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해소법

스트레스 해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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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Stress)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신체적 긴장 상태.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심장병, 위궤양, 고혈압 따위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면증, 노이로제, 우울증 따위의 심리적 부적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긴장’, ‘불안’, ‘짜증’으로 순화.

*

내가 근무하는 곳은 대형 마트 안 인테리어 전문 매장이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도 이렇게 꾸준히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소심한 성격에 고객에 대응 판매를 하는 서비스 업종에서 버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써 2년 째. 한 곳에서 오래 자리 잡으려는 습관 때문일까. 고비를 넘기면 그나마 적응한다고, 초반에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던 건 감정적 부분들을 배재한 내 그 소심한 부분의 역할이 컸다. 아주 아이러니한 일이다.

매장을 찾는 대부분의 고객은 주로 주부들이었다. 갓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새댁부터, 손자들도 훌쩍 장성했을 희누르스름한 머리를 꼬아 올린 할머님들까지 가지각색이다.

초기에는 그들 각각이 내뱉는 질문 공세가 두려워서, 피하자 싶은 고객으로 보이면 자리를 뜨고는 했었다. 슬그머니 사라지려다가 결국 몇 걸음을 채 떼지 못하고 붙잡히고는 했지만.

사실, 2년이 지나면서부터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긴 했다. 피곤하다거나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거는 각오했기에 버틸 수 있어도, 정신적 문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가난하고 내세울 거 하나 없어도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진열대 걸린 상품 마냥 취급하는 꼴들을 보니, 아무리 나라도 속 깊숙한 곳부터 배알은 꼬이기 마련이다.

“문의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그 상품의 가격은 12,900원입니다.”

이런 기계적인 말투에 익숙해진 지도 오래, 그렇기에 그들이 더욱 우리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틀어질 대로 틀어지는 셔츠를 보라. 옛말 하나 틀린 것 없다.

“너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냐?”

준영이 슬쩍 곁에 붙어 말을 걸었다. 준영은 나와 같이 근무하는 동료다. 그는 내 옆자리에서 생활용품과 전기부속품 등을 팔았다. 나는 그가 싫었지만,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말은 트고 지냈다. 근무 평가는 좋지 않지만 타고난 처세술로 지금까지 버텨온 나름 대단한 놈이다.

“벌어 놓은 건 좀 있냐? 야, 무턱대고 그만두면 되겠냐?”

“좀 작게 말해. 다른 사람 들을라…….”

“지랄. 그만두는 마당에 여전히 소심하게 갈 거냐? 나 같으면 이 재수 없는 새끼들 죽빵 한 대씩 날리고 튀겠구먼.”

내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어깨를 으쓱했지만, 눈치를 못 채고 여전히 침을 튀겨가며 입술을 실룩인다.

“약하게 가면 안 돼. 우리가 참은 게 얼마냐. 특히나 너, 요전번에도 아주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걸려서 점장한테까지 욕먹었잖아. 뭐 물론 그 쓰레기가 보는 앞이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무슨 배웅 인사 안했다고 점장 나오라고 소리치는 시추에이션은 뭔데?”

“좀 작게 말해. 누가 듣는다니까…….”

“듣긴 누가 들어. 시파 들으라지. 여기 오는 사람들은 딱 입구에 들어서면서 마인드가 변한다고. 나는 왕이다, 이렇게.”

“준영아, 그만 하자. 나 없는 물건 좀 챙겨 올게.”

끝나지를 않는다. 듣기 싫어 창고로 향했다. 아직 오전 중이라 고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다.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꿀 같은 한 시간. 창고에서 살짝 시간을 보내다가 매장에 들어와 마무리 후 식당에 올라가면 된다.

철제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에워싸며 덮쳐온다. 내내 실내에서 뜨거운 공기만 먹고 있던 피부가, 찬 공기에 놀랐는지 얼굴이 얼얼해진다. 뺨을 몇 번 어루만지며 물건이 쌓인 적재 공간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박스들이 보였다. 하나를 잡고 끌어와 위에 앉았다. 담배를 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화재예방이라 이곳에서 담배를 태우면 바로 모가지다. 후유. 한숨을 쉬고 멍 하니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뭐랄까, 최근 들어 극심히 겪는 이 스트레스에 두통이 말이 아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스꺼워 식사마다 곤욕을 치른다. 뭘 먹기만 하면 속이 뒤틀리고, 퇴근시간까지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정말 최악의 기분이다.

어지러이 놓여 있는 제품 박스들이 서로 겹쳐 보였다. 일부러 눈을 가운데로 모아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잔상이 보이는 그런 현상은 극심한 피로감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안다고.’

