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회계법인 표류기

  • 장르: 판타지, SF | 태그: #초인 #영웅 #항해 #표류 #회계사 #탈세
  • 평점×10 | 분량: 201매 | 성향:
  • 소개: 법인세 신고기한 마지막일인 3월 31일. 진심회계법인은 사무실 통째로 태평양 쓰레기 섬으로 날아가 버린다. 주변에서 화재를 진압하던 초인과 소방관들의 커뮤니케이션 실수로 그렇게 된... 더보기

진심회계법인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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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사소한 오류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3월 30일 밤, 진심회계법인, 신입회계사 조대풍의 노트북 화면.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수정, 오류, 수정, 오류, 수정, 오류, 오류, 오류……. 법인세 전자신고, 지긋지긋하다. 신고 중인 회사는 자그마한 주류 제조 기업 ‘동동주막’. 거래 내역도 간단하고 복잡한 회계처리도 없어 세무조정은 쉽게 끝났으나, 회사가 친인척들에게 대부한 금액이 꽤 있다.

 

아차차, 대출받은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되는데, 이번에 돈을 빌려간 ‘이동식’이라는 사람의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회사에 요구만 해놓고는, 다른 일에 치여 미처 확인을 못 했다. 세무조정계산서에 스티커도 안 붙이고 회사에 보내버린 것도 깨달았다.

 

이 시간에 담당자가 남아 있을까. 신고는 내일로 미뤄진다. 내일까지 반드시 마쳐야 한다. 3월 31일이 신고 마감이므로. 한숨만 내뱉고 욕은 안으로 씹어 삼킨다. 회계사로서의 품위가 있지.

 

두 파트너는 물론 매니저, 시니어회계사의 자리 모두 텅 빈 지 오래다. 남은 사람은 병목현 이사와, 전자신고라는 귀찮지만 하찮지 않은 업무를 맡은 신입회계사들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피어오른다. 회사에서 싼 맛에 저가 변환프로그램을 쓰는 탓이다.

 

1, 2월의 업무 강도도 고되지만 3월의 그것은 가히 살인적이다. 모든 기업의 법인세 신고가 이 시기에 몰리다 보니 1월부터 시작된 세무조정이 3월 말에야 마무리된다. 시니어, 매니저들이 종종거려 봐야 소용없다. 위로 올라간 조서는 일중독자인 병목현 이사의 오피스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올해는 제발 미리미리 조서를 올려달라고, 하루 만에 수십 개의 조서를 봐야겠느냐고 불평하며 회계사들을 재촉하던 진지한 대표는, 조서와 문서로 쌓은 탑들에 둘러싸여 좀비 같은 몰골로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병목현 이사의 뒷모습에 질려 입을 닫고 말았다.

 

밥 대신 커피를 양식 삼아 벌건 눈으로 조서와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는 3월이 우여곡절 끝에 지나가고, 모든 결과물에는 최종적으로 진지한 대표나 심술란 대표의 서명이 기재된다. 남은 것은 전자신고 대행 업무.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세무조정은 안녕. 여름에 있을 중간예납까지는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질 터.

 

“이런 썅!”

 

기어이 욕이 튀어 오른다. 건너건너 파티션에 앉은 공배기 회계사였다. 대풍은 그리로 달렸다. 저 멀리 앉아 있던 맹금안 회계사도 냉큼 뛰어왔다.

 

“이번엔 또 무슨 오류야?”

 

“몰라. 목록을 봐도, 알 수 없는 오류래. 이런 ㅅ…….”

 

두툼하고 커다란 손이 노트북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휘젓는다.

 

“이리 좀 나와 볼래?”

 

육중한 몸이 일어나자 의자가 쑤욱 올라오고, 껑충한 금안이 앉으니 다시 조금 내려간다. 금안의 동그란 눈이 화면과 눈싸움을 벌였다. 현란한 손놀림과, 망막에 잔상을 남길 시간도 없이 휙휙 바뀌는 서식들. 구경하던 대풍과 배기는 눈알이 돌아가다 꼬여버렸다.

 

배기가 커피를 홀짝댄다. 아까 함께 저녁을 먹고 사들고 온 건데 아직도 남아 있나 보다. 그의 손아귀에서는 벤티 사이즈의 텀블러가 쇼트 사이즈로밖에 안 보인다.

 

“아, 졸려. 나도 좀 마셔도 되냐?”

 

커피가 묵직하고 따뜻하다. 커피전문점까지 문 닫은 이 시각, 나가는 모습도 못 봤는데 어디에서 사온 걸까?

 

“잘 마셨다.”

 

“젠장. 다 퇴근하고 우리만 남아서 이게 뭐야? 도도는, 벌써 갔어?”

 

“어, 아까 신고 다 하고 10시에 갔어. 걔는 다 페이퍼 컴퍼니잖아. 할 것도 없더라. 어찌나 자랑자랑을 하는지.”

 

도도연 회계사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화장에 공을 들이는 것만큼이나 일처리도 꼼꼼하면 좋으련만, 하는 일마다 구멍이 숭숭해 아무도 도연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 덕분에 맹금안, 공배기, 조대풍만 죽어라 외근에 끌려가 세무조정 건의 90%가 배정되고, 스케줄 상 그들이 할 수 없는 조정만 도연에게 떨어졌다.

 

“대충 해, 대충. 회사에 몸 바친다고 누가 알아 줘? 몸만 축나지. 나처럼 머리를 쓰라고.”

 

퇴근하며 도연이 남긴 말이다. 저걸 그냥 콱! 세무업무에 대충이 어디 있나. 당장 숫자 몇 개 때문에 오류가 나서 전자신고를 못 할 판인데.

