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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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철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미 마감을 끝낸는지, 바는 평소보다 더 어둡기만 했다.

바 스툴을 은은하게 비추는 빛 뒤에서, 바를 지키는 바텐더는 조용히 병을 닦고 있었다.

끼익 열리는 문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려 손님을 본 바텐더는, 닦던 병을 내려놓고 뚜껑을 씌우고는 조용히 코스터 하나를 집어 올렸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앞쪽으로 코스터를 밀어놓고는 작은 잔에 물을 채워넣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손님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 헤치고는 바텐더쪽으로 슬금슬금 걸어왔다.

“벌써 마감을 했다거나… 그런건 아니죠?”

남성은 물기가 살짝 묻어 있는 의자를 손으로 슬 문질러 닦았다.

바텐더는 살짝 미소를 보이고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 시간에 마감이 어디있겠습니까. 뭐부터 시작하실건가요?”

맨들맨들해진 의자에 몸을 살짝 맡기듯 앉은 남성은 바텐더가 넘겨주는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양장 커버를 펼치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색 종이만 끼여 있었다.

남성은 의아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아무것도 써있는게 없는데요…”

바텐더는 쉐이커를 집어들고는 얼음을 채워넣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바 전체로 울려퍼졌다.

딸랑 거리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 처럼 메아리쳐 나갔다.

“그럴수밖에요.”

바텐더는 뒤로 돌아 찬장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빨간색 라벨이 붙은 병 두어개와 방금까지 닦고있던 술을 꺼낸 그는 지거(계량용 컵)를 손에 끼우곤 조심스레 기울여 술을 따랐다.

찰랑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스테인리스 지거가 술로 차올랐다.

마주앉은 두 사람의 사이에서 독한 알콜의 향기가 풍겨 올라왔다.

지거가 차오르자, 바텐더는 손을 살짝 꺾어 쉐이커 안쪽으로 술을 부어넣었다.

술병과 지거를 기울여 얼음이 꽉꽉 들어찬 쉐이커 속을 채운 바텐더는 뚜껑을 닫고는, 쉐이커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목의 스냅으로 쉐이커를 흔든 그는, 뚜껑을 살짝 쳐 위쪽 뚜껑을 열었다.

원뿔을 뒤집어 놓은 듯한 마티니 잔에 쉐이커속 액체를 부어넣은 그는, 옆쪽에 찍어둔 올리브를 담가서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게 두번째 잔이었죠? 본드 마티니 마셔보고 싶다고 하셨던게 기억나네요.”

남성은 놀란 듯 바텐더를 쳐다봤다.

바텐더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는 남성에게 마티니 잔을 주욱 밀어주었다.

얼떨떨한듯, 남성은 잔을 받아들고는 살짝 향기를 맡으려 코끝에 가져가 잔을 빙글 흔들었다.

알싸한 보드카의 알콜향과, 쌉쌀한 베르무트의 향이 얼굴을 감싸는 듯 남성을 휘감았다.

“그때 같이 오셨던 동료분은 안오셨군요.”

“아… 정실장 말입니까.”

남성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는 마티니를 한모금 머금었다.

씁쓸한 쑥향이 짙게 입안을 멤돌고는, 목구멍 속까지 후끈하게 데우는 한모금인듯 남성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어떻게 기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냥 저 혼자 왔습니다. 정실장놈이 바쁘다고 해서요.”

바텐더는 수도꼭지를 틀어 사용했던 기구들을 물에 살짝 헹구기 시작했다.

남성의 의아함에 답이라도 하는 듯, 그는 나지막히 ‘하하’ 하는 웃음 소리를 내었다.

“바텐더들은 기억력이 좋거든요.”

지거와 쉐이커를 살짝 털어낸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묶어뒀던 마른 행주를 집어 올려 기구들을 닦기 시작했다.

“뭐… 조주기능사 자격증 딸때도 레시피 50개에서 60개 정도는 외워야 하니까요.”

“외워야할게 굉장히 많군요?”

남성은 잔을 또다시 기울였다. 작게 열린 그의 입 속으로 술이 빨려들어갔다.

바텐더는 살짝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휴, 말도 마세요. 그 레시피에다가 바 관리 방법, 술 종류,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등, 상표 등등 다 외우려면 외울게 수천 수만가지입니다.”