이것이 위험하다는 경고성 알람인 걸 이미 느끼고는 있다. 하지만 생계수단이 어디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2년의 경력을 쉽사리 버리기란 어려운 일인지라,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식사는 12시부터였으니, 슬슬 들어가 매장을 지키고 있으면 되었다. 너무 창고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농땡이를 피우는 줄 알고 추가 근무를 시킬 수도 있다.

물건을 채우려 봐 두었던 작은 전구 박스 하나를 들고 출구로 향했다. 지나가는 다른 근무 직원들이 길을 비켜 준다. 그들도 하나같이, 나와 같은 멍한 표정들이다.

“야.”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돌아보니 거구의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아는 사람이었나 하고 머리를 굴렸다.

“야.”

갑자기 반말을 해서 나를 아나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 네.”

어리둥절해하며 무심코 대답했다. 사내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손에는 커다란 수박 하나를 들고 있다. 우물쭈물 하는 내게 갑자기 그가 수박을 코앞에 쑥 들이밀었다.

“이거 뭐야.”

“네?”

“안 보여? 여기 안 보여?”

“아, 잠시 만요.”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얼른 주위를 살폈다. 인테리어 직원이 농산 쪽을 알 리가 없다. 모두 쉬러 간 모양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최소 인원은 남겨두고 가는 것이 규칙이지만, 고객 수가 그리 많지 않을 땐 보통은 눈치를 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녀오곤 한다. 연락책으로 무전기가 있지만 지금 소지하고 있지 않았기에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단지 가격 확인뿐이길 하고 빌며 공손히 대답했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보라고!”

사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주위에서 물건을 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놀람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시선이 즉시 그가 내미는 수박으로 향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검은 줄에 녹색 바탕에 동그란 게 알차 보이는데. 뭐가 문제기에 소리를 지르는 거야.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다지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이런 시팔! 눈까리가 뼜나. 너 등신이야? 야 이 새끼야. 여기 잘 봐봐. 눈알 쳐내밀고 잘 들여 보란 말이야.”

“아, 네.”

그가 시키는 대로 다시 자세히 수박을 살펴보았다.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실금 하나로?

“저기……. 금이 살짝 간 것 말인가요?”

“살짝 갔다고? 야 이 새끼야. 내가 이것 때문에 마누라한테 욕을 들어 처먹어야 하냐? 너는 네 여편네가 너한테 바가지 안 긁어? 니미 시팔. 수박 사오래서 사갔더니, 이런 병신 같은 걸 사오냐고 지랄하고. 교환하러 다시 이리로 오다가 접촉 사고 날 뻔하고, 주차 직원도 병신 같은 새끼라 한참 헤매고. 내가 이 시팔 수박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해야겠냐고!”

남자가 갑자기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따위 걸 돈 받고 팔아?”

남자가 수박을 던져버렸다. 바닥에 퍽 하고 부서지는 수박 파편을 피해 몇 몇 사람들이 서둘러 피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그가 몸을 팩 돌리더니 옆에 있는 쇼핑 카트를 발로 걷어찼다. 카트가 촤악 앞으로 밀려간다.

“점장 나오라 그래!”

역시. 이들의 마지막은 가장 윗선을 찾아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직원일 뿐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사내는 지금 너무 화가 나 대화가 불가능 했다. 얼른 허리를 굽히고, 눈을 흘겨 농산 쪽 직원을 찾았다. 이 자식들은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어이.”

그가 숙인 내 뒤통수에다가 말을 내려치듯 뱉는다.

“내 말 안 들려?”

“아, 고객님. 일단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전했다. 대상이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는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의 확인에 잠시 긴장을 풀게 된다. 그 틈을 타고 변명이든 거짓말이든 해야 한다는 걸 다년간의 노하우로 잘 알고 있던 나였다.

“저는 인테리어 매장을 맡고 있는 직원입니다. 지금 문의하시는 농산품을 맡고 있는 직원 분은 지금 자리에 없으니 제가 찾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나랑 지금 장난하는 거야?”

사내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간다. 극도로 분노가 차오를 때 내는 표현이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우연히 당신 눈앞에 나타난 게 죄라면 죄라고.

“그게 아니라…….”