 

오류는 금안 덕분에 해결됐다. 다른 전자신고도 마치고 세 신입회계사는 한 명씩 회사를 나섰다. 병목현 이사는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동동주막 회계팀에 전화하니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담당자가 양수가 터져 응급실에 실려 갔단다. 서식에 입력할 주민등록번호를 알려 달라 하니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려주느냐고 되묻는다.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며 법규를 설명하니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재차 전화하니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이 받는다. 여러 번 전화를 주고받으며 도 닦는 심정으로 설명을 되풀이한 끝에, 이동식 씨가 유럽에 여행가서 연락이 안 된다, 그쪽 시간으로 한밤중이라 자고 있을 거다, 나중에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런 썅!’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옆에서 도연이 깔깔거린다. 헤드폰을 쓴 걸 보니 그렇게 좋아하는 <동물농장>이라도 보는 모양이다. 오후에 반차를 내고 제주도에 내려간다며 낚싯대를 꺼내 닦는 천문성 회계사, 여자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실실대는 정다운 회계사, 흥부가 톱질하던 박만 한 배 위에 만화책을 올려놓고 보는 주기율 회계사, 다들 한가한 모습이었다.

 

‘왜 나만!’

 

심사가 뒤틀리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터진다.

 

“쓰벌, 다 날아가 버려라!”

 
* * *
 

창밖으로 치솟는 화염이 거대하다. 소방차가 뿜어대는 물줄기에도 불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창문이 터지고 시커먼 연기가 외벽을 타고 오른다.

 

물줄기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낡아빠진 소방호스들이 찢어진 탓이다. 멀쩡한 호스에서 나오는 물이 졸졸거리는 건 소화전 배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온하던 날씨가 급변해 돌풍이 분다. 불똥이 사방으로 날아가 가로수와 현수막에도 불이 붙었다. 이대로 가면 일대가 불바다가 될 터였다.

 

초인을 부르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떨어졌다. 소방관들은 나라사랑초인협회 소속 초인인 이동식과의 통화에 성공했다. 동동주막의 사장 이동막의 사촌 동생이다. 유럽 여행 중이라 어렵사리 전화가 연결됐다.

 

– 그래서…… 조던빌딩 3층을 통째로 공간이동 시키라고요?”

 

막 잠에서 깨,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네, 맞습니다. 거기에서도 가능하겠습니까?”

 

– 가능합니다. 주소를 불러주세요.”

 

“서울시 □□구 ◇◇동 황천로57. 이동 좌표는 북위 38도, 서경 145도입니다.”

 

– 아아, 또 그 쓰레기 섬이군요.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 가위로 자른 듯, 강풍이 뚝 끊긴다. 회오리치던 대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됐습니다. 그럼 전 너무 졸려서 이만.”

 

통화 종료. 하지만 소방관들의 눈앞에는 여전히 빌딩이 불타고 있었다. 통화를 재개했다.

 

“이동식 씨, 공간이동 시키신 것 맞습니까? 조던빌딩 3층이 아직도 불타고 있는데요!”

 

– 아까 서울시 □□구 ◇◇동 황천로17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7이 아니고 57이요!”

 

– 뭐라고요? 아이쿠, 이런!”

 

서울시 □□구 ◇◇동 황천로17의 국제금융타워 3층에는 법인세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진심회계법인이 단독 입주한 상태였다. 해당 건물은 3층이 사라진 순간, 4층을 포함한 윗부분이 수직하락하며, 서울 시내 최고층 빌딩이라는 타이틀을 잃게 되었다.

 
* * *
 

설마 지진은 아니겠지. 사무실이 기우뚱한다. 각종 집기가 허공에 떠오르고, 극심한 멀미가 찾아왔다. 부유감이 끝나나 싶더니 엄청난 충격과 굉음과 함께 창밖에 물보라가 일었다.

 

영상이 정지되자 도도연은 와이파이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공배기는 엄마를 불렀으며, 진지한 대표는 책상을 부여잡고 “여보!”를 외쳤다.

 

병목현 이사는 문서 탑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법전 넘기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고, 천문성 회계사는 낚싯바늘이 날아가 배신주 회계사의 치맛자락에 걸리는 바람에 그녀가 오늘 입은 속옷 색깔을 볼 수 있었다.

 

구루소 회계사는 변기에 앉아 막 밀어낸 참이었는데 변기물이 역류해 엉덩이와 옷이 젖어버렸고, 총무인 노민선은 초코칩 쿠키를 먹다 떨어뜨려 바닥을 기며 찾았다.

 

민선이 발견한 것은 바닥에 차오르는 물이었다. 창밖에 넘실대는 파도, 비상계단에서 솟구치는 물줄기,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서류들.

 

“홍수 났다! 사람 살려!”

 

다들 책상 위로 기어오르느라 바빴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익사할 게 자명했다. 민선은 각성했다. 통통한 양팔을 위로 뻗으며 힘차게 기합을 넣었다.

 

“하아압!”

 

순간, 머리가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콘크리트 박스나 다름없는 사무실이 붕 떠올랐다. 종아리까지 차올랐던 물이 빠져나가 바닥에는 물기만 남았다. 제가 한 게 맞나 싶어 민선 스스로도 놀라고, 책상 위에 엉거주춤 웅크린 회계사들도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회계사 10인과 총무 1인은 앞 다퉈 창가로 달려갔다. 창밖은 바다였다. 정확히는 대양 위의 쓰레기장 한가운데. 쓰레기는 다양했다. 그물, 페트 병, 비닐봉지, 낚싯대, 곰인형…….

 

볕은 따사로운데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다 바람이 차다. 꽃샘추위를 대비해 내복을 챙겨 입은 정다운 회계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재킷을 단단히 여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있는 분?”

