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눈뜨다(제4회 우수작)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ZA문학공모전 #좀비 #이종권
  • 평점×9 | 분량: 126매
  • 소개: 좀비 무리와 함께 사람들을 사냥하던 나는 갑자기 인간으로서의 정신이 들었다. 당장 위험해서 좀비처럼 하고 다니긴 하지만 기회를 봐서 탈출해야 한다. 내 가족을 구해야 하니까. 더보기

좀비, 눈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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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을 떴다. 4차선 도로 한복판이었다.

손등과 팔뚝으로 입가를 훔쳤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가래를 모아 침을 뱉었다. 뭘 하든 핏물이 배어 나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눅눅한 햇살이 거리를 감쌌다. 살을 스치는 젖은 바람. 오랜만에 느껴보는 촉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으나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부 기억난다.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해운대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중이었다. 휴가철 경부고속도로답게 길은 막혔고 가족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때마침 오징어를 든 상인이 눈에 들어왔다. 잠도 깨고 지루함도 달랠 겸 상인을 불렀다. 술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비틀대며 다가온 상인은 차창을 열자마자 돈을 든 내 팔을 물어뜯었다.

나는 감염자가 되었다. 아내와 아들을 물어뜯고 도망치는 딸을 쫓았다. 딸애라도 구하려고 애쓰던 아내는 현재 내 뒤에서 걷는 중이고, 아킬레스건을 다쳐 다리를 절던 아들은 얼마 전 목숨을 잃었다. 딸이 내게 잡히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상, 어떻게든 남은 가족을 구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속한 무리는 200명 정도였고, 그 안에서 20, 30명이 뭉쳐서 걸었다. 감염자들은 팔을 늘어뜨리고 발을 질질 끌며 힘겹게 걸었다.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 더러는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혼자 걷는 녀석도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보스라는 칭호를 붙였다. 중간쯤에서 무리와 약간 떨어져 걸었는데, 외형부터가 평범한 감염자와는 달랐다. 2미터가 넘는 장신,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 그리고 왼팔보다 두 배 정도 긴 기형적인 오른팔. 시커먼 털로 가득한 오른팔을 보노라면 영화에 나올 법한 괴수가 연상됐다. 특별한 돌연변이를 일으킨 건지, 처음부터 인간과는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일반 감염자와는 궤를 달리했다.

사자 수컷들이 그러듯 보스는 전투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총과 방패를 소지한 경찰들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단 한 번 위용을 드러냈는데 수세에 몰린 전황을 순식간에 뒤집고 혼자서 남은 적을 전멸시켰다. 그 때 총알받이로 사용한 감염자 중 하나가 내 아들이었다. 총알이 미간을 꿰뚫기 전까지 아들은 보스의 손에 머리를 잡혀 산 채로 온 몸이 찢겨나갔다.

눈을 흘겨 보스를 쳐다봤다. 내 언젠가 너를 똑같은 모습으로 요절내리라.

정신을 차린 위치는 무리의 한복판. 빠져나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건 다수의 감염자들을 뚫어야 했다.

우선 몇 가지 테스트를 해봤다.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혀에 뭔가 꺼끌꺼끌 걸리는 기분이지만 괜찮다. 마지막으로 목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조금 뻑뻑하지만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다. 테스트 끝. 나는 더 이상 감염자가 아니다.

무리와 다른 식사를 하거나, 단독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안에 감염자 바이러스 항체가 생겼다. 인류 구원의 시발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날 연구할 시설이 남아 있어야 하겠지만.

일단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왼편에는 단발머리의 여고생 감염자가, 오른편에는 20대 후반의 근육질 남자 감염자가 있었다. 이 둘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철이와 미애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우리 셋은 죽이 잘 맞았다.