그때 헐레벌떡 누군가가 뛰어 왔다. 복장을 보니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게 농산 쪽 직원인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 상황을 당장 인계하기 위해 몸을 돌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분이 구매하셨던 수박에 문제가 있어서 지금 몹시 화가 나신 상태거든요. 수박에 금이 가 있는 걸 집에서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많이 화가 나시고 그래서 홧김에 저기 던져서 깨졌고요. 금은 제가 봤으니 문제가 있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지금 담당 직원 말고도 윗분을 찾으시니까 잘 응대해 주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속사포처럼 빠르게 설명한 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했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재수 없게 시리. 짜증이 이는 걸 억지로 참으려니 속이 아팠다. 굳어지는 인상은 어찌할 수 없어 살짝 고개를 숙였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우리 서비스업 직원들에게는 감점의 요인이 된다.

“이제야 오냐.”

어느새 또 준영이 다가와 슬금슬금 말을 건넨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쑤셨다. 이 일을 그만두려고 생각한 큰 이유가 바로 이 두통이었다. 약사나 병원이나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직업적인 스트레스가 그 원인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취미나 방법을 찾아보세요.”

빌어먹을.

망할 놈의 취미란 취미는 다 해봤다. 내 능력 한도의 범위 내에서. 스포츠, 경마, 영화 몰아보기에 집에 쌓인 책만 수십 권이 넘는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해질 뿐이었다. 풀려고 봤자 쌓이고 쌓이는 일이 반복된다면 그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 뿐이다. 내가 이 직업을 때려치우지 않는 이상은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얘기다.

“뭔 일 있었냐? 똥 씹은 표정이네.”

“괜찮아. 그냥 머리가 좀…….”

“뭐 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아까 농산 쪽에 사람들 좀 몰려 있던데 가봤냐? 뭔 일 있었다니?”

방금 전 일을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두통이 심해지니 서 있기도 힘들었다.

“어떤 새끼가 또 지랄하던데. 누가 걸렸는지 열라 불쌍하다. 아 진짜 나도 너처럼 얼른 이 직장 때려치워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나야 그렇다 쳐도, 너는 조금만 버티면 담당급으로 진급되지 않냐. 연봉이 삼백은 오를 텐데 조금만 더 버티는 게 어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너 너무 답답한 거 알아?”

거기까지만.

참을 수 없어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준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내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 머리 깨질 것 같아. 말하기도 힘들다.”

“뭔 놈의 두통이 말도 못하게 심하냐. 원인이 뭐야, 감기몸살이라도 있냐?”

‘너! 너! 너! 조금만 조용히 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화를 억누르고 그냥 그대로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준영이 뒤에서 불렀지만 무시했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뭐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는데 내뱉지를 못하는 느낌이다. 질식할 것 같았다. 수심 천 미터는 더 깊게 가라앉아 발버둥을 치고 있는 기분. 그물에 머리가 걸려 물 밖으로 걸려 나가는 생선대가리가 된 기분.

직원 조끼를 착용한 채 그냥 출구를 나섰다. 담배라도 물어야 좀 안정될 것 같았다. 불을 붙이려다 조끼를 벗어야 한다는 규정이 떠올라, 벗어 접어 옆구리에 끼고 근처 의자에 앉았다.

치익.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가 묘한 곡선을 그리며 흩어진다.

후우. 콧구멍으로 내리쏟는 이 뿌연 구름은 화장터를 맴도는 썩은 공기 같기도 하다.

“엄성식 씨.”

“!”

화들짝 놀라 담배를 비벼 껐다. 고개를 돌려보니 인사 담당자인 김 과장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외부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인 것 같았다. 사실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지만, 습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눈을 피했다.

“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일단 조끼를 벗는 다는 규정은 지켰으니까요. 그렇지만 고객들이 오고가는 출구 앞에서, 그렇게 다 보이도록 조끼를 옆에 끼고 담배를 피운다는 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죠?”

“네…….”

“우리는 서비스업입니다. 서비스가 최고로 중요한 직업이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휴게실에서 피우도록 하세요.”

“죄송합니다…….”

일진이 안 좋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허겁지겁 매장으로 들어서며 몸조심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날은, 꼭 무언가 사고가 터진다.

*

불길한 예측은 보통 대부분 들어맞는다. 점심 식사부터 내 예감은 적중했다. 식당에서 배식을 기다리는 두 줄 중에, 내가 기다리고 있던 쪽의 반찬이 동난 것이다. 직원이 많은 관계로 식당은 식사를 두 줄로 나누어 공급했다. 반찬이 없다는 데 꼼짝없이 밥만 꾸역꾸역 집어넣는 수밖에 없었다.