 

지한의 시선이 주기율 회계사를 향한다. 기율은 ‘또 나야?’ 하는 표정이었다. 유일한 이공계 출신이이라는 이유로,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인 다른 회계사들은 이해 못 할 자연 현상이나 공학 기술이 있으면 늘 기율에게 답을 구한다.

 

“저는 화학과예요. 어…… 이건 무슨 전공이라야 아는 걸까요? 해양학?”

 

“천문성 선생은?”

 

“우린 바다에 떠 있군요.”

 

“그걸 누가 모릅니까! 여기가 어디냐는 거지요!”

 

“대표님, 전 제주 바다밖에 모릅니다. 여기가 거기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만.”

 

“병목현 이사는 어딨습니까?”

 

“오피스에 계신데요.”

 

“아니, 이 와중에도!”

 

각종 문서와 책이 갈 곳을 잃고 뒹구는 목현의 오피스는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병 선생,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아, 대표님. 마침 여쭤보려던 게 있었는데, 저번에 말씀드린 그 판례 말입니다.”

 

지한은 손을 휘저으며 나갔다.

 

탕비실에 모여 대책회의가 벌어졌다. 급선무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가,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거였다. 첫 번째 안건에 대한 용의자로는 대풍이 지목됐다. 다 날아가 버리라고 소리 지른 걸 모두가 들은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구루소 회계사가 피식했다.

 

“회사에서 세액도 미리 입금했을 거고, 전자신고에 문제 생기면 서면으로 신고하면 되는데. 아마 담당자가 세무조정계산서도 세무서에 제출했을 거예요.”

 

“진짜예요? 아니, 그걸 왜 이제 알려주세요?”

 

“안 물어봤잖아요?”

 

대풍은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회계사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몇 달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

 

“저기요, 이상한 냄새 안 나요?”

 

아까부터 콧등을 찡그리던 도도연이었다. 구린내의 주인공은 루소였다. 어느 호텔의 양복점에서 맞췄다는 잿빛 양복에 물이 흥건했다.

 

“아, 하하, 아까 일 보는데 변기물이 넘쳐서…….”

 

얼굴을 붉히며, 젖은 머리를 긁적인다.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미술학도 어머니를 둔, 자타가 공인하는 패셔니스타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와이셔츠며 구두며 유명 장인이 손수 제작한 것만 착용하는 그인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니.

 

“선생님, 이거라도 두르실래요?”

 

민선이 가져온 것은 딸기 무늬의 샛노란 무릎 담요였다. 루소의 성에 차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재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정말 고마워요, 민선 씨. 빨리 집에 가서 갈아입고 싶네요.”

 

“옷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배신주 회계사가 길쭉한 다리로 까치발을 하고 서서 캐비닛을 열고 닫으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까 정수기도 안 되고요, 수도도 당연히 안 나오고, 먹을 것도 없어요. 커피 믹스 한 통에 녹차 한 통? 각자 가진 걸 모아 볼까요?”

 

탕비실 테이블 위에 쌓인 것은 민선의 초코칩 쿠키, 목현의 멀티비타민, 도연의 껌이 다였다.

 

“말도 안 돼. 난 잘 먹어야 된다고. 애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데…….”

 

기율이 부른 배를 움켜쥐고 울상을 하다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경악했다.

 

“우리 한 달 안에 돌아갈 수 있는 거겠죠? 그래야 되는데, 진짜 그래야 되는데. 나, 예정일 한 달 밖에 안 남았단 말이야.”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그 전엔 가겠죠.”

 

“영양은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제가 실한 놈으로 잡아다가 회 쳐 드릴 테니까요.”

 

다운과 문성이 위로했지만 기율은 안도하지 못 했다.

 

“나 안 익힌 거 먹으면 안 되는데. 의사가 회 같은 거 먹지 말랬어요.”

 

“그러면 뭐…… 구워 먹죠.”

 

문성의 웃음은 속세를 초탈한 신선과도 같았다. 문제는 불 피울 수단이 없다는 거였다. 사무실에는 흡연자도 성냥도 라이터도 없었다. 화분에 장식으로 깔아놓은 조약돌을 부싯돌로 쓰자, 책상을 잘라 나무 조각을 문질러 불을 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뭘로 자르죠?”

 

“그러고 보니 톱도 없고 도끼도 없네요.”

 

“아, 나한테 캠핑용 나이프가 있어요. 회칼도 있지만 그건 좀 그렇고.”

 

문성이 가방을 뒤지자 지한이 나섰다.

 

“그마안! 그만! 지금 다들 뭐 하는 겁니까?”

 

“대표님, 이제 좀 있으면 점심이니까…….”

 

“밥 좀 늦게 먹는다고 죽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아녜요!”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 유난히 안달 난 모습이다.

 

“아니면 심 대표한테 연락할 방법이라도!”

 

다른 파트너인 심술란 대표는 국세청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느라 외근 나간 상태였다. 지금쯤 자기 지분이 50%나 되는 회계법인과 남편이 사라져버린 사실을 알고 혼이 나갔을 것이다.

 

문성이 낚싯대와 양동이를 들고 사라지고, 금안과 배기가 조약돌과 캠핑용 나이프로 불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그 옆에서 도연이 구시렁대며 지적질을 하는 동안, 대풍은 지한에게 잡혀 추궁을 당했다.

 

“조 선생,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예요. 조 선생이 바람을 일으키면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제가요? 어떻게요?”

 

“어떻게는, 조 선생이 사무실을 날려서 여기로 온 거잖아.”

 

“아녜요. 그냥 빡쳐, 아니 화가 나서 해 본 말인데…….”

 

“아버지가 구국영웅초인협회 회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전 아무 능력이 없어요.”

 

지한이 옆의 책상에서 티슈를 한 장 뽑았다. 안경 너머, 일자로 찢어진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자, 조 선생. 해 봐요. 바람을 일으켜 보라고.”