내가 미애라 이름붙인 여고생 감염자는 작은 소리에도 매우 민감해 인간의 위치를 잘 파악했고,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남자 감염자 철이가 상대를 제압하면 내가 목덜미의 천정혈(天鼎穴)을 물어뜯었다. 나는 한의사였다. 감염자로 변해도 직업적 습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미애는 벌써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자꾸 킁킁대며 내 쪽을 쳐다봤다. 미애가 공격 신호를 보내면 철이가 나를 힘으로 제압할 테고 그 후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방금 전까지 감염자였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들처럼 걸으려 노력했다.

뒤에 걷고 있는 아내를 보고 싶다. 그녀는 현명했다. 도망가는 딸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쥐어주고, 말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를, 아빠가 아닌 아빠를 흉내 내는 악당이라고 말해 주었다. 만약 딸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 나는 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정신을 차린 쪽이 내가 아니라 아내였더라면…….

2

기회가 왔다. 사거리 횡단보도에 이르렀을 때 미애가 고개를 돌렸고 무리는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열 동 이상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보였다. 정문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진 위치에는 책걸상이나 가구 등으로 급조한 바리케이드가 성인 남성의 가슴 높이 정도로 쌓여 있었다.

그 뒤를 쇠파이프와 공업용 렌치 등으로 무장한 인간들이 준비해 놨던 돌을 집어 드는 중이었다. 뾰족한 돌이 머리를 관통하지 않는 이상 저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여기가 미국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돌 대신 총알이 날아왔을 테니까.

이윽고 전투가 벌어졌다. 밀면 무너지는 허술한 방호벽 따위, 방어선을 돌파당하면 군인들도 통제 불능인데 하물며 급조된 민간인 부대가 버틸 리 만무했다. 돌덩어리들이 날아왔다. 몰려드는 물량 공세에는 소용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케이드는 무너지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철이가 턱수염이 그득한 남자의 어깨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나는 남자의 목덜미를 깨물 것처럼 몸을 기울이다가 그대로 무리를 빠져나갔다. 뒤를 힐끗 보니 내 역할은 미애가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뛰었다. 아파트 정문이 마치 골인 지점처럼 보였다. 두고 온 아내가 맘에 걸렸지만 손을 잡고 끈다고 해서 순순히 따라올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사람들에게 내가 감염자에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내 몸을 연구하는 대가로 제일 먼저 아내를 구하자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전에 이 증오스런 피비린내부터 지워야 한다. 깨끗한 물로 입 안을 헹구고 따뜻한 커피를 음미하고 싶었다. 생살로 가득한 뱃속에 조리된 음식까지 넣으면 금상첨화였다. 드디어 한 발, 정문 안으로 몸이 들어간 순간 눈앞에 플래시가 터졌다.

“감염자 새끼, 어딜 들어와!”

젊은 여자의 목소리.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이어 등과 목에도 통증이 닥쳐왔다. 하긴 그럴 수밖에. 정신을 차린 건 불과 몇 시간 전, 행색은 감염자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외쳤다.

“아여아아 아위이아!”
감염자가 아닙니다.

“아여아아 아위아우어!”
감염자가 아니라고요.

맙소사,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줄이야. 여자는 계속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러다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낭패다. 나는 양탄자 펼치듯 바닥을 굴러 몽둥이찜질을 피한 후 정문 밖으로 후퇴했다. 다행히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지만, 정문으로 몰려오던 한 무리의 감염자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감염자들은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공격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양손을 쭉 펼친 후 목을 쥐어짜는 감염자 특유의 신음을 내자 무리의 선두에 있던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전진했다. 무리에 슬쩍 끼어들어 다시 정문으로 접근했다.