그는 행주를 다시 허리춤에 끼우곤 살짝 팔짱을 끼웠다.

“그걸 살아남으면 저처럼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죠. 머리속으로 레시피 불러오고, 술 재고 관리하면서 라벨 또 외우고 하다보니 기억력이 늘더라구요.”

“일 하신지 몇년이나 되셨습니까?”

“음…”

바텐더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햇수로는 얼추 15년이 넘은거 같습니다.”

남성은 살짝 기침을 했다. 독한 술을 연거푸 밀어넣어서 그런지, 입을 살짝만 열어도 독한 술기운이 목구멍 속에서 다시 올라오는 듯 했다.

“어우… 크흠… 상당히 오래 하셨군요.”

남성이 기침을 하는걸 본 바텐더는, 물을 채워뒀던 작은 잔을 남성에게 살짝 밀어줬다.

“잔뼈가 굵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제가 말았던 칵테일이 네자리수를 훌쩍 넘을겁니다. 잘하면 다섯자리 수를 넘보고 있을지도요.”

그가 밀어준 물잔을 본 남성은 찰랑대는 물만을 바라봤다.

입을 헹구라는 용도로 부어준 체이서가, 이날 따라 진하게 느껴졌다.

남성은 물을 한모금 털어넣고는 작은 소리로 가글을 해댔다.

그륵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입안을 가득 메운 알콜 느낌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그 많은 잔들 중에서 제꺼는 어떻게 기억하셨습니까?”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하하.”

남성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린 바텐더를 보고는 조금 더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서는 옆 스툴에 둔 그는, 삼분의 일 정도 남아있던 마티니를 마저 털어넣고는 바텐더에게 잔을 내밀었다.

“흐… 거짓말같은데… 그러면 제가 첫번째로 마셨던 칵테일도 기억 나십니까?”

바텐더는 싱긋 웃음을 짓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는 술병들이 가득한 진열장을 쭉 훑어보고는 한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렌지 향이 나는 트리플 섹과 보드카, 석류 주스를 꺼낸 그는 뒤쪽에 병들을 내려놓고는 와인잔을 하나 집어들었다.

둥근 모양의 와인잔은 상당히 많은 액체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둥그런 얼음을 세조각 정도 넣은 바텐더는, 또다시 손에 지거를 끼고는 술을 계량해 잔 속으로 직접 부어넣었다.

무색 투명한 액체들이 얼음을 감싸며 차가워지고, 잔의 표면에서는 하얀 물방울들이 촘촘히 맺혀왔다.

술들이 잔의 아래쪽을 잔잔하게 채운 걸 확인한 바텐더는, 석류 주스를 쭉 부어서는 와인잔을 가득 채워넣었다.

바 스푼을 꺼내 와인잔을 살짝 저은 그는, 남성의 코스터 위에 잔을 내려놨다.

“이거였죠?”

남성은 감탄하며 살짝 입을 가렸다. 그의 눈은 반짝이며 바텐더를 바라보고 있었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잔을 받아들었다.

“이야… 이걸… 어떻게 기억하셨죠…?”

남성은 함박 웃음을 짓고는 급하게 한모금을 집어삼켰다.

새콤한 석류주스의 뒤편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오렌지의 향. 그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한번 만들어 먹어보고는 감탄했거든요.”

바텐더는 다시 지거를 씻고는 마른 행주에 물기를 닦아냈다.

“마음같아서는 제 바에서 이름 걸고 팔고 싶지만, 그건 선생님 시그니처 아닙니까. 선생님꺼를 제가 왜 뺏겠습니까.”

그는 체이서를 조금 더 부어주며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건 저만의 칵테일이네요?”

“그런 셈이죠. 선생님만의 레시피요.”

남성은 재킷까지 벗어서는 옆쪽 스툴에 올려뒀다.

그는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모든 족쇄들을 벗어던지듯, 와이셔츠 가장 윗단추 두개를 풀어헤쳤다.

그는 더운 듯 살짝 손으로 부채질을 하곤 와이셔츠를 훅훅 흔들었다.

“이야… 역시 이 일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다 꿰고계신거 같습니다. 굉장해요.”

