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혹은 무단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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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퇴사 당할 지도 몰라요.

– 아무래도 회사에 취직을 해야 겠어.

메신저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발신자는 각각 스페인 남자와 결혼한다는 거짓말로 축의금을 회수하고 결혼휴가를 얻어서 혼자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던 의뢰인과 내 쌍둥이 오빠 전가정이었다. 열 살 많은 의뢰인을 짝사랑 중인 오빠는 의뢰인이 귀국하는 날 환영 현수막을 제작하겠다고 설치다가 내가 뜯어 말려서 스마트폰 전광판 앱으로 내적 타협을 하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의뢰인은 오빠를 보고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나한테는 면세점에서 산 화장품을 줬는데 오빠 선물은 없었다. 3주 동안 해외여행 하고 돌아온 사람치곤 힘 없어 보였다. 스페인에서 감기라도 걸렸나?

“다시 출근하기 싫어서 그래요. 아직 다 못놀았는데. 산티아고에서 돈 아끼려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수용소 같은 알베르게에서 며칠 자다 보니까, 이 나이에 무슨 깨달음을 얻겠다고 해외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나, 내가 언제 또 유럽에 올 지 모르는데 기왕 작정하고 온 거 카드값은 다음달의 나에게 맡기고 일단 아무 걱정도 후회도 없이 즐기다 가자…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관광지 가서 사진 찍고 관광객들 가는 맛집 가고 그랬어요. 그래도 평생 건전하게 살던 습관 못 버려서 가성비 따지느라 박물관 미술관이나 죽어라 걸어 다녔죠. 진작 해외 좀 나갈 걸. 취직하기 전에 1년이라도 워킹 홀리데이 가 볼 걸, 후회하면서요. 근데 그 때로 돌아가도 학자금 대출 얼른 갚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구글 어스로 세계일주 하겠죠. 두 분은 아직 이십 대니까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고 외국어 공부도 많이 하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유학이 안 되면 교환학생이라도 다녀와요. 아, 자꾸 뭐 가르치려 들면 꼰대가 된 거랬는데.”

오빠가 얼른 끼어들었다.

“꼰대라뇨. 멘토죠.”

“나 대학 다닐 때 멘토링 프로그램 같은 거 유행했는데, 그 때 우리 대학에서 멘토링 강연하고 다니던 분 얼마 전에 직원들한테 갑질해서 기사 나왔더라고요.”

의뢰인은 말을 돌리면서 오빠에게 철벽을 쳤다. 그랬던 의뢰인이 주말에 오빠에게 연락을 했고, 둘이 뭘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각각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체 왜 엄마 스카프까지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집안 옷을 몽땅 늘어 놓고 나에게 스타일링 좀 해 보라고 닦달해서 안 되는 외모를 옷으로 가리고 나간 오빠는 넥타이에 구두에 정장까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돌아왔다.

“누나가 사 줬어. 내 나이에는 어느 날 갑자기 부고 연락을 받을 수도 있고 면접 보러 갈 수도 있으니까 정장 한 벌은 있어야 한댔어.”

“언제부터 누나였냐.”

“오늘부터 1일.”

“제정신이야? 오빠 말고 그 분 말야. 진짜 사귀자고 했어? 맨정신으로?”

“말로 하진 않았는데,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 2세가 맘에 드는 여자한테 막 이거 저거 입혀 보면서 어울리는 거 사 주잖아.”

“’누나’가 ‘시발비용’ 쓰셨구나.”

“돈 아까워서 택시도 안 타시는 분이 시발비용을 왜 이런 데 써.”

“선물도 안 사왔는데 네가 공항에 나와 버리니까 귀국 선물 삼아 사 준 거겠지. 아니면 불우청년한테 기부한 거 아닐까? 네가 ‘남자는 수트발’이라면서 아빠 양복 입고 다니니까 돈 없는 줄 알고. 너 연말에 그 분한테 기부금 세액공제 해 드려라.”

“내가 준 반지도 끼고 있었단 말야.”

“그 앙증맞은 큐빅 반지? 야, 너는 어린애가 사탕반지 주면 귀엽다고 받아주지 ‘꼬마야 사탕반지 말고 보석반지 가져와라’이러면서 버리겠냐?”

“아냐, 그 반지 안쪽에 각인도 했던데? 반지 사면 각인은 공짜라고 했대.”

“설마 ‘우리 사랑 포에버’ 이런 거 새겼어?”

“DIGNITAS. 라틴어로 존엄이란 뜻이라던데?”

“그게 왜 너랑 사귀는 증거야. 그냥 각인했을 때 예쁘게 보이면서 길이도 적당한 단어 샘플 중에 고른 거 아냐?“

“너 그 누나 문신은 못 봤지? 나한텐 살짝 은밀하게 보여줬는데.”

“…너 설마…어디를 본 거야…?”

