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라는 기억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눈밭 사이로 희미하게 그녀가 보였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 그녀의 모습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준의 머릿속에서 저 사람이 그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깨까지 오는 까만 머리에, 큰 눈과 시원하면서도 깔끔한 이목구비를 가진-

 

왜…

 

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가 다시 떠진다.

 

시야가 흐렸다 선명했다를 반복한다.

 

왜 이 시점에서 그녀가 보이는 걸까-

 

그녀는 12년 전, 준의 인생에 갑자기 침범했다가 급하게 사라져버린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이 예뻤고, 가끔은 엉뚱했으며 마음이 단단하고 순수했다.

 

그를 어린애 취급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건 맞지만 이 상황에서 갑자기 떠오르는건 아무래도 생뚱맞는데….

 

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다가, 이내 그 의심이 쓸모없는 환상이라 여기며 무거운 눈꺼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였고,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뜨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서른 하나.

 

고달프면서도 화려했고, 어떤 면에서는 찬란했으나 또 비참했던 준의 일생이

 

지금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

 

어째서 지금…

 

하필 다른 이도 아닌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

 

 

 

“미안하네”

 

김 국장은 차마 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경을 매만졌다.

 

나름 방음이 잘 된 회의실이었지만, 밖의 사람들은 이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단숨에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연스럽게 곱슬지고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칼, 단정한 수트가 어울리는 탄탄한 몸, 시원하게 뻗은 콧대위에 얹어진 동그란 은테 안경은 평소라면 경쾌함을 더해주었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모두가 눈치 없는 반짝임일 뿐이었다.

 

“이준 서기관…”

 

국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준의 표정을 살폈고 준은 입을 꼭 다문 채 책상만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몇 분인지도 모를 시간을 침묵 속에 흘려보냈다.

 

“일이 잘 마무리 되면… 다시 부르겠네.. 그러니까..”

 

김 국장은 애가 타는지 거의 애원하듯 말했지만 이 상황에 멀쩡한 정신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란걸 알기에 순조로운 대답을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회의실 밖에서, 사람들은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너무 티나지 않게,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건물 안에서, 지금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일말의 양심은 있기에 착찹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이 여기서 순순히 수긍한 채 회사를 나가고 사건도 마무리되면 자신은 불행을 피해갔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 분명했다.

 

준의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죽을 것처럼 열심히 살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튼튼하게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다.

 

준만큼 성실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부정을 저지른 적도, 일을 소홀히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사람을 배신할 때는, 그 이유가 충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김 국장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이런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아마 그 누구보다 싫었겠지.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준을 탐냈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밑으로 끌어왔던 장본인이니까.

 

그걸 아는 준은 스스로 멍청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어떠한 감정의 폭발도 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차피.

 

어차피 이 일에 대한 선택은 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부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밀려나게 되겠지.

 

준의 배경이 탄탄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탓할 수는 없으니까.

 

세상이 실력과 노력만으로 된다고 믿었던건 아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생각하려니 더 힘들어졌다.

 

길어진 침묵을 유지하던 준은 마침내 결심을 했는지 어렵게 입을 떼 김국장이 바라던 대답을 나지막히 뱉어 주었다.

 

“저만….. 나가면 되는 겁니까”

 

“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튀어나오자 김 국장은 혹여라도 준의 마음이 바뀔세라 의자를 고쳐앉고 얼른 말을 잇는다.

 

“그, 그럼. 당연하지. 책임질 사람은 서기관 급 하나면 충분하다고, 위에서 약속을 받아냈다고 하네. 자네 잘못이 없다는 건 알지만 권력이란게… 그런 걸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고….”

 

김 국장은 말을 더듬어가며 장황하게 설명하려다, 고개를 든 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미안하네”

 

라고 말하고는 스스로도 착찹한지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 하.. 하아…”

 

식은 땀을 흘리며 눈을 뜨니 등은 뜨끈뜨끈했고 조금 덥기까지한 이불이 자신을 덮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한 와중에 물을 끓이는 주전자 소리가 이 공간을 지배한다.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살아있다는 고통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등이 따뜻해서인지 온 몸이 녹는 듯 했고, 안심되는 마음이 우위를 차지했다.

 

준은 눈을 찌푸리고는 찬찬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다.

 

침대는 준이 누운 곳 말고도 몇 개가 더 있었다.

 

싱글 사이즈보다 작은 침대들은 각각 커튼을 갖고 있었고, 언젠가, 누군가 누웠을 그 침대들은 지금은 주인없이 단정하게 비어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냄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준의 등은 여전히 따뜻했고,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 잠이 몰려올 것 같았다.

 

죽지 않았구나. 그래. 죽지 않았어.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건가.

 

“일어났냐”

 

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방금 전까지 반복되던 악몽의 그림자가 눈 앞의 상황에 힘을 잃고 달아났다.

 

 

“일어나 임마. 뭐 잘했다고 자는 척하고 있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