 

불어라, 불어라, 불어라. 티슈를 노려보며 애원했지만 1mm도 미동하지 않았다. 지한이 내뿜는 콧김이 더 강력해 보였다.

 

“그럼, 주기율 선생이 뭐라도 해 봐요! 심 대표한테 연락할 방법이든 서울로 돌아갈 방법이든 뭐든!”

 

“대, 대표님. 저는 화학과라니까요. 제가 배운 건 그런 쪽으로는 도움이…….”

 

“그럼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뭡니까!”

 

이공계 출신이면 맥가이버라도 되는 줄 아나. 평소에는 이공계라고 무시하던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기율은 기가 찼다.

 

“맹금안 샘, 공배기 샘.”

 

캠핑용 나이프로 번갈아가며 책상 모서리를 베던 두 사람이 동작을 멈췄다.

 

“그런 수고는 그만 해도 돼요.”

 

기율은 지한의 손에 들린 티슈를 낚아챘다. 손 위에서 티슈에 불이 붙고 이내 화르르 불길이 솟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 선생님도 초인이셨구나!”

 

“초인이라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예요. 연약한 티슈에 불똥을 일으키는 정도.”

 

기율은 지한더러 보란 듯 한 번 째려주고는, 불타는 티슈를 양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쓰레기통이 아궁이처럼 변해 혓바닥 같은 불꽃을 날름거리자, 싸늘한 사무실 공기가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그 동안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발화 능력이 있는 게 알려지면 성가셔지거든요. 방화범들이 같이 일하자고 따라붙기도 하고, 화재가 나면 제일 먼저 의심 받기도 하고.”

 

“허 참, 우리 법인에 초인이 이렇게 많았다니.”

 

허탈해하는 지한 앞에 대풍이 두 손을 저었다.

 

“대표님, 저는 아녜요. 보셨잖아요.”

 

“그럼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그건…….”

 

“됐고, 이렇게 된 거 숨기지 말고 각자 뭘 할 수 있는지 보고하세요, 당장!”

 
* * *
 

한국, 청와대. 이동식이 진심회계법인을 한국으로 공간이동 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한 뒤였다. 태평양에서 날아온 것은 삭을 대로 삭은 스티로폼 박스였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 사고가 발생하다니, 이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야당에서 손을 쓴 걸까요?”

 

“아닐 겁니다. 진지한 대표와 심술란 대표가 최충수 원내대표와 절친한 사이라고 하니까요.”

 

“심술란 대표가 직원들은 물론이고 사무실까지 인양해 와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국제금융타워에서도 고소한다는 입장이고요.”

 

“사고 당시 통화 파일 확보하고 이동식 씨한테 구상권 청구할 수 있는지 법적 근거 알아보세요. 현재 위치가 어디라고 했죠?”

 

“북위 38도 서경 145도입니다.”

 

“간단한데, 방금 이동식 씨가 실패한 이유가 뭡니까?”

 

“해류 때문에 위치가 변한 것 같다는군요.”

 

“그럼 초인을 그리로 보내야겠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그들이 살아있을까요? 벌써 물에 가라앉지 않았겠습니까?”

 

“사무실이 침몰돼 전원 익사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인양은 말도 안 됩니다. 인천 앞바다도 아니고 수심이 얼만데,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 겁니다.”

 

“그래도 시신은 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시신 찾으러 가는 사이에 이미 물고기 밥이 되고 남은 건 뼈밖에 없을 겁니다. 심해에 가라앉은 뼈를 무슨 수로 주워 올리겠습니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국민들의 비난이 엄청날 겁니다. 지지율도 떨어질 거고요.”

 

“시신을 인양하러 가는 모습은 보여줘야겠죠. 스토리는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 * *
 

바다와 하늘에 붉은 물감을 풀어 휘저은 것 같다. 태양을 삼키는 수평선이 아득하다. 비록 쓰레기에 둘러싸여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루의 끝과 밤의 시작이 교차하는 지점. 이 시각이 되면 영문 모를 서글픔과 함께 아련한 향수가 찾아온다. 문성이 저녁 낚시를 즐기는 이유다.

 

서쪽을 보고 있으니 오른쪽이 북쪽일 것이다. 남반구인지 북반구인지는 완전한 밤이 되면 알 수 있으리라.

 

“천 선생님, 많이 잡으셨어요?”

 

신주가 비상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살랑대는 해풍에 기다란 갈색머리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럭저럭요. 청어랑 정어리랑…….”

 

“웬 프라이팬이에요?”

 

“그것도 낚은 거예요. 잘 됐죠? 생선을 어떻게 구울까 싶었는데.”

 

“선생님, 되게 즐거워 보이세요.”

 

“그래요? 뭐, 어차피 이러려던 건데 장소만 바뀐 거니까요. 모든 낚시꾼들의 꿈이죠. 언제 또 이런 큰 바다에 와서 낚시해 보겠어요.”

 

문성은 황혼을 조명 삼아 생선을 손질했다.

 

“선생님, 회 뜨는 솜씨가 정말 예술인데요?”

 

“하하, 남자라면 칼 좀 다룰 줄 알아야죠.”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순간, 문성의 손목시계는 1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월말에 해가 7시가 넘도록 떠 있는 걸 고려하면 여기는 한국보다 6시간이 빠르거나 18시간이 느린 것이다. 위도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한 걸로 보아 열대도 아니고 극지방도 아니다.

 

“우린 지금 동쪽으로 와 있군요. 그렇다면 태평양일 거고요. 아시아보다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깝겠군요.”

 

“우와,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세요? 선생님도 초인이세요?”

