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만화가는 거기 없었다

그때 그 만화가는 거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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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이어서 그런지 주차장으로부터 이런 저런 소리가 다 들려왔다.

분명 실내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블라인드도 거의 완벽하게 내려져 있었다. 빈틈없이 밀폐되고 감춰진 공간……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이 숨 막히는 적막이 진공상태처럼 다른 소리들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세 식구 살림치곤 짐이 너무 많다는 얘기, 다른 주민들이 이때다 싶어 무거운 폐가구나 세탁기 등을 치워달라고 한다는 얘기, 그 중에 돈을 쥐어주는 이도 있다는 얘기, 크레인에 실을 때 생긴 가구의 흠집을 가지고 벌어진 작은 실랑이 얘기, 그래서 5층에서 계단으로 몇몇 이삿짐들을 날라야 한다는 얘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마지막으로 이럴 바엔 점심까지 먹고 좀 쉬었다가 시작하자는 어떤 선동가의 얘기.

모두가 쫓기듯이 사라지고 쫓기듯이 숨어드는 본격 이사철, 그 어느 날인가에 동훈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소음들 속에 서 있었다.

-저 이삿짐센터 인부들은 분명 이 일을 두고두고 떠벌리겠지? 별것도 아닌 작은 흠집 하나를 가지고 소란을 떠는 사람들의 조급하고 인정머리 없음에 대해서. 오히려 서로 기분 좋게 넘겼다면 자기들 쪽에서 고마워서라도 더 열심히 일했을 거라고. 따라서 이사 시간도 단축되고 더 좋았을 텐데, 라고. 바로 자신을 전망 없는 현실로부터 탈출시키는 대단한 습관이지.

그런데 가망 없는, 현실로부터의 탈출. 이 말이 지금 자신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까?

302호의 화장실문을 등지고 선 채 동훈은 생각했다.
다행히 문하생은 심부름을 나가고 없었다. 15분 정도 떨어진 가게라고 했으니까 왕복 30분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는 셈이다. 오늘 들어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으니 몇 분 정도 더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갑자기 엄습한 절망감에 동훈은 화장실문에서 주욱 미끄러졌다. 동훈이 주저앉은 문 앞 깔개 위에는 필터부분을 이빨로 꽉 물어서 핀 담배꽁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거기뿐만 아니라 소파와 테이블 근처에도 대여섯 개가 약간의 재와 함께 떨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담배꽁초들 중 하나를 어금니로 열심히 깨물고 있던 만화가 박상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아직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박상수 때문에 동훈의 경직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도수가 높은 안경 너머 움푹 꺼진 작은 눈과 기분 나쁘게 늘어진 턱과 볼의 살, 누런 이 따위를 안 보게 된 걸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작은 악마 같은, 그런 인간,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대우해줘 봤자 돌아오는 것이라곤 욕설과 아니면 돈 얘기뿐이지 않았던가?
오늘만 해도 그랬다. 원고를 마감하고 단행본 마케팅 관련 사항을 의논하기 위해 들른 것인데 박상수는 자신을 맞아 너무나 태연스럽게 앉은 채로 인사를 하더니,

“우리 화실 이사한다는 거 알지요?”

……라며 이삿짐을 싸고 있는 게 아닌가. 마감 당일에 원고 마무리와 함께 전개되는 갑작스런 이사 상황에 대해 묻자 오히려 꼬치꼬치 캐묻는 자기를 생리하는 남자 같다며 놀려댔다.

박상수는 툭 불거져 나온 배를 마구 두드리며 웃었다. 굉장히 단순한 성격의 남자. 하지만 어쩌면 자기 만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처럼 모든 걸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이렇게 난장판이었군요. 이사는 요 밑에 있던 이삿짐 차로 가시는 건가요?”

동훈은 자기도 모르게 ‘난장판’이란 얘기가 나와 놀랐지만 박상수는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우스꽝스럽게 한번 웃고는 얘기를 이어갔다.

“우린 내일 갑니다. 그 차는 아마 오늘 이사하는 5층 차일 거요.”

“내일이라. 여기 보니까 짐 정리는 거의 다 된 거 같네요.”