“좆도 시팔. 이 병신 같은 식당은 허구한 날 반찬 부족하대. 돈은 어디다 쓰는 거야? 시팔 놈들. 이러면서 남겨 챙기는 거 아냐? 지 집구석에 갖다 짱 박아놓고 애새끼들 존 나게 처먹고 있겠지. 아 미치겠네. 공짜 밥도 아니고 내 돈 내고 내가 먹는데 왜 만날 밥만 쳐 넣어야 하는 거야.”

“좀 조용히 해라. 들릴라.”

내가 낮 춰 말했지만 준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밥풀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구더기처럼 꿈틀거렸다.

“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엿 먹을 놈들. 내가, 우음, 오늘 반찬이 제육볶음인 걸 알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우음, 야 그거 안 먹냐?”

“너 먹어.”

“좀 씹고, 우음, 니미 암튼 우리가 소냐? 채소만 처먹이게.”

밥은 다 삼키고 말하지 그래. 이번에도 그냥 화를 삭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말해 봤자 듣지도 않는 놈이니까.

불만은 나도 많았다. 단지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일을 그만둔다고 말한 것도 준영만 알고 있었다. 사실, 그만 둘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참아라. 버텨라. 말은 쉽게 나오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진급이 되면 두통이 좀 나아지려나. 오직 그것 하나만 믿고 지탱해 낼 뿐이었다.

잔반이 반이나 남았지만 그대로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조금이나마 더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쳐다보는 준영에게 간단히 쉰다고 말을 한 후, 잔반을 버리고 얼른 휴게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직원들이 북적이는 좁은 휴게실은 쪼그리고 앉을 자리도 없어서, 항상 그랬듯 라커룸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는 수밖에 없었다.

“바닥 안 차냐?”

소파 위에 앉아 있던 남일 형이 안쓰럽게 물었다.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는 남일 형은 사람이 좋아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쓴 웃음으로 답했다.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직원들이 한마디 씩 내던진다.

“그렇게 휴게실을 넓혀달라고 해도 들어 처먹어야지.”

“대가리에 돈만 들은 놈들이 그런 생각이나 하겠어?”

“직원 알기를 똥으로 알아.”

분노가 섞인 말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이들도 하나같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한이 깃든 유령들의 수군거림 같아서, 그들의 얼굴이 보기 싫어 라커룸과 휴게실을 연결하는 문을 닫아버렸다. 수십의 살기어린 눈빛이 번뜩이는 장면은 내게는 부담이 너무 컸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냉기가 등을 쑤시며 파고든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누웠다. 잘못하면 입이 돌아갈 판이다. 얼굴 밑으로 팔을 낀 채 눈을 감았다. 30분은 잘 수 있나?

“덜컹.”

갑자기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바라보는 내 눈에 준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너 내려오래.”

“뭐?”

“드릴 고장. 완전 미친년 하나 와서 생지랄이야. 장난 아냐. 난리 났어. 얼른 내려가 봐.”

“아, 진짜…….”

두통이 다시 몰려온다.

“점심시간이잖아.”

“아 몰라. 네가 맡은 구역이잖아. 담당 직원 오라는데 그럼 어떡해. 재수 없게 이 대리가 지나가다 그년한테 딱 걸렸나 봐. 이 대리 새끼 의류 쪽인데 개뿔 드릴을 알기냐 하냐? 자기는 담당이 아니라서 모른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년이 들은 척도 안 하나 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인간들 왜 그렇게 개념 없냐? 담당 직원 아니면 당연히 모르지. 무슨 시팔 수백 가지 상품의 특성이랑 그런 걸 다 기억해야 돼? 우리가 컴퓨터냐? 좆나 그렇게 똑똑하면 여기서 이 짓거리 쳐 하고 있겠냐? 서울대 갔지.”

쉴 새 없이 떠드는 그의 목소리가 앵앵거리는 모기 날갯짓 소리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몸을 일으켰다.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바닥에 깔았던 돗자리를 접으려 하자 준영이 냉큼 드러누웠다.

“놔 둬. 피곤한데 잠 좀 자야지.”

얄미운 새끼. 누워 있는 그놈의 머리통을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확 일어났지만, 그냥 참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남일 형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고객 클레임이래요.”

억울한 말투로 내가 대답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는 몇 사람들을 뒤로 하고, 휴게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두통이 관자놀이를 송곳처럼 쑤셔댔다. 손바닥을 펴 몇 번 툭 쳐봤지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준영은 왜 그렇게 쉴 새 없이 욕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쟁이 새끼. 하는 말마다 욕이 감초야 감초. 어느 편으로는 그런 그의 면이 부럽기도 했다. 눈치코치 보지 않고 나도 당당히 이 연놈들에게 핏대가 선 눈알을 부리며 악을 지르고 싶었다.