 

“그럴 리가요. 지리시간에 배운 걸 써먹어 본 거예요. 갈까요?”

 

돌아서는 넓은 어깨가 그리도 듬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무실은 화로로 변신한 양철 쓰레기통이 뿜어내는 불빛 말고는 구석구석까지 캄캄했다. 한겨울의 노숙자처럼,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친 얼굴에 불꽃이 만든 음영이 어른거려 피로가 더 짙어보였다.

 

몇몇 회계사들의 초능력이 밝혀진 뒤였다. 공배기는 물질 배가(倍加) 능력, 맹금안은 속독 능력, 구루소는 물질 변환 능력, 정다운은 텔레파시 능력, 병목현은 물질 분리 능력이 있었다.

 

“분리 능력이요?”

 

“섞여 있는 두 물질을 분리시키는 거죠. 사실 내 머리에 낀 기름때를 떼어내는 것밖엔 해 본 적이 없지만.”

 

“아, 그래서 이사님이 집에 안 들어가셔도 머리가 뽀송뽀송하셨구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비상계단에서 머그잔으로 떠올린 바닷물이었다. 목현은 머그잔 위에 손바닥을 뚜껑처럼 덮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몇 분 뒤, 그의 손바닥에 누르스름한 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물속에서 분리된 각종 미네랄과 플랑크톤이었다.

 

“이야, 이거 처음 해 보는데 쉽지 않네.”

 

가뜩이나 깡마른 몸이 더 수척해졌다. 그는 비척거리며 오피스로 들어가, 축축한 서류 더미 위에 몸을 던지고 잠이 들었다.

 

“에게, 이걸 누구 코에 붙여? 사람이 몇인데.”

 

도도연이 혼잣말로 투덜댄다. 대풍이 속삭이며 나무랐다.

 

“야, 넌 이사님이 녹다운된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이번엔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공배기가 머그잔을 노려보며 눈알이 터져라 정신을 쏟았다. 모두들 한마음 한뜻으로 손에 땀을 쥐고 함께 노렸다. 언제부턴가 물이 컵 끝까지 차오르더니 가장자리를 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컵이 더 필요해! 얼른 모아 봅시다!”

 

배기가 기진맥진해 주저앉을 즈음, 머그잔 다섯 개 분량의 물이 더 생성됐다. 배기는 흰자위에 핏발이 가득 서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병목현 이사의 옆에 누이고 말았다. 옮기는데 여섯 명이 매달려야 했다.

 

회와 구운 생선으로 끼니를 때웠다. 연료는 문서고에서 가져온 오래된 세무조정계산서였다. 수저가 없으니 맨손으로 먹고, 밍밍해도 초고추장을 찾진 않았다. 도연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먹는 내내 말이 없었다. 디저트는 몇 모금의 물과 함께한 멀티비타민이었다. 남은 물 세 잔은 아침에 마시기로 했다.

 

지한의 관심이 이번에는 정다운에게 향했다. 텔레파시로 소방서나 경찰서에 구조를 요청하라는 거였다.

 

“저, 실은 여자 친구 말고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람을 못 찾아서요.”

 

“누구든 상관없잖아요. 어서 보내 봐요, 어서!”

 

“이렇게 멀리서 하면 잘 안 되는데…….”

 

지한이 눈을 홉뜬다. 다운은 재빨리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의식을 모았다.

 

‘소원아, 소원아, 문소원, 오빠야!’

 

‘…… 육시중…… 꼰대 새ㄲ……’

 

‘소원아, 오빠 지금 이상한 데로 날아왔어. 경찰에 신고 좀 해 줘!’

 

‘…… 야유회…… 벼락 맞을……’

 

이 사태에 대해 아직도 못 들은 모양이다. 거리가 멀어 신호도 잘 잡히지 않았다. 지한은 잠시 목덜미를 부여잡더니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며, 모두에게 일단 잘 것을 명했다.

 

사무실이 급속도로 싸늘해지고 있었다. 종이를 태우는 것으로는 공간 전체를 데울 수가 없는 데다 연기까지 가득하니 자다가 질식해 죽을지도 몰랐다. 의논 끝에, 문서고의 오래된 문서들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자는 동안에는 불을 끄기로 했다.

 

좍좍 종이 찢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지지직 테이프 뜯는 소리, 딸깍딸깍 스테이플러 찍는 소리,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지나간 후에 꽤 포근한 이불이 완성됐다.

 

한국으로 치면 아직 오후. 석 달 내내 야근에 시달린 그들은 이른 단잠을 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양한 곳이 침실이 되었다. 오피스, 회의실, 문서고, 책상 위, 의자…….

 

문성은 낚시 후 캠핑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준비해온 침낭을 갖고 옥상에 올라가 누웠다. 자다 말고 눈을 떠 밤하늘을 확인했다. 북쪽 하늘에 북두칠성이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북극성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북반구가 틀림없었다.

 
* * *
 

<진심회계법인, 사무실 째 태평양으로 날아가> 모든 언론사의 헤드라인이었다. 퇴근 시간 만원 전철 안, 문소원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책본부의 브리핑을 전달하는 기사들은 전원 익사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소원은 눈을 감고 텔레파시를 시도했다.

 

‘오빠, 오빠. 나야, 소원이. 내 말 들려?’

 

아무 대답이 없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끝 모를 절망이 덮쳐왔다. 종이 한 장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사람으로 꽉 찬 전철 안에서 혼자만 차갑게 얼어붙는 섬이 된 것 같았다.

