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를 지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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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지키시오

 

 

 

 

 

 

 

 

 

 

 

 

 

 

 

 

 

 

 

퇴근하고 돌아온 정일에게 아내, 서린이 진한 포옹을 해 주었다. 정일이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뭐야, 오랜만에 왜 이렇게 사랑이 넘쳐?”

 

“글쎄, 뭐 때문일까?”

 

서린이 보조개를 보이며 웃었다. 서린이 자신의 얼굴을 보며 미소짓는 정일에게 입을 맞추고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서린의 오른손에 들린 물건을 본 정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만 그것이 슬픔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임신한 거야?”

 

서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이 서린을 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서린에게도 정일에게도 이 이상이 없을 행복한 밤이었다. 서린이 포옹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정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여기서 계속 서 있을 거야? 들어와. 힘들게 일했는데 쉬어야지.”

 

“아이고 아닙니다. 우리 공주님. 우리 애랑 와이프가 있는데 힘을 내야지요.”

 

“공주님은 나중에 딸 낳으면 불러주시고요. 어서 들어오기나 해. 오늘 수고했는데.”

 

정일이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서린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서린이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뭘 또 하려고? 임신했다며. 쉬어야지.”

 

“아냐, 사실 뭐 맛있는 거 해놓으려고 했는데 당신은 아무래도 애가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오늘은 쉬었지.”

 

서린이 찬장에서 손바닥 만 한 크기의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거 먹게? 속 안 좋다고 안 먹었잖아.”

 

서린이 집어든 것은 정일의 엄마가 서린의 생일에 그에게 선물한 영양제였다. 서린은 이 약을 먹으면 속이 안 좋아진다며 찬장에 넣어두고 먹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축복받을 일에 받은 소중한 선물을 거부했다고 전할 수는 없었기에 먹고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좀 속도 안 좋고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약을 잘 안 먹어버릇해서 그런가? 시어머님이 주시는 건데 괜찮겠지. 내 몸엔 안 좋아도 우리 애한테는 좋겠지?”

 

서린이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서린이 약을 입에 넣으려 하자 정일이 서린의 팔을 붙잡았다.

 

“그거 약 받은 지 몇 달 됐잖아.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깐 내가 내일 어머님 만나서 새로 받아올 테니깐 이건 그냥 버리자. 어머님께는 다 먹어서 새로 받으려는 거라고 하지 뭐.”

 

“그럼 되겠네.”

 

“아깝다고 먹지 말고?”

 

“내가 무슨 애야?”

 

서린이 웃으며 비닐을 봉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정일이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린을 침대까지 에스코트했다. 야근하며 생긴 피로가 한 번에 가신 정일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 번 더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정일의 방문에 정일의 엄마, 민영이 정일의 손을 붙잡고 정일을 껴안았다. 정일은 문득 자신이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 언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에 정일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민영이 과일을 깎아서 정일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래, 회사는 잘 다니고 있니? 며늘아가는 잘 지내고?”

 

“아, 잘 지내죠. 아내도 엄마 많이 보고 싶어 하는데 나중에 데려 올게요.”

 

“그래, 요새는 시어머니라고 막 불편하고 이런 건 없지 않니? 나중에 맛있는 것 준비 해놓을 테니 꼭 오라고 전해라.”

 

“아, 그럼요.”

 

‘나중에 손주 데리고 올게요.’

 

정일이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나저나 형은요? 자주 와요?”

 

정일이 자신의 형, 정석을 떠올리자 민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형이니 자주 오지. 손자만 낳아서 데려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래도 형인데 너보단 먼저 아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니?”

 

정일이 민영의 시선을 피했다. 뭐, 딱히 상관은 없는 일이니 엄마의 소원을 따라 주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네 부부가 더 금슬이 좋은 걸 어쩌겠는가? 정일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네, 그건 그렇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요. 아, 그나저나 아내가 그때 엄마가 준 약 다 먹었다고 새로 받을 수 있겠냐고 하던데요? 약 이름이 뭐에요? 저희가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아, 그거? 아니다. 나중에 내가 따로 챙겨줄게. 그런 핑계라도 대야 직접 찾아가서 며느리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지.”