개새끼. 시팔 새끼. 병신. 등신. 쓰레기 같은 놈들아.

내려와 보니 낯이 익은 여자였다. 바로 어제 판매한 고객이다. 그 여자의 쉴 새 없는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느라 진땀을 흘린 기억이 났다. 이 대리가 구원받은 표정으로 얼른 나를 소개했다. 여자의 고개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제 마주쳤던 얼굴임을 확인한 그녀의 콧대가 더욱 꼿꼿이 서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진다.

“당신 직업이 뭐예요?”

다짜고짜 그녀가 툭 말을 뱉어냈다. 얼떨결에 답했다.

“판매 직원입……”

“사기꾼이잖아. 그렇죠?”

“네?”

“당신이 나한테 사기 쳤잖아요. 그렇죠?”

“그게 무슨……”

“이 드릴 말이야. 이거. 어떻게 불량품을 버젓이 팔아요? 아니, 벽은 왜 갈라지는데? 구멍을 뚫으려고 샀지 벽 쪼개려고 샀나요? 새것 마냥 아주 그냥 떡 하니 진열해 놓으면 다예요? 염치도 없어. 어제 종일 부스러기 떨어진 거 쓸고 담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잠깐. 이제야 생각났다. 이 여자가 왜 이 지랄을 하는지.

그녀는 벽에 구멍을 뚫기 위한 드릴을 사려 했었고, 나는 간편하고 힘이 덜 드는 제품을 추천했다. 주의사항도 잊지 않고서.

벽, 그러니까 콘크리트는 ‘콘크리트 전용 드릴 날’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전기로 연결하는 전동드릴을 사용해야 제대로 구멍을 낼 수 있다. ‘해머 기능’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도로 공사 시에 땅을 파는 거대한 드릴의 덜덜거리는 상하 떨림을 생각하면 된다. 만약 길게 늘여지는 전기 줄이 싫어 간편한 충전 전동드릴을 원한다면, 힘이 최소 14V이상 되는 제품을 사용해야 해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벽이 갈라질 우려가 있고, 구멍이 일직선으로 뚫리지 않는 거다.

“콘크리트 벽이시죠?”

나는 분명히 설명을 했었다.

‘이런 제기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설명을 아무리 줄줄 늘여놓으면 뭘 하겠는가. 들어먹지를 않으니.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표정을 관리하자니 죽을 노릇이었다. 이를 꽉 물으며 웃으려 애썼다. 속병이 도진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이런 일을 겪게 되면 하루 종일 위산과다에 고생하는 건 뻔할 뻔자다.

“제가 어제 설명 드렸는데 깜박하신 것 같네요. 콘크리트 벽에 사용하시려면 콘크리트에 쓰이는 전용 드릴 날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잠깐 줘보실래요?”

“아니, 드릴이 아무 날이나 꼽고 돌리면 그만이지 뭔 소리래요?”

여자가 투덜거리며 드릴을 건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광택을 띤 날이 보인다. 이 드릴 날은 금속에 쓰는 것이다.

“날을 잘못 끼우셨네요. 이 날은 금속류에 사용하는 날입니다.”

“철을 막 뚫는 날이 왜 콘크리트를 못 뚫어요!”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또 사람들이 쳐다본다. 미칠 노릇이다. 나는 아무 잘못 없지만, 멀리서 상사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십중팔구 불친절한 대응 업무를 하고 있다 볼 터였다. 당황한 내가 여자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힘이랑, 그 벽을 뚫는 거랑은 조금 개념이 다르거든요.”

“쉽게 말해 봐요!”

“저, 고객님. 철을 뚫을 때는 아무 상관없지만, 벽을 뚫는 것은 그대로 돌려버리면 구멍이 삐뚤어지고 틀어져요. 벽에 구멍 뚫는 것은 못 같은 걸 박으려 하시는 거죠? 그렇죠?”

“네.”

“그러면요. 콘크리트 못을 박을 수 있는 앙카라는 걸 구입해서, 그 구멍에 박아놓고 못을 박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앙카가 들어가려면 일직선으로 곧게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한다고요. 지금 사용하시는 드릴은 전동 드릴이 맞으니까, 해머 기능은 되는데 그러려면 여기 스위치를 해머 그림이 그려진 쪽으로 돌리시고…….”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기만 한다. 이런 붕어 대가리 같은 년! 입만 헤 벌린 채, 여자가 여기저기 돌아보며 누군가를 찾는다. 그녀는 다른 직원을 찾고 있었다. 감으로 알 수 있다.

