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을 이끄는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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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레콘이 있었다. 여타 레콘들과 비교해서도 머리 하나쯤은 더 클 정도로 유독 길고 커다란 그의 체격 탓인지, 나면서부터 계명성을 질러 산파의 귀를 반쯤 멀게 만든 괄괄한 천성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답답한 틀 안에 갇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물을 꺼려하는 만큼이나 질색하였다. 솜털이 보송하던 시절부터 귀에 거슬리는 시비를 거는 악동들이나 잘 걷고 있던 길을 가로막는 바윗돌 쯤이야 타고난 강건함이 담뿍 녹아든 주먹질 두세 번이면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를 유독 답답하게 만들었던 집안 벽에 주먹을 날려 작은 창문이라도 낼라 치면 어미의 불벼락같은 호통이 날아들며 그의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울분을 더했다.

결국 태어난 지 열너덧 해쯤 되던 어느 햇볕 좋은 날, 더 이상의 감금을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아무거나 되는 대로 우겨넣은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서는 괴성을 내지르며 집을 뛰쳐나갔다. 자식의 독립 시기가 다른 레콘들보다 몇 해 빨리 찾아왔겠거니 어림짐작을 한 그의 어미는 ‘어디 가서 다치지나 말라’는, 레콘이 다른 레콘에게 건네기에 꽤나 해학적 요소가 있는 작별인사를 한 번 건넸을 뿐 이미 평원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진 자식과 마찬가지로 그 뒷모습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집을 떠난 레콘은 숙원 하나 없이 발 닿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해방감을 느꼈다. 비록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냅다 절벽을 뚫고 틀어박히거나, 죄 없는 민가에 들이닥쳐 그렇잖아도 좁은 거실을 점거하곤 하는 처지였지만 말이다. 레콘 중에서도 커다란 축에 드는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밤새 비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말을 끝없이 중얼중얼 내뱉으며 난데없는 불청객에게 주거 공간을 빼앗긴 불쌍한 이들에게 끔찍한 긴장감을 선사하다가도, 날이 화창하게 개고 나면 지붕과 벽에 대한 무한한 감사는 온데간데없이 역시 탁 트인 것이 최고라며 동편 몇 닢, 가끔 은편 하나 정도를 남겨두고서 미처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를 피해 길을 떠나고는 하는 나날을 반복했다.

방랑을 시작한 지 예닐곱 해쯤 되던 어느 날 아침, 레콘은 정말 그답게도 주변이 적당히 트인 산 중턱에 터를 잡은 제 집에 벌렁 누워서 천장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산 속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기로 결정한 바 있기에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솜털 보송했던 어린 시절처럼 자신을 둘러싸 감금하는 벽을 부수고 싶어서 심기가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그도 결국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 벽과 지붕에 대한 적대적 감상은 이미 변질되어 그들이 제공하는 아늑한 수감의 필요성을 인정한 지 오래였다. 물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질린 탓에 앞으로 쭉 살기 위해 돈 들여가며 지은 집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 별난 레콘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 것은 못다 팬 장작이나 툭 치면 무너질 알량한 돌벽 따위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몇 년을 넘게 풀어지질 않으며 부풀어 올라 한계에 달한 까닭 모를 울굴이 호흡조차 답답하게 만들 정도로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납게 부리를 딱딱대며 끝 모를 답답함과 함께 계속해서 뒤척거리던 그는 문득 집을 떠나올 때와 비슷하게 고함을 지르며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에 들어오는 그 무엇이든 물질의 가장 원초적인 구성 요소가 되도록 재배열할 기세로 주변을 서성거리다 문득 거대한 그림자를 눈치챈 레콘은 제 집에서 서른 걸음쯤 떨어져 있는 시커먼 암벽을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걸어가 주먹을 바투 쥐었다.

“이건 뭔데 여기 서서 해를 막고 있어?”

암벽에게 인격이 있어 대답을 할 수만 있었다면 레콘의 부당한 화풀이에 상당히 억울한 투로 항변했을 것이다. 기실 따져보면 수만 년을 우뚝 솟아있던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만든 응달로 기어들어와 집을 지은 쪽은 불과 스무 해 하고도 조금 더 살았을 뿐인 이 성깔 더러운 레콘이 아닌가.

그러나 세간의 상식대로,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부풀어 오른 레콘에게 변명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변명을 내뱉을 입도 자의식도 없는 암벽에게 원 자리에 이 이상 온전한 모양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성난 레콘이 험악한 표정으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사라진 지 오래다. 더군다나 그 레콘이 꽉 쥔 주먹을 들어 어깨 뒤로 한껏 당기고 있다면 더더욱.

천덕꾸러기 두부 뭉개듯, 온 산등성이를 쩌렁쩌렁 울리는 계명성과 함께 휘둘러진 주먹은 산맥이 만들어진 이후 줄곧 그 자리를 지켜온 단단한 세월의 증거를 무참히 박살냈다. 암석의 비명과 함께 머리 위에서 주먹만 한 돌덩이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등이나 벼슬을 때리고 굴러 떨어졌지만 레콘은 개의치 않았다. 점점 넓어지는 즉석 동굴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며 옹골찬 바위보다 몇 배는 단단한 주먹을 연거푸 내지르는 그의 얼굴에 희열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울리던 굉음이 멈춘 것은 저녁나절 때나 되어서였다. 비구름과 햇볕이 수십만 년 걸려 이루어낼 극적인 침식을 단 하루만에, 그것도 두 주먹만으로 끝마친 레콘은 손을 툭툭 털고 집으로 돌아가 더없이 달콤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