 

‘안 돼, 날 두고 가지마! 오빠, 오빠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가 너무도 우렁차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소원은 접속을 차단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맹금안의 형 맹심안은 마음의 눈을 통해 동생과 연결돼 금안의 눈으로 보는 중이었다. 금안은 사람들과 헤어져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곳으로 들어갔다. 곧 켜지는 스마트폰 화면 불빛에 그곳이 책장이 줄지어 서 있는 문서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은 한쪽 구석에 누워, 서류를 이어 만든 이불을 덮고 있었다. 잠시 뒤 스마트폰이 꺼졌다. 동생은 살아있었다. 심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늦은 저녁 한 종합병원의 1인실, 눈앞에 보이는 병실 천장이 하얗다. 심술란은 그것이 제 머릿속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말끔하게 정장을 빼 입은 남자가 면회를 왔다. 큰손의 비서였다.

 

“우려가 크십니다. 가뜩이나 파리가 꼬여 귀찮아지고 있었는데,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될지 설상가상이 될지 모르겠다고 하시는군요.”

 

“도와주십시오. 전화위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일단 모두 다 구해 와야지요.”

 

남편인 지한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특히나 수장되길 바라지 않는 것들은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 줄 이면계약서들과, 검은 거래에 사용된 계좌들, 증빙들이었다. 이미 고객들로부터 우려 섞인 문의와 항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그 분께서는 생각이 다릅니다만.”

 

“네에? 안 돼요, 절대로 안 됩니다. 저희한테는 다른 고객도 있어요.”

 

“잊지 마십시오. 우린 한 배를 탄 운명이란 것을.”

 

비서는 병실을 나서며 예감했다. 큰손은 가라앉는 배를 버리고 새 배로 갈아타리라.

 

아들에게 왜 바람 조절 능력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조대풍의 아버지 조풍호는 후회가 막심했다. 등록된 초인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지만, 생계를 내팽개치고 나라의 부름에 응하면 이용만 당한다. 수고비는 바라지도 않지만 혹시라도 일어나는 부상이나 재물 손괴에 대해 나라가 전혀 보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초인으로 등록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들이 가진 능력을 보고서도 언급도 않고 훈련도 시키지 않은 것이다.

 

구루소의 어머니 송레나(Léna)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물질 변환 능력을 아들이 반의반도 물려받지 못 한 점을 다행으로 여겨 왔으나, 생애 최초로 그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루소가 새로 변해 날아오거나 물고기로 변해 헤엄쳐 올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왕년의 송레나였다면 돌고래로 변신해 아들을 구출하러 갔을 터였다. 이제 그녀는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도 고되다. 채 일본도 지나기 전에 세상을 뜰 수도 있었다.

 

서울에 있든 태평양으로 날아갔든 집에 안 들어오는 건 똑같지 않나. 병목현의 아내 석가희는 태연했다. 이혼을 결심한 상태였기에, 위자료와 생명보험금을 저울질하며 잠들었다.

 

<N극이 S극에 끌리듯, 아내와 저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렸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이온결합 그 자체였습니다. 서로를 갈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양이온과 음이온의 만남, 그것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이온결합을 넘어선 핵융합이 일어나 사랑스러운 딸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불가해한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는 강제로 이온화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태평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는 매우 괴롭고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이대로는 1 피코세컨드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동식 씨, 이 글을 보신다면 제발 절 태평양으로 보내주십시오.>

 

주기율의 남편 이온결이 SNS에 올린 글이었다.

 
* * *
 

얇은 블라인드로는 가릴 수 없는 강렬한 햇살이 사무실 곳곳을 파고든다. 새벽 다섯 시에 강제기상 당한 사람들은 물 세 잔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목현과 배기는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못 한 상황이었다.

 

“누굽니까, 소중한 물을 혼자 다 마셔버린 사람이!”

 

지한의 성난 눈초리가 한 명 한 명을 쏘아봤다. 송곳 같은 눈길이 멈춘 곳은 도도연의 얼굴이었다.

 

“도 선생, 세수했어요?”

 

머리카락이 젖은 데다 새로 한 화장이 산뜻했다.

 

“아, 아니, 너무 찝찝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바닷물로 씻을 순 없잖아요. 화장을 깨끗이 안 지우면, 피부에 트러블이 생긴단 말예요.”

 

우물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이렇게 뻔뻔할 수가, 지한이 버럭 꾸짖으려는데, 기율과 신주와 민선이 먼저 나서서 도연을 타박했다. 도연은 기죽지 않았다.

 

“다들 왜 이러세요? 물이야 더 만들면 되잖아요.”

 

염치없는 항변에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오늘 아침은 돔이 풍년입니다!”

 

생선이 가득한 양동이를 들고 문성이 내려왔다. 꼭두새벽부터 동료들을 먹여 살리려 애쓴 점은 고마웠지만, 사람들은 어제와 같은 음식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구루소 선생, 선생이 가진 능력으로 뭘 변환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주 사소한 것밖엔…… 예를 들면 종이로 접은 참새를 진짜 참새로 바꾼다던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들 ‘참새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선이 제 자리로 가서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가져왔다. 작은 색종이로 접은 딸기가 한가득했다.

 

“구 선생님, 이건 어때요? 제가 심심할 때마다 접은 거예요.”

 

지한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심심? 노민선 씨, 회사에서 종이나 접고 놀면서 그렇게 꼬박꼬박 월급 받아갔습니까?”

 

“아, 저기, 대표님, 그런 게 아니라, 점심 먹고 쉴 때 접은 건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지만 그녀는 총무, 재무, 인사, 대표들의 비서 업무까지 일인 다역을 하고 있었다. 회계사들은 하나같이 진심회계법인 입사 후 지한에게서 받은 질문을 떠올렸다.

 

“○○○ 선생, 회사 다니는 거 재밌습니까?”

 

“네, 재밌습니다.” (재미없지만 예의상 하는 대답이다.)

 

“재밌으면 안 되는데?”

 

“……네?”

 

“회사는 일하는 데지 놀이터가 아니거든?