나를 상대로 따낸 작은 승리에 고무되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무리가 정문에 닿기도 전에 공격을 해왔다.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다. 나는 먹잇감이 되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감염자들 사이에 섞여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중앙 현관 출입문마다 칭칭 감긴 쇠사슬이 눈에 띄었다. 감염자들이 문마다 몰아닥쳐 문을 두들겨댔다. 아파트는 이미 감염자 소굴로 변해 있었다. 후문과 쪽문 등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감염자들이 인간들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전투는 축제로 변했고,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 틈에 도피 루트를 찾아야 한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와중에 아파트 외곽 한쪽 벽면에서 들썩이는 수풀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뚱뚱한 남자 한 명이 엎드린 채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개구멍이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구멍에 허리가 끼어 난처한 상황이었다. 당길까, 밀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남자의 엉덩이를 밀기 시작했다. 살려달라며 남자가 벽 너머에서 울부짖었다. 살려주잖아, 지금.

좀처럼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작전을 바꾸었다. 남자의 호주머니와 허리의 힙색을 뒤져보니 오만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라이터와 다용도 칼을 주머니에 챙긴 후 나머지는 버리고 다시 엉덩이를 밀었다. 이쯤 되면 이쪽의 의도를 눈치 챌 만도 한데 남자는 여전히 사람 살려만 외쳐댔다.

엉덩이가 빠져나가자 나머지는 속전속결이었다. 막힌 변기가 뚫리듯 남자가 구멍을 통과했다. 내가 이어서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넣는 순간, 길쭉한 오른팔이 구멍으로 쑥 하고 들어가 아직 일어나지 못한 남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침대 밑에서 물건 꺼내듯 남자는 끌려나왔다. 깜짝 놀란 남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덫에 걸린 짐승처럼 거꾸로 공중에 매달렸다. 보스의 짓이었다.

감염자였을 때는 든든한 영웅이었지만 정상이 되고 보니 사신이 따로 없었다. 그 압도적인 위용은 아들의 복수를 떠올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감염자 흉내를 내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으나 보스가 앞을 가로 막았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하며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천둥 같았다. 오랜만에 침을 삼키고 보니 지금의 내가 정상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적어도 지금은 감염자의 먹이에 지나지 않는 인간.

떨리기 시작한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다시 몸을 틀었다. 한 걸음 내딛자 보스가 내 앞으로 남자를 집어던졌다. 뇌진탕을 일으켰는지 남자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에서 거품을 뿜어냈다. 뒤통수에 꽂히는 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테스트가 분명했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역겨운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감염자들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막상 코끝이 닿으니 거부감이 생겼다. 한 손으로 머리를, 나머지 한 손으로 턱을 잡아 고정한 다음 침 치료하듯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았다. 피와 땀이 섞인 액체가 목구멍에 닿자 구역질이 났다. 간신히 참고 살점을 뜯어냈다. 정신이 돌아온 남자가 발광을 한다. 씹지 않고 바로 살점을 삼켰다.

보스가 비로소 허리를 굽히고 남자의 뱃가죽을 헤집었다. 보스는 내가 움직임을 멈출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위협했다. 정신을 차린 후 첫 식사가 여전히 사람의 생살이라니. 나는 숨이 끊기기 직전인 남자의 급소를 계속해서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숨을 끊어 감염자로 변하게 해주는 편이 나았다.

남자는 좀처럼 감염자로 변하지 않았다. 감염자처럼 눈동자가 수축되긴 했는데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식사는 길어졌고, 보스가 먹어치운 가슴 아래쪽은 형체를 몰라볼 지경이었다. 이대로 눈을 떴다가는 사람 맛 한 번 못 보고 밟혀 죽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남자에겐 아무 도움도 안 될 테지만. 보스는 이번에도 가슴 위로는 입을 대지 않았다. 항상 그래왔다.

나는 다시 무리로 복귀해야만 했다. 보스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감염자이긴 한 건가? 인간 같지 않은 외모도, 늑대나 사자처럼 무리사냥을 하는 짐승의 리더쯤은 되는 지능도 다른 감염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감염자였을 때는 보스의 지능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사실, 생각 자체를 할 능력이 없었지만) 현재는 놈의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어쨌든 당장은 잠자코 놈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다시 정처 없는 행군을 시작했다.