“아직은 정진이 많이 필요합니다.”

바텐더는 멋쩍은듯 웃음을 던지곤 또다시 뒤돌아 서서는 진열장을 스윽 둘러봤다.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쭉 둘러본 그는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남성은 눈을 살짝 감고는 와인잔 속 액체를 음미했다.

“경력이 오래되시다 보니 이런 저런 경험 많으실거 같습니다.”

팔짱을 살짝 끼고는 남성을 바라보던 바텐더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였다.

“어휴, 많다마다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죠. 가끔은 제가 상담하는 전문가 같다니깐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안나올 이야기도 나오게 되는거 같아요. 특히나 지금 바텐더분 분위기를 보고 있다보면 더 그렇구요.”

남성의 말을 들은 바텐더는 작은 위스키 잔에 물을 따랐다.

고요한 바를 묵묵히 지키고 있던 그는, 말을 조금만 했을 뿐인데도 입이 갑자기 마르는 게 느껴졌다.

잔을 기울여 물을 한모금 머금어 삼킨 그는 괜찮다는 듯 숨을 살짝 고르고 다리를 살짝 꼬았다.

“보세요, 진짜 상담하는 거 같잖습니까.”

“상담이라기엔 뭔가 좋은 분위기는 아니겠죠?”

“뭐… 그렇죠.”

바텐더는 잔을 앞에 내려놓고는 남성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런 회복적인걸 바라면서 오는 사람들만 있는건 아니니까요.”

남성은 바텐더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음을 짓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족속 들이겠죠?”

“네, 뭐… 생각 이미 하고 계신거 같군요.”

홀짝대며 칵테일을 마시고 있던 남성의 잔이 반쯤 빈것을 보고는, 바텐더는 남성과 잔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여성분과 같이 슬금슬금 들어와서는, 여성분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저에게 귀뜸을 살짝 하죠. ‘쎈거로. 보낼수 있는거로.’”

“아… 그런 족속들이 많은 편인가요?”

바텐더는 짜증이 난듯 얼굴을 살짝 구기고는 쯥 하며 소리를 내었다.

“없다고는 못하죠.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까지 그런 개짓거리를 하는게 옳고 괜찮고 용인되는줄 아는 머저리들이 분명 있어요.”

“허허… 쓰레기들이죠 참. 시대가 어느시댄데…”

남성은 눈치를 보듯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남은 술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하지만!”

바텐더는 다시 팔짱을 끼고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런 쓰레기들한테도 나름 방법은 있죠.”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술을 마시며 눈치를 보는 남성의 손끝으로 눈길을 살짝 돌렸다.

남성의 손끝은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손 끝에서 눈길을 떼고는 다시 의자를 돌려 진열장쪽으로 몸을 돌린 바텐더는, 하얀 라벨에 초록색 ‘Spirytus’ 란 글자가 새겨진 병을 하나 꺼내 남성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병 속의 액체는 반정도만 남아 있었다.

“음… 라벨을 보니까 폴란드 제품이네요?”

“네. 스피리투스라는 보드카입니다. 그 밑을 살짝 보시겠어요?”

초록색 글자 밑에 쓰인 숫자 두 자리를 보고 남자는 깜짝 놀라 바텐더를 쳐다봤다.

“95도요?”

바텐더는 싱긋 웃고는 다시 병을 진열장으로 밀어넣었다.

“네. 상당히 센 술이죠.”

남성은 목이 살짝 타는 듯 남은 술과 얼음 한조각을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차가운 느낌이 그의 입안을 가득채웠다.

“믹솔로지에서요, 셰이킹을 하면 술에 공기가 들어가 알콜 맛이 확 사라져버린다고 하죠.”

“아…”

“저 스피리투스는 워낙 세니 스트레이트로는 못마시죠. 그래서 칵테일만 만들어야하는 놈이죠. 정말 소량으로요. 그럼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얼음을 살짝 깨어먹던 남성은 바텐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셰이킹으로 부드럽게 만든 저놈이 칵테일에 섞여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남성은 바텐더의 말을 듣고는 골똘히 생각하고는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아무리 섞는다고 하더라도 도수는 하늘처럼 치솟겠죠.”

“정답입니다! 다음 잔은 뭘로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