 

모두 그 때의 기억으로 씁쓸해하는데 루소가 얼른 나섰다.

 

“이리 줘 봐요, 민선 씨. 이런 걸 해 본 적은 없는데, 오늘 한 번 해 볼게요.”

 

산딸기라고 보아도 좋을 앙증맞은 종이 딸기가 루소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다들 군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사이, 종이 딸기는 어느새 진짜 딸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환호성이 터졌다. 문제는 하나뿐인 딸기를 누가 먹느냐였다.

 

“대표님이 먼저 드셔야죠.”

 

누군가의 말에 지한이 지체 없이 딸기를 집어 들려는 순간, “잠시만요.” 하고 신주가 막았다. 다른 이들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행동이다. 지한 역시 자신을 막은 것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눈을 부라렸겠지만, 편애하는 부하직원이 한 짓이기에 얌전히 손을 거뒀다.

 

“주 선생님이 임산부잖아요. 주 선생님 드려야 되는 거 아녜요?”

 

기율은 손사래를 쳤다.

 

“민선 씨 건데, 민선 씨한테 우선권이 있죠.”

 

민선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구 선생님이 드셔야 해요. 어제 이사님이랑 공 선생님도 물을 만들기만 하시고는 한 모금도 못 드셨잖아요.”

 

딸기를 루소의 입에 직접 넣어준다. 루소는 반달모양 입으로 웃으며 민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고마워요, 민선 씨. 정말 맛있네요. 민선 씨 손맛이 들어가서 그런가?”

 

“에이, 구 선생님 손맛이죠.”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화기애애함에 기율은 새삼스레 입덧을 느꼈고 다른 사람들은 어제 먹은 청어회가 올라오는 걸 참아야 했다.

 

구루소는 혼신의 힘으로 딸기를 만들었다. 스무 개 정도 만들었을 때, 백옥 같은 얼굴이 납빛이 돼 버리고, 배기의 옆에 뉘였다.

 

기율이 무릎을 탁 친다. 물을 더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단다. 그녀는 문성에게 냄비를 낚아 바닷물을 받아 달라 부탁한 다음, 양철 쓰레기통에 세무조정계산서를 찢어 넣고 불을 피웠다. 문성은 금안을 옥상으로 데려갔다.

 

“맹금안 샘, 시력 좋죠? 어디 냄비 있나 찾아볼래요?”

 

홍채가 호박색으로 빛나며, 금안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레이저 같은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저 멀리 마네킹 발 옆이었다. 낚싯줄이 공중을 가로지르고 세 번의 시도 끝에 냄비 손잡이가 바늘에 걸려 올라왔다.

 

기율은 냄비에 담은 물을 팔팔 끓이고 위에 프라이팬을 뒤집어엎었다. 그 상태로 창가로 옮겨 기다리자 프라이팬에 물이 맺혔다. 오전 내내 반복하니 각자 반 모금씩 마실 정도의 물이 나왔다.

 

세수와 샤워는 물티슈로, 양치질은 껌으로 해결했다. 민선은 딸기를 접어댔고, 문성, 목현, 배기, 기율, 루소는 각자의 능력을 활용해 먹을 것, 마실 것, 물티슈, 껌을 만들어냈다.

 

금안, 대풍, 도연, 다운, 신주에게는 바닷물을 퍼 올리는 임무가 주어졌다. 변기 수통을 채우기 위한 물이었다. 작업 자체는 간단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이 뻥 뚫린 상태라, 그 곳에 둥둥 뜬 페트병을 건져 주둥이를 자르고 물을 담아 나르기만 하면 됐다.

 

“아오, 못 해 먹겠다. 내가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CPA가 됐나 하는 자괴감이 드네요.”

 

도도연이 아우성친다. 말만 안 했지 다들 동일한 심정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음식을 구하고 배변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라니. 먹는 거야 생존과 직결되니 차치하더라도 싸는 문제로 이렇게까지 힘을 써야 하는가. 하지만 문명의 노예가 된 그들은 변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큰일을 본 뒤에만 물을 내리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화장실에서 뿜어져 나온 악취가 사무실까지 점령하는 데에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악취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물티슈로 몸을 닦고 껌을 씹어도 머리를 감거나 빨래는 할 수 없는지라, 대부분의 악취는 머리와 옷에서 나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질 않았고, 자연스레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다.

 

배기와 루소의 능력으로는 새 옷을 만들 수가 없었다. 식수, 영양제, 초코칩 쿠키, 껌의 양을 늘리고 딸기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런 고로, 화장지 양을 늘린다거나 세무조정계산서를 화장지로 바꾼다거나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 했다. 화장실에는 화장지 용도로 세무조정계산서와 조서가 비치됐다.

 

서류는 속옷으로도 쓰였다. 각자 본인 속옷을 재단하고 재봉(?)하는 게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루소는 볼펜으로 패턴을 그려 넣기도 하고, 사무실을 띄우고 딸기를 접느라 바쁜 민선의 속옷까지 만들어주는 성의를 잊지 않았다.

 

“기저귀 차는 기분이에요.”

 

“놀라워요, 종이의 쓰임새가 이렇게 많다니.”

 

목현은 온 힘을 다해 물을 정화하고 있었다. 본연의 업무가 의미를 잃은 지금, 해수담수화에 목숨을 바친 사람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어서, 바닷물에서 미네랄과 플랑크톤을 분리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몸에서 물을 짜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목현이 파김치가 되어 숨만 쉬고 있으니, 문성이 바람이나 쐬자며 그를 업고 옥상에 올랐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본 목현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뼈 위에 살갗만 한 꺼풀 덮인 사람 같았다.

 

“이사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이러다 한국 가기도 전에 돌아가시겠어요.”