무리는 대부분 무사했다. 무사할 뿐인가, 새로운 감염자들로 오히려 규모가 더욱 커졌다. 철이와 미애 콤비도, 아내도 건재했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혼자 걷던 보스가 무리 안에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내 앞에서.

3

감염자들이 점령한 생명 없는 거리에 진입했다. 하릴없이 배회하던 감염자들이 합류하면서 무리의 덩치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건 그렇고 낯익은 지리였다. 걸어서 가본 적이 없어 긴가민가하지만 이대로 시가지를 넘어 가로수 길을 지나면 호수공원이 나올 것이다.

한바탕 비가 내렸다. 목이 마르던 참이라 단비였다. 갈증은 가셨지만 허기는 더 심해졌다. 감염자였을 때는 식욕에 휘둘리긴 했으나 공복이라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었던 반면, 지금은 배가 고파 걷기조차 힘들었다. 이틀 가까이 굶고 나니 지나가는 쥐라도 있다면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기 전, 잘 나가는 한의사였던 시절에 난 소화 불량으로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일단 굶으라는 처방을 내리곤 했다. 2, 3일 정도의 단식은 체내의 독소를 배출하고 혈액을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다음 치료를 진행하지 않았다.

환자 본인이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효험이 좋은 한약이나 침 치료도 소용이 없는 법이었다. 환자에게 독한 의사라는 이야길 듣긴 했지만 진료 스타일을 바꿀 생각은 없었고, 나중엔 제법 추종자도 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굶게 되니 날더러 독하다 하던 환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다시 진료를 시작하면 일단 굶고 보라는 소린 함부로 하지 말아야겠다.

정신을 차린 후 2일 째 밤을 맞았다. 감염자들은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밤에는 걸음을 멈췄다. 근처에서 큰 소리가 나거나, 사람이 보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날이 밝을 때까지 가만히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감염자들은 바람 부는 날 버드나무처럼 상체를 휘청댔고 지속적으로 늑대 울음소리 비슷한 저음의 목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무리를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헌데 보스는 예외였다. 상체를 움직이지도, 육성을 내지도 않는 대신 콧바람을 식식 뿜어대며 SF 영화에 나오는 살인 로봇처럼 이따금 붉은 안광을 뿜기까지 했다. 마치 투우사를 기다리는 황소 같은 모습이었다.

보스는 오늘도 몸을 돌려 나를 예의주시했다. 나는 다른 감염자들처럼 상체를 흔들며 소리를 냈다. 이등병 때 당했던 가혹행위는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틀이 지나도록 감시당하다 보니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었다. 이제는 체력적으로도 한계였다. 이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 감시당하며 24시간 긴장상태에 있다간 내일은 절대 견디지 못하리란 확신이 들었다.

내 몸의 변화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와 같은 습성을 가지고 살았다는 아이들의 일화처럼, 나 또한 감염자의 습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야 할까? 불가능하다. 녀석들은 오장육부가 잘려나가도, 급소에 상처를 입어도 살아남는다.

잠을 자지 않아도 미치지 않고, 밥을 먹지 않아도 쓰러지지 않는다. 녀석들은 불멸할지 모르지만 나는 사흘 만에 그로기 상태다.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초월자였던 나는 이성을 되찾고는 허약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곱씹는다. 축복일까, 저주일까.

3일째의 낮, 무리는 가로수 길에 들어섰다.

4

아내가 총에 맞았다. 가슴에 한 발, 복부에 두 발, 허벅지에 한 발. 다행히 머리는 무사했다. 호수공원 산책로의 갓길 풀숲에 잠복한 군인들이 범인이었다. 일제사격 후 그들은 재빨리 엄폐물 뒤로 후퇴했고 미련하게 그들을 쫓던 일부 감염자들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다. 군인들은 감염자들의 약점을 정확히 아는데다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데도 능숙한 우수 병력이었다.

쾅.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깊숙이 들어간 감염자 몇이 산산이 조각났다. 살상반경 등을 유추할 때 클레이모어가 분명했다. 아들을 잃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도 각종 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상대였다.

