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스펙트럼 – 상

사랑의 스펙트럼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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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뽀얀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두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내다봤다. 잿빛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도현이 늦는다. 이런 애가 아닌데. 카톡을 보내 볼까. 카톡 창을 열고 피식했다. 어제 도현과 함께 영화를 보고 헤어져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눈 메시지 때문이었다.

 

‘도현아. 내일 시간 되니? 상담할 게 있어. (오후 10:43)’

 

‘서은혜, 내일도 시간 되지? 오늘 빚진 커피 좀 사라. (오후 10:43)’

 

가뜩이나 바쁘게 오고 있을 텐데, 괜스레 메시지 보내가며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식은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라 미리 주문해서 받아놨는데 그건 낭패다. 지금 도현이 딱 좋아할 만큼의 온기인데 여기에서 더 늦으면…….

 

길 건너에 차가 와 서더니 도현이 내린다. 카페에 들어선 도현이 머리와 어깨에 앉은 눈을 털며 다가왔다. 그가 늘 쓰는 향수 내음이 은혜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미안하다. 집에 뭘 두고 오는 바람에.”

 

“괜찮아. 근데 커피가 다 식었어.”

 

“나 원래 식혀 먹잖아.”

 

도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딱 좋네. 그래, 상담할 게 뭐야?”

 

“아, 그게…….”

 

“사채라도 썼냐? 누가 눈알 내 놓으래?”

 

은혜가 쿡쿡거리며 웃고는 우물쭈물 시간을 끌다 털어놓았다.

 

“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오호, 서은혜. 서운한데? 이 차도현을 놔두고. 서은혜, 서운해. 서은혜, 서운해.”

 

도현이 노래하듯 말을 마쳤다. 유치하게 이름 가지고 놀려대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들을 때마다 웃긴 건 또 뭘까.

 

“남자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이긴 한데…….”

 

은혜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데 알고 지낸지 오래됐다. 그곳에 근무하는 도현도 그를 알지만 은혜는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

 

“누군지 되게 궁금하네. 그나저나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지 웬 상담이냐?”

 

“나 싫다 그러면 어떡해? 엄청 자주 본단 말이야. 민망해서 어떻게 사냐구.”

 

“어떤 사람이야?”

 

“잘 생기고,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고, 재밌고, 일도 잘 하고. 심지어…… 냄새도 좋아.

 

도현이 커피 잔을 입에 대다 말고 풋 하고 웃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팔방미인에 엄친아구나?”

 

그 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도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도현의 입가가 둥글게 휘었다.

 

“누군데?”

 

“백세린. 이따 보기로 했거든.”

 

은혜가 눈을 흘겼다.

 

“넌 약속을 맨날 이중으로 잡더라.”

 

“괜찮아, 시간 많이 남았어. 말해 봐, 그 남자가 널 어떤 눈으로 봐?”

 

은혜는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짙은 구름으로 한층 어둑해진 골목에 눈발이 꽤 촘촘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유리에 은혜와 도현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요즘 들어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있다. 속내가 들킬 것 같아서다.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 ‘남자’로 느껴진 걸까. 아, 그 때였나. 그 잘생긴 얼굴로 날 보며 활짝 웃을 때. 그 전까지는 잘생긴 줄도 몰랐는데 이상하게 그걸 보고 나서부터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뻐근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였고 그의 기분에 따라 은혜의 기분이 변했다. 남자가 지나가듯 던진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잠을 망치기 일쑤였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매일 붕 뜬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고백해 보려 했지만 겁이 났다.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해 줄까? 도현의 말처럼 ‘엄친아’의 전형인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다. 그녀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날 하루는 비참해졌다. 그래서 죽마고우(실은 죽마가 아닌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지만)인 도현에게 SOS를 보낸 것이다. 어떻게 해야 여성적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지, 같은 남자로서 도현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들이대. 커피 마시자, 영화 보자, 만날 구실을 만들어. 반하게 못 만들면 정들게 만들면 되지.”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봤어. 아무 효과 없는 것 같은데?”

 

도현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쳐다봤다.

 

“흠, 너 정도면 웬만한 남자는 넘어올 텐데…….”

 

“웬일이셔? 내 무매력이 매력이라더니.”

 

“네가 애교가 없잖아. 그래서 그런가?”

 

“역시 애교가 넘쳐야 되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네 짝사랑남이 애교녀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

 

은혜는 남자의 주변 여자들을 떠올려봤다. 어디에서 배웠을까 싶은 현란한 메이크업 기술에, 월급은 죄다 백화점에 바치는지 철철이 바뀌는 옷과 구두, 그야 그렇다 쳐도 그녀들이 구사하는 요염한 미소와 간드러진 말투는 은혜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은혜가 한숨을 쉬니 도현이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한 번 볼래? 얘가 애교가 장난 아니거든.”

 

“됐어. 그걸 내가 왜 보니?”

 

은혜가 손사래를 치자 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씩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면 미워할 수가 없다.

 

“애교는 나중 문제고, 중요한 건 내 마음이야. 나 솔직히 너무 힘들어. 누굴 이렇게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자꾸 신경 쓰이는 게, 집착하는 건가 싶기도 해.”

 

“정상적인 연애감정이야.”

 

“바로 그게 이해가 안 돼. 괜찮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내 감정이 바뀐 걸까?”

 

“사람 감정이란 게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딱 잘라 욱여넣을 수는 없는 거니까. 너도 모르게 감정이 쌓여 왔고 그게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뭔가가 둑을 무너뜨린 거지.”

 

“임계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