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사랑에 빠지는 어떤 순간이 그 사랑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가랑비 옷 젖듯 천천히 마음을 녹여 어느새 사랑하고 있더란 이야기 역시 사랑이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고, 소라는 그가 언제부터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건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웠다.

 

처음 알고 나서 만나기까지는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취미가 있어 온라인으로는 종종 교류했으나 얼굴을 볼 상황까진 아니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도 있었고, 굳이 만나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다만 걸어오는 대화가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는 인식 정도만 가진 채 여름을 흘려보내고 어느덧 가을.

 

가을은 마법 같은 계절이라, 떨어지는 낙엽도 울긋불긋 물든 공원길도 마음을 부채질했다. 마음을 바꾸는 건 언제나 사소한 것 하나다. 다른 일로 힘겨워하며 기분이나 좀 풀자, 하고 접속했더니 평소와 좀 다른데 무슨 일 있냐 괜찮으냐 물어오는 다정함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누구라도 상관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물어와 주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륵 열렸다. 그래서 한번 보자는 말이 평소와 다르게 불쑥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근처에서 볼 일도 있겠다, 식사 한 번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늘 가진 인상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다. 메신저 프로필로 사진을 보았던 터라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사진보다 훨씬 예쁘게 웃는다는 생각을 했다. 가볍게 한잔 나누며 예정에도 없던 깊이 있는 대화를 하다 보니 문득 시선이 갔다. 조금 더 마음도 갔던 것 같다. 길을 거닐다 영화를 한 편 같이 보고는 각자의 길을 떠났다. 나쁘지 않은 데이트 정도.

 

그러고는 이전보다는 좀 더 자주 연락했나 보다. 좀 더 근황을 묻고, 무엇을 먹었는지 궁금해졌고, 소라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가서 이런 것을 한다는 소식에 약간 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약간 더 기다려졌고, 좀 더 반갑게 그를 맞이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

 

감기가 유행처럼 돌던 초겨울이었을까. 예정도 없이 퇴근이 이른 날이었다. 저녁 무렵 계획이 없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요? 하고 던진 말이 현실이 되어버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 회사 부근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싣고 있었던 그런 날. 바람이 쌀쌀했지만, 마음은 쌀쌀하지 않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에 만나 한 우산을 썼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으므로.

 

살짝 젖은 반대편 어깨로 눈이 갔고, 우산 아래서 스치는 어깨에는 심장이 갔다.

 

유행이 조금 지나간 방 탈출 게임을 함께 했다. 게임을 잘 몰라 헤매던 소라는 그런 좁은 공간에 둘만 머무른다는 경험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는 생각을 했다. 금세 끝나버린 한 시간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서 헤어지기 아쉬워 조금 웃었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 혼잡해 떨어지지 않으려고 붙잡은 손의 온기가 여태 남아있었다.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몰랐으면서, 소라는 한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몇 주 정도 지났을까. 근방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에게 연락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하고 가볍게 건넨 이야기가 옷자락을 잡았다. 약속한 것처럼 만나 처음처럼 웃는 것이 좋았다.

 

밥 먹기 전에 노래방이라도 갈까요? 하고 잠시 시간 보낸 자리에서 소라는 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기에 걸려 목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음성이 심장 결리도록 좋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설렌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따지자면 굳이 볼 필요는 없었던 사람에게 연락한 이유를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라는 너무 늦게 알았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고기는 그리 맛있지 않았지만, 앞에 앉은 사람 때문에 맛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사람이 웃었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아 웃었다.

 

술에 조금 취했고, 자리를 옮겨 한 잔 더 마시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소라가 집에 가려면 한 시간 전에는 일어나야 했던 시간이 되자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집에 방 많은데, 자고 가요.

 

소라는 술이 약간 깼다. 남자 집에 가 본 일이 없어 머뭇거리던 그를 다정히 바라보는 시선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버스에 올라 시답잖은 이야길 나누다 문득 그의 집 앞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오르고, 낯선 곳에 들어섰다. 그때쯤엔 이미 술기운이고 뭐고 남아있질 않았다. 차라리 술에 취해 있었다면 변명이라도 되었을 텐데.

 

목도리를 풀고 외투를 벗자 그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칫솔은 찬장에 있는 것 하나 쓰면 돼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태도에 수건을 들고 욕실에 들어섰다. 지금 무슨 상황이지, 하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혼란스럽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찮나? 이래도 되나? 씻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거실에 놓인 피아노가 보였다. 피아노 위에 장식된 스노우볼을 흔들어 두고 보니 흰 피아노와 눈이 썩 잘 어울린단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악보를 뒤적이고 있으니 다음으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