도망갈까?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보스는 이미 양쪽의 감염자를 방패삼아 총알 세례를 막는 중이었고, 철이와 미애를 포함한 감염자들은 사분오열로 흩어졌다. 이대로 호수를 건너 사람들 품으로 돌아가면 인류는 승리한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내 때문이었다. 당장 총알 무서운지 모르고 달려드는 아내를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들이 걸레짝처럼 바닥에 버려졌을 때, 나는 아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감염자들이 아들의 시체를 짓밟았다. 부릅뜬 눈 안에는 흙모래가 가득 찼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전진과 섭취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달리는 아내의 발을 걸었다. 아내가 몇 바퀴를 구르며 넘어졌다. 일어서는 아내에게 다리를 뻗어 다시 한 번 넘어뜨렸다. 발밑으로 총알이 날아왔다. 내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아내가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총알이 아내의 어깨 위를 지나갔다. 허겁지겁 아내를 쫓아 양 팔로 아내의 등을 덮쳤다. 총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아내를 끌고 나무 아래로 숨었다. 아내는 몸부림을 쳤다. 나는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움직임을 봉쇄했다. 점점 힘이 부쳤다. 게다가 이제는 대놓고 인간 티를 내는 나를 감염자들도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시 감염자 흉내를 냈다간 아내의 목숨이 위험하고, 이대로 있어도 내 정체를 알게 된 감염자들이 날 먹으려 들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정체를 알아챈 아내가 공격을 해왔다. 아슬아슬하지만 이대로 호수 쪽으로 유인한다면 아내를 구하면서 계획도 성공할 수 있다.

보스가 뒤를 돌아봤다. 새로운 총알받이를 찾기 위해 감염자들을 물색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나와 아내도 포함되었다.

나는 호숫가를 향해 달렸다. 아내가 뒤를 따라왔다. 눈치 빠른 감염자 둘이 숨바꼭질에 동참했다. 주황색 옷을 입은 여자와 웃통을 벗은 남자였다. 남자가 내 웃옷에 손가락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다용도 칼을 빼들어 남자의 손가락을 잘라냈다. 남자가 균형을 잃고 벌러덩 넘어졌다.

이번에는 여자가 손을 뻗어 내 목깃을 잡았다. 칼을 휘둘렀지만 손바닥만 베는 데 그쳤다. 나는 땅바닥에 넘어졌고 여자가 내 배에 올라탔다. 여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목덜미에 입이 닿기 전에 내 칼이 먼저 여자의 태양혈(太陽穴)을 찔렀다. 여자는 즉사했다.

다시 일어서자 호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아내가 보였다. 보스의 오른 손이 아내를 맞이할 자세를 취했다. 입에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주먹 절반 크기의 돌을 집어 들어 보스와 가까운 군인들 쪽으로 던졌다. 깜짝 놀란 군인들이 사격 방향을 바꿨고 보스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해야 했다. 동시에 나는 아내를 정면에서 들이받아 둘러메는 데 성공했다. 어마어마한 저항이 뒤따랐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텼다.

보스는 다른 감염자를 방패로 붙잡고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보스의 오른팔에는 엄폐물도 소용없었다. 낚시하듯 군인들을 들어 올려 등 뒤로 휙 던지면 뒤따르던 감염자들이 달려들어 마무리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호수를 향해 달렸다.

아내를 물에 던졌다. 아내가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앉아 몸을 추슬렀다. 당장 이 문 열라는 듯 심장이 쿵쾅댔고, 팔이며 어깨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깨에는 아내가 물어뜯은 자국이 선명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다시 감염자로 돌아갈까 두려웠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 아내를 잡고 호수 깊숙이 들어갔다.