이 여자는 나보다 윗선의 사람을 찾아, 어떻게든 이 물건을 변상 받으려 하는 것이다. 설명은 어려우니 패스, 산 건 어제이니 무조건 교환 가능. 이년의 머리에 박힌 변하지 않는 똥 같은 개념.

“저기, 그러면 제가 수리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얼른 화제를 바꿨다.

“교환은 불가능해도, 고장은 고쳐 드릴게요.”

이런 일로 계속 변상해 준다면 꼭 나중에 욕을 들어먹게 되는 것은 나였다. 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냐. 등신이냐. 이러쿵저러쿵. 상사에게만 욕을 먹는 것은 아니다. 드릴 담당 업체에서도 한소리 툭 던진다.

돈은 그냥 줍니까? 관리 차원에서 주는 건데, 이렇게 관리하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따따부따.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어떻게든 수리 차원에서 해결하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뭔 수리요? 아저씨, 그냥 바꿔 줘요.”

“그건 좀 힘듭니다. 고객님 실수라서……”

“바꿔 줘요.”

“제가 깨끗하게 고쳐 드리겠습니다.”

“바꿔 줘요.”

집요하기도 하다.

“죄송합니다.”

“바꿔 줘요. 얼마나 한다고. 치사하네. 그렇게 치사하게 물건 팔면 차라리 장사를 하지 말던가.”

치사하다고? 울컥 울분이 치솟는다. 어떻게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사장이야? 내가 점장이야? 왜 내가 치사한 인간이 되는 거야?

참기가 힘들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겨우 겨우 화를 눌러 참아낸 결과이지만, 그런 한숨도 고객 앞에서는 쉬어서는 안 되는 거다. 여자의 눈이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너 이놈 잘 걸렸다는 식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여기 이 직원 좀 불친절 사원으로 신고 할 테니, 누가 좀 와 봐요!”

‘1시 입니다.’

휴대 전화 알람이 울린다. 이제 점심 시간은 다 지나갔다. 정확히, 3분 쉬었다.

누웠다가 그대로 일어나서, 이 미친년에게 걸려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분명히 친절하게 제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젠장.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는 지겨움을 참고 차분히 쉽게 말해 주었다. 그런데 불친절 사원이라고?

이년은 내 설명을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해하기 귀찮은 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혀 새 제품을 꺼내 들었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방긋한다. 좋다고 입을 헤 벌린다. 미소가 입가에 걸치며 찢어질 듯 히죽인다.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진작 좀 해주지. 왜 그렇게 뜸 들이고 그래요. 사람 바쁜데.”

아무리 소심하고 사람 좋기만 한 사람이라도, 참을성에 정도가 있는 법이다. 지금 내 머릿속엔, 여자의 히죽이는 입을 드릴로 뚫어버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바꿔주니 그렇게 좋아? 이 쌍년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몇 번을 말했냐고!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 처먹어! 야 이년아, 콘크리트는 콘크리트 날을 쓰고, 철판에는 철판 날을 쓰는 게 왜 어려워! 머저리냐? 설탕 소금도 구분 못하냐? 너희들은 손님으로 오면 머리를 아예 굴릴 생각도 안 하지? 이 대가리에 똥만 쳐든 연놈들아!’

아아.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싶었다. 잠깐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년을 빨리 보내버리고 담배를 피우고 싶어 속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나 여자는 갈 생각을 안 하고 뭔가 뜸을 들이는 기색이다.

“이런 것 사면 드릴 날 같은 거 증정으로 주지 않아요?”

“네?”

“가격도 만만찮겠다, 증정도 주고 그러잖아요. 보통 이런 데는.”

“……증정이 지금은 없어요.”

“하나 아무거나 주면 안 돼요?”

아주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제 마음대로 드릴수가 없어요. 다 파는 물건을 어떻게 막 증정으로 줍니까.”

언성이 높아진 걸 느꼈는지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어요.”

“안녕히 가세요.”

빨리 보내버리고 싶어 냉큼 배웅 인사를 했다.

“…….”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던 여자가 몸을 돌려 가버렸다.

나는 여자에게 받은 드릴을 든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옆에 위치한 가전 매장의 직원들이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을 잠깐 보며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그들도 멋쩍은 미소를 보낸다. 그래, 참 불쌍하겠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러는 너희들도 다 똑같잖아. 이런 거.