 

“괜찮아요. 난 나를 믿어요.”

 

“당장이라도 쓰러지실 것 같아요. 이런 상태로 어떻게 더 버티시려고요.”

 

“버티는 건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버티는 겁니다. 나약한 정신으로는 파트너가 될 수 없어요.”

 

모두 아는 사실이다. 병목현 이사가 회사에 헌신하는 이유는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임을. 파트너란 회사에 지분을 출자한 주주이므로, 두 대표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사님, 개업할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문 선생도 알잖아요, 내가 판례나 조문엔 빠삭해도 영업력은 떨어지는 거. 술도 못 먹고 골프도 못 치고 서울에 인맥도 없죠. 지방대 출신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건 다 진 대표님 덕분이에요. 저한테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시죠.”

 

목현이 지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문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마 목현도 알 것이다. 애써 자신을 기만하고 있을 뿐.

 
* * *
 

한국, 정부의 안일한 안전의식이 도마에 올랐다. 야심한 시각에 방송된 시사 토크쇼.

 

– 정부가 재난 대책이며 초인 관리에 신경도 안 쓰면서 일만 터지면 초인들한테 의존하는 게 문제입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고 하던데요.

 

– 새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이동식 씨가 공간이동 능력을 쓰기 전에 이미 그 일대에서 초능력 사용이 감지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등록된 초인의 에너지였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화재와 강풍이 그 미등록된 초인이 일으킨 것이라는 얘긴가요?

 

–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초인‘들’일 가능성도 있고요.

 

– 미등록 초인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 막을 방법이 없을까요?

 

– 그 대책으로 ‘초인의 등록과 관리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계류 중이죠.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 국민을 전수 조사해 초인 등록을 강제해야 한다는 법안이죠? 지금은 자율에 맡기고 있는데요. 정말 필요한 법안이라고 봅니다. 이번 일만 해도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잖습니까?

 

그 다음 주제는 최근 들어 의혹이 제기되는 어느 유명 인사들의 세금 탈루 정황이었다.

 

–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이건 시쳇말로 대박이 되는 겁니다.

 

– 총선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겠죠.

 

– 저는 조심스럽게 탄핵까지도 점쳐 보겠습니다.

 
* * *
 

찌릿, 눈빛에 티슈가 살랑댄다. 옳거니 하는 추임새가 옆에서 터져 나온다. 대풍은 내친 김에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날려봤다. 지한은 희색이 만면했다.

 

“점점 발전하고 있군요. 그것 봐요. 역시 조 선생 짓이라니까.”

 

“대표님, 저 억울해요. 겨우 종이 몇 장 날리는 걸로 어떻게 사무실을 통째로 날려요.”

 

“차에 깔린 자식을 구하려고 차를 번쩍 들어 올린 애 엄마 얘기 못 들어봤습니까? 조 선생도 그런 거였을 거야. 그러니 볼멘소리 집어치우고 각성하라고요. 민선 씨 하는 거 봤죠? 그나저나 정다운 선생, 새로운 소식은 없습니까?”

 

다운은 틈 날 때마다 소원과 텔레파시를 시도했지만,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단어들 속에서 유의미하게 들리는 거라곤 ‘대책,’, ‘빌어먹을’이 전부였다.

 

한쪽에서는 블라인드로 돛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거기에 블라인드 줄을 연결하고 옥상에 매달아 바람을 타고 항해할 계획이었다. 민선의 염력으로는 사무실을 물 위에 띄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문성의 추측대로 이곳이 북반구의 태평양이라면, 동쪽으로 계속 가면 미국에 도착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일단 육지에 올라서면 그 다음엔 어떻게든 될 터였다.

 

문성은 낚시하는 내내 바람의 방향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틈틈이 바다에 뛰어들어 페트병과 스티로폼 박스와 노끈 같은 것들을 모으기도 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신주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의자 바퀴로 만든 도르래를 통해 페트병이 한 자루 올라오고, 바다에서 건진 노끈으로 엮은 줄사다리를 디디고 문성이 올라왔다. 구릿빛 근육이 막 잡은 물고기처럼 불끈거리고, 매끈한 피부에 물방울이 맺혀 영롱한 빛을 반사했다.

 

“선생님, 안 추우세요?”

 

“시원하고 좋기만 하네요.”

 

“이거 왜 이렇게 모으시는 거예요?”

 

“뗏목이나 구명조끼를 만들어 볼까 싶어서요. 이 콘크리트가 아무리 튼튼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민선 씨 혼자 이걸 띄우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요.”

 

“선생님, 저 오늘도 감동 받았어요. 우리 살아 돌아가면 전부 선생님 덕이에요.”

 

“에이, 그게 왜 다 내 덕이에요? 우리 모두 뭔가를 하고 있잖아요.”

 

거뭇한 수염 사이로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는다. 다들 이가 하얘지고 있었다. 기율의 말로는 매일 딸기를 먹어서 그렇단다.

 

모두 뭔가를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신주는 이 공동체에서 본인이 기여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눈칫밥 먹는 기분이었다. 초인들은 각자의 능력으로 동료들의 생존에 한 몫 하고 있었다. 리더인 지한과,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문성을 제외하면 신주와 도연이 남는다. 언젠가 신주는 도연에게 이런 속내를 비친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 꼭 뭘 잘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어요. 저보고 존재 자체가 복이래요. 그리고 우리가 왜 하는 게 없어요? 변기 물 퍼 나르고 있잖아요. 우리가 없어 봐요. 저 세 사람이 언제 물통을 다 채우겠어요.”

 

처음으로 도연이 부러워졌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해 줬으면, 엄마가 언니를 볼 때와 같은 눈빛으로 신주를 봐 줬으면, ‘그런 짓’까진 안 하고 살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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