 

“그런가요?”

 

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 서린을 귀여워했던 것을 기억했기에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시어머니 노릇이라도 하겠니. 그런데 약이 효과가 있니?”

 

“효과가 좋다고 하던데요. 하루에 두 번 먹으면 일 할 때마다 힘이 난대요.”

 

“그래?”

 

민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치맛자락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정일이 수첩에 관심을 갖자 민영이 수첩을 다시 치마 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랜만에 왔는데 아버지도 보고 가야지?”

 

“아, 그렇죠. 집 가는 길에 들를게요.”

 

“그래, 그래. 아, 이건 내가 며느리 주려고 만들어 둔건데 집에서 입이 심심하거든 한 잔씩 타서 마시라고 그래라. 이 통은 생강차고 밑에 통은 율무차야.”

 

아차, 민영의 말에 정일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서린이 임신한 뒤 정일은 밤새 산모에게 좋고 나쁜 음식을 검색했었다. 자두, 사과, 키위, 바나나는 좋고 율무, 생강, 녹두, 파인애플은 나쁘다…….

 

‘참 울 엄마 타이밍은…….’

 

정일이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민영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그럼요. 나중에 잘 챙겨 줄게요. 아, 저 그럼 좀 가볼게요.”

 

“그래, 아빠 보고 가는 것 잊지 말고.”

 

“넵.”

 

정일이 웃으며 문을 닫고 나와 한숨을 쉬었다. 차에 탄 정일이 옆자리에 놓인 민영이 만든 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이 천덕꾸러기들아.”

 

정일은 마저 한숨을 쉬고 차를 몰았다. 정일이 도착한 곳은 작은 납골당이었다. 정일은 납골당에 모신 아빠의 유골에 대고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는 어젯밤에 찍은 임신 테스트기가 올라와 있었다.

 

“아빠, 나도 이제 아빠에요. 아들일까, 딸일까? 나 닮은 애 나오면 어쩌죠? 우리 서린이 닮은 애가 나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아빠도 그걸 봤으면…….”

 

정일이 말을 잇는 대신 작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정일의 표정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됐고, 이제 갈게요. 아내랑 병원에 가봐야 해서요. 나중에 또 올게요. 사랑해요.”

 

정일이 납골당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납골당을 나왔다. 납골당을 나오기 전 정일은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방명록에까지 자신의 행복을 적고 싶었던 정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은 페이지 맨 위에 민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발 정석이가 정일이보다 먼저 애를 낳게 해 줬으면…….’

 

정일이 방명록의 이전 페이지도 훑어 보았다. 민영의 이름이 하루에 하나씩 올라와 있었다. 정일은 고민 끝에 방명록에 다른 내용을 적었다.

 

‘우리 가족 모두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아빠도 행복하길…….’

 

“그래, 뭐. 나중에 애 나오고 보면 엄마도 좋아하겠지. 고부갈등은 귀여움이 약이니.”

 

정일이 기분 좋게 웃으며 찝찝함을 털어냈다. 차를 타고 이동함에도 집까지 가는 발걸음이 가깝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만큼 정일의 몸이 붕 떠올랐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아직 임신 초기니 힘든 일은 전부 남편 시키시고 아내 분은 집에서 푹 쉬세요. 이럴 때 남편도 좀 부려먹고 해야죠.”

 

의사 선생님의 장난 섞인 축하에 서린이 정일의 팔을 껴안고 웃었다.

 

“그러게요. 평소에도 잘 해주는데 뭘 더 해 달라 해야지?”

 

정일이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남편이네요. 일단 산모와 태아 모두 건강하니 철분제와 엽산제만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사과나 키위 등 많이 챙겨 드시고 푹 쉬세요. 약 같은 건 함부로 드시지 말고 여기가 아니더라도 병원에서 임산부에게 문제가 없다고 확실히 처방을 받고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정일이 고개를 숙이고 서린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내가 뭐, 만삭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얘는? 임신 초기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시잖아. 그렇죠 선생님?”