드릴을 가져다 놓기 위해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뭔가 터질 것 같은데, 이성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겨우 막고 있다. 총을 쥔 것처럼 드릴을 움켜쥐고 뚜벅뚜벅 창고로 걸었다.

“시팔!”

분노가 끈을 잘라내 버린다.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있는 힘껏 쥐고 있던 드릴을 내던졌다. 부메랑처럼 휘릭 돌며 통로 옆 철제 기둥에 부딪히고 파편을 튀기며 땅에 연착륙한다. 달려들어 발로 걷어찼다. 퍼억.

드릴이 퉁퉁 튕기며 바닥을 쓸었다. 다시 달려가 또 걷어찼다. 퍼억. 벽에 부딪혀 뱅글 도는 드릴은 완전히 부서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다.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다시 집어 들어 벽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너덜거리는 드릴이 저만치 굴러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두통의 공격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시계를 보았다. 1시 반이었다. 퇴근까지는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

“경력도 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모릅니까.”

박 대리가 커피를 홀짝이며 신문을 접었다.

“성식 씨 정도면 알만한 건 다 알 텐데요. 고객이 아무리 짜증나는 행동을 해도, 해줘야 할 게 있고 해주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 점장님 지시대로라면, 그런 막무가내 교환은 절대 불가라고 알고 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변명을 하려 했지만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코만 몇 번 만지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트러블 안 생기도록 한 번 혼이나 나고 말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내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 고객이 뭐 워낙 그 방면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번 일은 넘어가겠어요.”

“네.”

“말이 안 통하니 뭐 어떡해.”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과장님한테 잘 말해 놓을 테니까 걱정은 말고.”

“감사합니다.”

박 대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표정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감사까지야. 이런 건 지금 내 위치에서 항상 신경 쓰며 진행해야 할 일인 거고, 이제 성식 씨도 곧 느끼게 될 거예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박 대리가 중얼거렸다.

“내려가 보세요. 차후 결과는 다시 알려드리죠. 이제 곧 진급 심산데, 조심합시다. 우리.”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박 대리는 우리 인테리어 관련 부서의 담당이었다. 그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직원들이 하는 만큼 대우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머리가 깬 상사라고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조건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에 관련된 것이면 잘해 주지만,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고객 클레임 사건은 이대로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진급 대상이고, 내가 자신의 자리에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그 위의 자리로 이동하리라는 걸 알고 있는 그가 내세우는 일종의 ‘선물’인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매장으로 돌아갔다. 턱을 치켜세우며 보란 듯이 과시하던 그의 행동을 생각하니 눈꼴이 시리다.

“성식아! 구세주야!”

뜬금없이 준영이 반기며 나를 덥석 안았다. 당황하며 그를 뿌리치자 그가 다시 안겼다.

“왜 그래.”

“도와줘. 나 일 터졌다.”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가 휴대 전화를 꺼내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오빠.’

준영의 여자친구의 문자였다. 전화를 다시 집어넣으며 그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서 빨리 오라는데 어쩌냐. 나 잠깐 다녀올게. 누가 물어보면 화장실이나 휴게실 갔다고 말 좀 해줘라. 지금 시간이…….”

시계를 보면서 중얼거린다.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4시 반 좀 넘었으니까 5시 반까지 올게. 부탁한다.”

‘거절 좀 해봐.’

잘못 들었나? 주위를 살폈다.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없는데.

‘속에서 들린 거야.’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지만,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라 서로 불편해지는 게 싫은 것이다. 퇴근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가 보지 그래. 빈정거리는 말투가 목구멍 까지 올라왔지만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땡큐다!”

준영이 빠른 속도로 매장을 벗어났다.

그가 이런 식으로 근무 시간에 도망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계속 받아 준 결과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쉽게 거절 못 하는 내 약한 성격을 잘 아는 그가 이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준영이 건네준 무전기를 차고 천천히 진열 매대를 돌며 점검했다. 재미가 없다. 정말로 재미가 없다. 그만두고 싶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오늘은 더 힘이 들었다. 아침부터 겪은 이상한 고객들의 시비와, 상사의 느글거림과, 준영의 이기적인 행동들까지. 지금 바로 작업 조끼와 무전기를 던져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서 내 몸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적금은. 카드 값은. 방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 다니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라리 이상한 생각들을 안 하려고 머리를 비우는 편이 현실적으로 나았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일에 열중하는 것이 제일이다.

“어라?”