“말도 마쇼. 미루고 미루다가 어제 후배 놈들을 불러 안 쓰는 짐들을 좀 치웠는데, 글쎄 한나절이 걸렸지 뭐야. 순간이었지만 내가 느낀 게 하나 있었는데, 내 말 좀 들어봐요.”

몸이 좀 불편한지 앉은 채로 움찔움찔 하던 박상수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형식적인 대화 외에 꼭 필요한 얘기를 할 때면 지금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낮은 톤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안 쓰거나 쓸모가 없는 것들은 제 때에 처분을 해야 된다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이만큼이나 쌓여서 다른 중요한 것까지 내 시야에서 가려버리거든. 바로 그것들이.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아…… 네에?”

“허허허, 이해 못 한 표정인데?”

박상수의 엉뚱한 얘기에 동훈은 애써 난처함을 숨기고 얘기를 계속했다.

“그나저나 이사 하신 다는 얘기 먼저 알려주셨으면 마감 날짜 같은 것도 조정하고 했을 텐데, 수고가 많으셨겠습니다.”

“뭐, 수고는. 편집부에 미리 말해 봐야 괜히 민폐나 끼치는 거고. 근데 난 윤 기자가 알고 있는지 알았는데…….”

‘?’

동훈은 엉뚱한 선문답에 갑자기 목이 확 꺾이는 것처럼 화가 났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인간이 저렇게…… 뻔뻔스럽지?’

준비해 온 마케팅 자료는 땀에 젖은 손 안에서 구겨지고 있었고, 동훈은 점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마실 거 좀 사올까요?”

그때 고양이처럼 음침하게 인기척을 숨기고 있던 문하생이 나타났다. 동훈은 유난히 검은 눈동자가 커 돋보이는 문하생을 볼 때마다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모습이 여지없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나저나 지난 번 화실 방문 때, 자기가 준비하고 있다는 작품에 대해 해준 솔직한 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냉랭하게 사람을 반기는 그녀의 비뚤어진 재주는 탄복할 만했다.

“어, 그래. 맞다. 근영아, 날씨도 더운데 가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 좀 사올래? 요 앞 가게는 공사 중이니까 15분 정도 내려가면 있는 사거리 가게 있지? 거기 가서 사와. 너 먹고 싶은 것도 있으면 사오고.”

돈을 쥐어주는 박상수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껄끄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저 녀석이 발산하는 음울함이나 음침함을 전혀 못 느끼는 것일까? 살이 찌더니 감각마저 둔해진 것일까?

동훈은 예전 박상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끓어올랐던 화를 애써 가라앉히기로 했다. 지금은 보기 흉하게 배가 툭 튀어나와버렸지만 예전엔 162cm인 키가 커 보일 정도로 길쭉하게 말라 있었다. 확실히 비쩍 마르고 생기 없어 보이던 모습을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근데 그건 어떻게 됐어요?”

원고료 문제였다.

‘그건 여러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좀 더 보류하기로 했잖아?’

“새 연재 작품 건 말이시죠? 소재가 소재이니 만큼 저번에 편집부에서 미팅 한 대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그렇게…… 결론이 난 걸로 아는데요.”

박상수는 습관대로 날숨소리를 크게 내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연기가 고스란히 동훈에게 달려들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실 박상수의 새 연재 작품 기획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그의 원고료였다. 이번엔 아예 원고료를 백지 위임해 버려 편집부를 엄청 난감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봐, 윤 기자. 내가 우리 사이니까 하는 얘기예요. 요즘 계속 다른 잡지사들에서도 원고 청탁이 오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미루기만 하면 나 곤란해진다고요 내 뜻을 읽고 빨리 결정을 내려줘야지. A사 같은 경우 꼭 돈이 아니더라도 작품 기획이나 진행을 얼마나 타이트하고 준비성 있게 하는지 정평이 나 있지 않소. 근데 우린…….”

‘우린 뭐? 뭐?’

큰 망치로 가슴을 맞은 것처럼 충격이 전해졌다. 못 견딘 나머지 동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거기까지였다. 동훈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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