파가 말한다.

 

“그거론 안 되고. 변씨, 형편이 되면 소고기 댓 근 사오는 길에 질 좋은 미역 두

 

오래기와 일반미 닷 되만 사와요.”

 

명자가 끼어든다.

 

“쌀은 있는데요.”

 

“그건 정부미잖아?”

 

이때 표 재수에 목소리가 들린다.

 

“형님, 집사람이 몸살감기라 저 혼자 왔습니다.”

 

해인이 문을 열고나오며 말한다.

 

“사낸 나도 있으니 자넨 온 김에 대신 결근계나 내주게.”

 

“며칠을……”

 

“심한 몸살감기로 하여 나흘간으로.”

 

“한데 어디 가시게요?”

 

“응, 장 좀 봐오려고.”

 

재수는 거짓말한다. 재수 처 순자는 틈만 나면 싸돌아다니는 여자인데다가 오늘따라 장날이라고 한껏 차려입고 나서자 재수가 참다못해 소릴 지른다.

 

“하나 밖에 없는 시누 출산이라는데 그길 안가고 어딜 간다는 게야!”

 

퉁명스럽게 구두를 신으며 말한다.

 

“오늘따라 왜 그래요? 그까진 이종시누 가지고. 아침부터 재수……..”

 

“뭐! 재수가 없다고!”

 

“왜 소린 질러요? 재수, 거기에 있잖아요?”

 

이 말과 함께 총알같이 대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표 재수 처인 표 순자는 대폿집작부였다가 재수를 만나 같은 종씨라고 가깝게 지내다 정들어 사림을 차린, 아들 하나를 둔 유부녀다. 하지만 얼굴이 곱상하고 피부와 입술이 까무잡잡한데다가 긴 머리를 좋아해서인지 작부시절부터 제법 색을 썰줄 알아 단골이 많았는데 내 것보다 남에 것을 더 좋아하는 여자다. 이러다보니 집인 꼴은 말이 아니었지만 재수는 내가 선택한 여자기에 체념한지 오래다. 오직 고무신만 거꾸로 신지 않기를 바라면서.

 

 

 

오늘날이 장날이라 폭행죄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천 상열이 석방되는 날인 까닭이다. 왕십리바닥에서 포악한 깡패로 소문난 천 상열은 순자가 작부초입부터 누나동생 하면서도 눌림 사이로, 명자를 중매(?) 선 것은 상열이 한 눈을 파는 것 같아 미끼로 준 것이다. 재수는 미더워 하진 않았지만 그런 재주도 없을뿐더러 한입이 무서워 울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