“스페인에서 오른발 발등에 아주 작게 꼬리 끊고 도망가는 도마뱀 문신을 새겼다고 나한테만 보여줬다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다가 갑자기 신발 벗고서!”

“너한테만 보여 준 문신을 왜 나한테 자랑해? 전가정 이 새끼, 입이 너무 가벼워서 큰 일은 못 맡기겠는데.”

“내가 문신 얘기했다고 누나한테 절대 말하지 마.”

“치킨 사 주면 말 안 할게.”

“나중에 취직하면 사 줄게.”

“갑자기 왜 취직을 하려고? 우리 집안 가업이 탐정이고 너도 지금 탐정인데. 그 누나가 퇴사라도 당하면 네가 먹여 살리려고? 아니, 퇴사는 당하는 게 아니지. 퇴사하면.”

슬쩍 떠 봤다. 나는 오빠처럼 입이 가볍지 않으니까.

“누나가 혹시 빨리 결혼하자고 하면 신혼집 대출금도 매달 갚아야 하니까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게 좋잖아. 탐정은 너무 프리랜서야.”

“오늘부터 1일이라면서 벌써 결혼까지 생각했어? 진정하고, 일단 이게 연애가 맞는지부터 확실하게 물어 봐. 내가 보기엔 그 분이 아직 시차적응이 덜 되어서 좀 몽롱한 상태인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는 너한테 잘해 줄 리가 없어.”

“내가 뭐 어때서. 키 크고, 키 크고, 키….”

“인턴 경력 없고, 공모전 수상 실적 없고, 창업 경험 없고, 토익은 다행히 졸업 필수 점수 넘겼고, 유창하게 할 줄 아는 제 2 외국어도 없고, 자격증은 운전 면허 밖에 없고, 봉사 활동도 안 했고, 동아리 활동도 안 하고, 해외 체류 경험은 여행 예능 시청으로 대체했고, 요새 취업하려면 학점이 과 상위 2%는 되어야 한다는데 지금부터 재수강을 하면 되려나…남자인 거 빼곤 스펙이 아무 것도 없잖아. 아무리 봐도 취직하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예비 청년 백수랑 결혼까지 생각할 리가 없지.”

“팩트로 뼈 때려서 아주 가루로 조져 놓으니까 재밌냐?”

“남들은 대학 입학하자마자 취업 준비 한다는데 너는 이제 와서 진로 수정을 하면 어쩌잔 거야. 어렸을 때부터 쭉 장래희망이 탐정이라고 하다가.”

“생각해 보니까 가족이 다 탐정이라서 나도 당연히 탐정이 되어야 하는 줄 알고 별 고민 없이 탐정이 된 거 같아. 이제부터 내 장래희망은 누나 남편이고, 그러기 위해선 취업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그 ‘누나’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지부터 확인을 하라고!”

자기 목소리가 멋있다고 믿고 있는 오빠는 이런 건 육성으로 해야 한다며 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그건 내 친구가 너랑 소개팅했을 때 ‘할 말은 없고 차마 잘 생겼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대충 한 칭찬인데 진심으로 믿으면 어떻게 해. 오빠는 통화 대기음이 울릴 때마다 초조한 지 계속 음량만 키웠다. 나한테까지 통화내용이 다 들릴 정도로.

“누나, 누나도 저 좋아하시는 거 맞죠? 산티아고 걸으시면서 저랑 사귀시면 어떨지 생각해 달라고 했는데 돌아와서 저 만나셨잖아요….아, 산티아고를 며칠 밖에 안 걸으셨구나.”

“내 나이엔 연애할 남자 보다는 결혼할 남자를 만나야죠. 열 살 어린 남자는 내가 돈 쓰고 시간 써서 멋지게 키워 놓으면 취직하고 나서 다른 여자 만날 텐데.”

“결혼 안 하실 거라면서요?”

“요새는 생각이 좀 바뀌려고 해요.”

“절 만나셔서요?”

너 안 만나려고, 겠지. 전가정이 극존칭 쓰는 거 오랜만에 본다. 많이 쫄리긴 한가 본데.

“회사 때문에요. 이놈의 회사는 해외여행 다녀와서 오랜만에 근무의욕 고취될 뻔 하니까 인력감축을 하겠다고 하네요. 희망퇴직 신청 받고, 부서별로 인력 운용 계획 제출하라고 했대요. 부장이 다른 부서 갈 수 있는 능력자들은 가고, 능력미달자는 자기 발로 나가라고 하네요. 더러워서 퇴사하려니까 생계가 막막해서 이럴 때 맞벌이 남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있던 참이라서요.”

“누나가 왜 나가요. 일 잘 하시잖아요.”

“가정 씨가 나 일하는 거 봤어요?”