뒤로 들어가 있던 물건들을 앞으로 빼내어 진열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상자는 그대로였지만 속은 빈 것이다. 교묘한 솜씨였다. 허탈한 기분이었다. 재고 조사 때 또 지적받고 의심 받을 일이 생겼다. 가만히 빈 상자를 빼내어 작업용 카트에 넣었다. 눈을 부리나케 뜨고 있어도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는 인간들.

“여기 오는 연놈들은 왜 다 이렇게 이상한 거야.”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자만의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

퇴근 시간 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 역시 준영은 오지 않는다. 그 동안 준영의 위치를 물어본 사람도 없다. 차라리 인사과장이나 박 대리가 집요하게 물어봐서 그가 땡땡이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으면 싶었다.

운도 좋은 새끼. 어쨌든, 퇴근이 다가오니 기분이 조금 좋아지며 쓰린 속과 두통도 어느 정도 다시 제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살 거 같았다.

“지직.”

그때, 무전기가 울렸다. 내 허리춤에서 들리는 잡음 소리다. 누군가가 인테리어 매장 쪽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생활용품 박준영 씨, 고객센터로 이동해 주세요.”

쳇,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퇴근 시간을 한 시간도 안 남기고 또 걸려 버렸다. 준영이 맡고 있는 생활용품 쪽은 유달리 불량이 많아서 교환이 자주 있었다. 분명 고객센터 또한 교환 문제로 준영을 찾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동합니다.”

대신 짧게 대답한 뒤 고객센터로 향했다. 센터 쪽으로 다가가니 마르고 머리를 기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 하고 무전을 친 고객센터 직원을 찾았다. 그녀가 그 긴 머리 남자에게 나를 인도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 때문에…….”

“예약한 물건이 있습니다.”

“네?”

순간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아차 싶었다. 그저 교환이나 수리일 거라 예상했는데, 이 고객은 오늘 예약한 상품을 찾으러 온 것이다.

박준영.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고객과 약속한 날에 자기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 몰라라 가버렸군.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한 뒤, 전화번호를 눌러 그를 찾았다.

“여보세요?”

한참 신호가 가더니, 준영이 받는 게 들렸다.

“어, 아, 무슨 일 있냐?”

5시까지 쳐온다더니. 화가 치솟았지만 급한 업무라 고객의 예약 상품에 대해 먼저 물었다.

“오늘 그 36와트 전등 행사 상품 예약한 분 오셨는데.”

“어? 누구?”

“36와트 등. 주광색 전구 두개 들어가는 벽 등 있잖아. 행사 하는 거. 그거 오늘 입고한다고 네가 말했다며.”

“우와, 맞다 맞아.”

준영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귀가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아 시팔 좆 됐네. 그거 나 깜박 하고 발주 안 넣어서 물건 다음 주에나 들어 와.”

“뭐?”

어이가 없었다.

“야. 대신 사과 좀 해 줘라. 그 사람 성격 좋은 것 같으니까 말 잘하면 돼. 우리가 이런데서 일하면서 느는 게 거짓말이랑 대화 스킬 아니겠어?”

“야 그게 무슨…….”

옆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건 아파서 내는 소리가 아니다.

“끊는다. 간호해야 돼. 여친 아파서 죽으려 그래. 부탁해.”

“죽을 것 같아 미치겠어. 호호호.”

툭.

이 시팔 연놈들이. 얼어붙은 채로 서 있으니, 기다리던 고객이 조심스레 묻는다.

“통화는 끝나셨나요? 물건은 언제 가져다주실 거죠?”

나를 그렇게 만만히 보지 마.

“이봐요. 물건 있기는 한 거예요?”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씹새야.’ 남자가 어깨를 툭 밀쳤다. 움찔하며 내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건 주변에 있던 고객센터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내 표정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객센터 측면 벽 쪽으로 거울이 있었다. 내 얼굴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살기와 광기가 가득한 표정의 나였다.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다시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내가 황급히 남자 고객에게 말을 꺼냈다.

“아, 지금 담당자와 통화했는데 오늘 들어올 예정이었던 물건이 재고 부족으로 배송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연락처랑 주소를 알려 주시면 들어오는 대로 직접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는 나를 보며 남자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아뇨. 다시 오죠. 괘, 괜찮아요.”

겁을 먹었는지, 그가 별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허리를 펴는 내게 안면이 있는 센터 직원인 선희 씨가 말했다.

“성식 씨, 딴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 무서운 표정 지으면 어떡해요. 고객들이 뭐라 그래요…….”

“아, 알아요.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거든요.”

‘죽여 버려.’

또, 이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뺨을 몇 번 치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감정은 여운이 남았다. 신기하게도, 그 표정을 본 이후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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