 

“그럼요, 남편 분 아주 잘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서린이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정일에게 몸을 기댔다.

 

“굴욕이야. 굴욕이닷!”

 

“까불지 마라.”

 

정일이 서린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서린이 입을 삐죽거리며 정일의 품에 들어갔다. 정일이 차를 몰며 서린의 배를 쓰다듬었다.

 

“어때, 애기 옷부터 살까?”

 

“벌써? 아직 한 달도 안 됐어.”

 

“그런가.”

 

정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서린이 정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고, 운전이나 하세요. 배는 이따가 실컷 쓰다듬게 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마님. 어디로 모셔 드릴까요?”

 

정일의 연극체 느낌 나는 말투에 서린이 작게 킥킥대고는 다리를 꼬고 말했다.

 

“음……. 갑자기 아기가 바나나를 먹고 싶어 하는구나. 냉큼 대령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마님. 그럼 곧바로 과일가게로 대령토록 하겠습니다.”

 

“오냐.”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과일가게 앞에 차를 세운 정일이 내리자 서린이 따라 내렸다.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내가 골라 올게.”

 

“아이고, 아닙니다. 과일 볼 줄도 모르는 남편한테 우리 애 먹을 음식을 맡길 수야 없지.”

 

서린과 정일의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정일이 다시 서린에게 바짝 붙어 서린을 에스코트했다. 과일가게에 들어간 서린이 바나나를 고르는 동안 정일은 서린의 손을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일의 눈에 서린이 평소 좋아하던 멜론이 들어왔다. 저거나 하나 더 사갈까……. 고민하던 정일의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가 서린의 어깨를 붙잡고 큰 소리를 질렀다.

 

“서린아!”

 

무방비 상태로 있던 서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일도 뒤늦게 서린을 놀랜 사람을 찾아냈다. 민영이 한 발짝 물러나 웃으며 서린과 정일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고 또 보네. 뭐 하고 있었어?”

 

“과일 고르고 있었죠?”

 

너무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서린도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 어머님. 왠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아니, 너 줄 약 구하고 나서 맨손으로 가긴 좀 그래서 과일이나 하나 사들고 갈까 그랬지.”

 

그렇게 말하는 민영의 손에는 파인애플이 담긴 봉지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 고마워요. 감사히 먹을게요.”

 

서린이 먼저 파인애플을 받아 들고 웃자 정일도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 몰랐으니 하는 수 없지. 서린이도 괜찮은 것 같고. 정일고 표정을 풀고 말했다.

 

“온 김에 집에라도 들어오셔야죠.”

 

“아니다, 아냐. 괜히 집까지 따라오는 부담스러운 시댁이 되면 안 되지. 안 그러니 며늘아?”

 

“에이, 어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섭섭하게. 어머니도 같이 와요.”

 

“그러면 그럴까?”

 

민영이 웃으며 서린의 손을 잡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자 민영이 손가락으로 서린의 배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정일아, 우리 며느리 운동이라도 시켜줘라. 이제 배 나오려고 그런다.”

 

“엄마!”

 

정일이 급하게 민영의 손을 붙잡았다. 세게 잡아 아플 만도 한데도 민영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정일을 쳐다보며 웃었다.

 

“왜 그래? 혹시 아빠라도 되려고 그러니? 그런 게 아니면 운동이라도 좀 하면 좋지.”

 

“아, 네 뭐 그렇죠.”

 

서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민영이 정일이 거실에 놔둔 율무차와 생강차가 든 통을 보고 말했다.

 

“뭐 하니? 아내한테 다 시키는 거야? 차라도 좀 준비해 줘야지.”

 

“그럴까요?”

 

정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린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다가 정일을 보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정일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차를 준비했다. 정일은 율무차, 민영은 생강차, 서린에게는 그냥 물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