아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괴로운 듯 몸을 비비 꼬았는데 이따금씩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눈에 띄는 변화였지만 공교롭게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는 다 들어간 물 때문에 감각을 모조리 빼앗겼다. 수심은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졌고, 아내는 몸부림을 쳤으며,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머리가 무겁다. 마지막으로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잠시 돌아왔던 인간의 기억, 마지막은 맑음. 미안하다, 내 딸.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5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바다였다. 을왕리 해수욕장. 당시 한의과 6년 졸업반이던 나는 턱걸이로 가게 된 한방 병원 부원장 자리를 교수와의 마찰로 날려버리고 머리나 식힌다며 하릴없이 휴가를 떠났다. 기껏 찾은 바다는 내 신세마냥 작고, 더러웠다. 울컥하는 마음에 준비운동은커녕 옷도 안 벗고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다리에 쥐가 나 헤엄을 칠 수가 없었다. 살려달라고 셀 수 없이 외치다가 결국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이 지금의 아내였다. 안전요원으로 아르바이트 중이던 아내는 물리치료학과 대학생이었다. 아내의 얼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얼굴에 닿을 때 나는 운명을 예감했다. 일반적으로 한의사와 물리치료사는 서로를 못마땅해하며 적대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다. 그리고 우리를 이어준 곳을 기념하며 매 년 여름휴가는 바다에서 보냈다. 인명구조자격증이 있는 아내와 함께라면 든든했다.

올해 여름은 해운대를 가자고 했다. 여덟 살 아들과 여섯 살 딸에게 대한민국에서 으뜸가는 해변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내는 일본 원전사고로 유출된 방사능이 동해까지 퍼지고 있다며, 이미 일본 해역에는 사람을 공격하는 죽지 않는 물고기들이 속속 발견 중이라는 기사까지 내게 보여주며 반대했다.

나는 방사능이 아직 덜 퍼진 지금이 적격이라고, 앞으로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들은 내 편이었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티브이 유치원 프로그램의 여름 특집 배경이 해운대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발견하시면 가까운 지구대에 꼭 데리고 가주세요. 아내는 이 문구를 포스트잇에 적어 아이들의 주머니나 옷 안 쪽 심지어 신발 속에도 붙여두었다. 물에 젖을 것을 대비해 방수테이프를 두르는 철저함까지 보였다. 그리고 본인은 해운대 가는 길에 위치한 경찰서 및 지구대의 목록을 출력해 부적처럼 간직했다. 극성이라며 내가 핀잔을 주자 아내는 일 터지면 그 땐 늦는 거라며 응수했다. 나는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없게 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일이 터졌을 때 가족을 해친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아내는 아이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가 아들을 공격하는 그 시간에 딸을 챙겼다. 딸에게 현재 상황과 이 근방 지구대 위치를 최대한 차근차근 설명한 후 앞으로 혼자 부딪힐 여러 순간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딸은 아내를 닮아 사리분별이 빨랐다. 울음을 터뜨린 와중에도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었고 내게서 도망가는 데도 성공했다.

카라디오에서는 동해 일대에 괴한들이 대거 출몰했으니 여행을 삼가라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나는 그 시점에서 이미 괴한이 된 후였고 아내와 아들 역시 나를 닮아가는 중이었다. 진작 아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이제 진짜배기로 죽은 건가. 혹시 다시 감염자로 변해 내 의식과 상관없는 사냥을 하는 중은 아닐까.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들과 딸을 떠올리면 슬퍼서 죽을 것만 같았다. 죽었는데 또 죽다니.

가슴이 아팠다. 가족 생각에 상심한 탓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정말로 뼈와 근육에 압박이 있었다. 복장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력이 30회 정도 이어진 후에는 고개가 뒤로 꺾이고 코가 막혔다.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2회에 걸쳐 입 안으로 공기가 들어와 가슴이 팽팽해졌다. ‘무언가’가 입에서 떨어지고, 코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구토하듯 물을 뱉었다. 목구멍이 따갑도록 기침을 하면서 어쩐지 익숙한 옛 기억에 사로잡혔다. 물방울 하나가 볼에 떨어졌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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