“안 봐도 알죠. 누나는 능력자시니까 다른 부서에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학생이라 모르는구나. 사무직이 일 잘 하는 걸 뭘로 측정해요. 영업실적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나갈 사람 정해서 인사평가 점수 낮게 줘서 저성과자 만들고 교육팀으로 발령 내 버리면 알아서 사직서 쓰고 나가란 거죠.”

“누나가 지칠 만큼 열심히 일하신 거 저도 알아요. 그런 사람을 저성과자로 몰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지금 너무 힘드시겠지만 좀만 버텨 주시면…제가 얼른 졸업하자마자 누나네 회사에 취직해서 사내커플 되어서 누나 힘들 때 같이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 사내 메신저로 얘기도 하고 상사 뒷담화도 같이 하고 그럴게요. 그 때 만약에 누나가 너무 힘들어서 퇴사하시면 제가 누나 먹여 살릴게요. 그러라고 저 면접용 정장도 사 주신 거잖아요.”

“요새 우리 회사 신입 채용 거의 안 해요. 2년 전에 대규모 신입채용한 건 회장님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짜리 비리 저질러서 정부 일자리 정책에 협조하느라 그런 거고, 다 인턴 아니면 계약직으로 뽑아서 아이디어랑 체력만 쏙 뽑아 먹고 버려요. 이제 끊어요. 부장님이 부르신대서 가 봐야 돼요.”

“누나, 누나아악! 끊지 말아 주세요옷!”

오빠는 스마트폰을 놓지 못 했다. 무릎은 언제부터 꿇은 거야? 오빠의 짝사랑도 차마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 건 아니고…급하게 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통화 종료를 잊은 것 같았다. 부장실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어, 이루리님, 예정일이 언제야?”

이 회사도 수평적인 관계에서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답시고 팀장 아래는 다 팀원으로 위계구조 단순화하고 ‘~님’으로 부르는가 본데, 부장님은 이름이 ‘부장’인가? ‘~님’으로 부를 거면 존댓말을 쓰든가. 이러면 평등한 관계가 아니잖아.

“예정일요?”

“박 팀장이 그러던데, 임신하고 결혼했다고. 요새는 애가 혼수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임신 안 했는데…팀장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팀장한테 결혼날짜 얘기했을 때 배에 손 얹어서 오해를 유도했으면서 저렇게 시치미를 떼다니.

“박 팀장이 착각했나. 이러면 인력운용에 차질 생기는데…어쨌든 나이도 있는데 조만간 임신할 거 아냐.”

“안 할 겁니다.”

“아, 결혼을 했는데 왜 애를 안 낳아?”

“난임이래요.”

“누가?”

“남편이요.”

아니 부장은 생각이 뇌에서 필터링 안 거치고 바로 입으로 나오나. 이루리 님은 아무리 없는 남편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도 되나?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긴 하지.

“어…음…요새는 의학이 발전해서 시험관 시술도 있고 하니까…치료 받으면…근데 난임 시술 받으려면 무리하지 말아야 하니까 회사 다니기 좀 어렵지 않을까?”

“치료가 불가능하대요.”

“이루리님은 그러면…아이가 없으니까 아이 학비도 안 들어가서 여유는 있겠네. 남편이 외국인이랬나? 언젠가 남편 따라 외국 갈 계획은 없고?”

“이혼할 겁니다.”

“아니,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결혼이 장난이야?”

“사기결혼이라서요.”

사기를 당한 게 아니고 자기가 회사에 사기를 친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하아…이루리님, 다른 사람들은 부양할 가족이 있어. 애 둘인 사람도 있고, 외벌이인 사람도 있고, 양가부모 다 모셔야 하는 분도 있고. 근데 이루리님은 남편만 있고, 아니, 이혼하면 혼자잖아. 본인 하나 못 건사 하겠어?”

“부장님, 저는 애 없어서 제 노후는 제가 저축한 돈으로 해결해야 하고요. 남편 없어서 제 월급 없으면 가계수입이 없고요. 저도 부모님 생활비 보태 드려야 하고요. 저는 어디 기댈 데가 없어요.”

“사람이 절박해야 일도 열심히 하는데 루리 님은 아무래도 딸린 식구가 없으니까 덜 절박하잖아!”

“절박할수록 일 잘 하는 거였으면 입사하자마자 사채로 고금리 땡겨 썼죠. 그럼 인센티브 받아서 빚 갚으려고 죽자사자 일 했을 텐데요. 아니면 그 때 대출 받아서 갭투자해서 월세를 놨으면 지금 쿨하게 퇴사했을 텐데…아, 부장님, 이거 농담입니다. 하하하.”

“후…나가 봐.”

와 이 언니, 친언니였으면 좋겠다. 저 정도 순발력과 어딜 가도 밀리지 않을 말발은 있어야 탐정집안 사람이지. 오빠가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누르고 카톡을 보냈다. 할 말 있다고, 술 사준다고, 단둘이 만나는 게 부담스러우면 나까지 셋이서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