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스펙트럼 – 하

사랑의 스펙트럼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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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말했다.

 

“그럴수록 솔직하게 얘기해야지. 네 마음을 모르면 어차피 떠날 거고, 남남 되는 거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도현이 씨익 웃자 은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는 게 또 있어. 내가 고백하고 그 남자도 나를 좋아한다고 쳐. 그 다음에는? 만나 보니 생각한 거랑 다르면?”

 

“헤어져야지.”

 

“그걸 결혼하고 나서 깨달으면?”

 

“그러면 뭐, 이혼해야지.”

 

“그 전에 애가 생기면 어떡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은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밖은 아예 캄캄해져 두 사람과 카페 내부의 모습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세상 모든 딸들이 커가면서 혹은 다 크고 나서도 되뇌는 말. 하지만 코끼리 생각하지 말라고 누군가 소리치면 모두가 코끼리를 생각하듯 딸은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은혜는 그것이 두려웠다. 한 때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의 냉전이 장기화되던 시절, 하루하루 피가 말라 그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제 두 분은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지만, 은혜는 저런 게 결혼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두 사람의 새 출발을 가로막는 철창이 된 것 같아 울적해지도 했다.

 

남자에 대한 실망이 이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서글퍼졌다. 그로 인해 남자가 은혜의 울타리를 벗어나 버린다면, 서로에게 응어리만 남긴 채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린다면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낫다. 최소한 그는 은혜만의 동화 속 왕자님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은혜야.”

 

“응?”

 

은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 좀 봐 봐.”

 

비로소 돌아보니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도현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며 도현이 또렷해졌다. 그가 안쓰러운 듯 바라보다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은혜는 손수건을 받아서 눈물을 훔쳤다. 도현의 향수 내음은 손수건에도 배어 있었다.

 

“내가 늘 말했지.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게 네 장점이기도 하지만.”

 

“고마워.”

 

은혜는 손수건을 돌려줬다.

 

“일단 갖고 있어. 나중에 또 필요할지 모르잖아.”

 

도현이 짓는 웃음이 따뜻해 보였다.

 

“은혜야, 간단히 생각해 봐. 자, 우리 시나리오를 하나씩 설정하고 각각의 결과를 도출해보자.”

 

보고서 쓰는 건 그 쪽 아닌가요. 은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시나리오 1번, 네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남자가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 이 경우 넌 뭘 느끼게 될까?”

 

“엄청나게 슬프겠지. 말이라도 꺼내 볼 걸, 땅을 치며 후회할 거고.”

 

“하지만 언젠간 남자를 잊을 거고, 너도 다른 남자랑 결혼하게 될 거야, 그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난 이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다른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건 상상이 안 돼.”

 

도현이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그 사람, 사랑해?”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 보자. 2번,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만나 보니 사람이 영 아니다, 그래서 헤어졌다. 그럼 네가 느끼는 걸 뭘까?”

 

“슬프겠지. 실망스러울 거고. 연애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독신녀가 될지도 모르지.”

 

도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요, 심각쟁이 아가씨야. 세상에 남자는 많아.”

 

“이 우주에서 그 남자는 하나 뿐이야.”

 

“정말 푹 빠졌구나. 좋아, 그럼 3번. 결혼하니 그제야 단점이 보여서 이혼했다. 이 때 네가 느끼는 건?”

 

“좌절, 절망, 후회……? 인생을 낭비한 거니까.”

 

“그게 꼭 낭비일까? 행복한 시간도 있었을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그 때 가서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말했잖아, 너 정도면 웬만한 남자는 충분히 유혹할 수 있다고.”

 

은혜의 입술 사이로 서글픈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 마지막. 결혼하고 애도 낳았는데 남자가 이상해졌다. 그러면…….”

 

“난 이혼 못 할 것 같아, 우리 엄마처럼.”

 

“그럼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뭐야, 지금까지 얘기하고 나온 결과가 겨우 그거야?”

 

도현이 소리 내어 웃고는 차분해진 얼굴로 말했다.

 

“은혜야, 생각해 볼 게 있어. 남자도 생각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야. 결혼이 망가지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있어. 너희 아버지도 그러셨잖아. 어머니가 이혼하자 하셨을 때 상담부터 받자고 한 건 너희 아버지셨어.”

 

그건 어린 은혜가 보기에도 놀라운 제스처였다. 사랑이 식은 쪽이 아빠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결혼을 지키려 한 사람이 아빠였다. 이혼 위기를 모면했다고 두 분의 사랑이 다시 불타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 마. 네가 그렇게 좋아할 만큼 괜찮은 남자라면 그 정도의 자질은 갖췄을 테니까.”

 

은혜는 도현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했다. 진심일까, 위로하려고 하는 말일까? 그 무엇이 되었든 도현과의 시나리오 탐구는 고민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그 때, 도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 밀 때까지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아, 세린 씨.”

 

세린이라,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다. 은혜는 ‘블링블링’한 자태로 사내 최고의 인기녀로 등극한 신입사원 백세린을 떠올렸다. 그녀가 온다는 말에 은혜가 가방을 챙기자 도현이 말렸다.

 

“더 있다 가. 얘기 안 끝났잖아.”

 

“끝난 거 같은데.”

 

“왜, 이제 결심했어?”

 

“응. 얘기나 해 보려고. 그 남잔 아마도 ‘노’라고 하겠지만, 고백도 못 해 보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단 낫겠지.”

 

너무 비장해 보였나, 도현의 얼굴도 자못 결연해 보였다.

 

“차도현, 너도 결심했나 보구나?”

 

“응. 프러포즈하려고.”

 

“그래…….”

 

은혜가 웃음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