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방

  • 장르: 로맨스
  • 분량: 57매
  • 소개: “결혼 축하한다.” “왜 하필 그녀였냐고 묻지 마.” “아니 오히려 다행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서.” ̶... 더보기

하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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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새하얀 방이다. 사방이 온통 하얀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있는 것이라고는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뿐이다. 한 번도 온 적 없는 이곳이 그러나 서우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편안해 당황스럽다. 그가 눈을 돌려 벽과 천정까지 하얀 방을 둘러본다. 그 순간 삐거덕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현수다. 그가 천천히 서우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가 좁은 방에 울리고 서우가 말끄러미 현수와 두 눈을 맞춘다. 그제야 그는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다. 오래전에도 한 번쯤 와 보지 않았을까? 와 본 기억이 있지 않을까? 서우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터진다.

 

“오랜 만이야.”

 

현수의 인사에 서우가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나도 오랜만이다. 인사해야 하는 거냐?”

 

오랜만인 건 사실이지만, 도저히 그런 평범한 인사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그에겐 현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많이 안 변했네? 우리 몇 년 만이지?”

 

서우는 머릿속이 뒤엉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4년 만인가? 아니면 5년? 눈앞에 앉아 있는 현수는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동안 나 안보고 싶었냐?”

 

현수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린다. 현수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웃었다. 뭔가 재미있다거나, 아니면 슬플 때도 괜스레 혼자 키득거렸다. 현수가 눈을 들어 말끄러미 서우를 바라본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하얀 전등 빛에 투명하게 빛난다. 오래전 그때도 그랬다. 현수의 눈동자는 늘 어떤 열기에 휩싸여 아침 바다처럼 반짝거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

 

“결혼.”

 

결혼이란 한 마디가 서우의 가슴속을 예리하게 베어낸다. 그래 그는 일주일 뒤에 결혼을 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녀와 드디어 하나가 된다.

 

“가을이 잘 지내지?”

 

애써 웃고 있지만 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현수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서우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찾지 못한다. 오래전 현수의 사랑이었던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 이유를 말 할 수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서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하기 싫다.”

 

현수가 씽긋이 웃으며 어깨를 들썩인다. 괜찮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얼굴이 유하고 편안하다. 왜 하필 가을이냐 한 번쯤 원망할 법도 한데. 너무 아무렇지 않은 현수의 모습이 서우의 가슴에 뾰족한 것을 박아 넣는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곁을 지키는 사람은, 더 이상 현수가 될 수 없다. 이제 가을의 옆에는 서우가 함께 있다.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아플 때도 힘들어 할 때도 곁에 머물던 사람은 오직 서우뿐이었다.

 

“쓸데없이 뭐라고 하는 녀석들 있냐?”

 

현수의 질문에 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서우와 그녀를 뒤에서 수군거리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는 늘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남자. 친구들이 도리질 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애들 얘기 신경 쓰지 마.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애들이 아니야.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은…….”

 

서우가 질끈 아랫입술을 깨문다. 남들의 수군거림 따위 아무 상관없었다. 그가 두려운 건 오직 한 사람, 눈앞에 앉아있는 현수뿐이다.

 

“가을이 요즘도 제 이름만 되면 비염 달고 사냐?”

 

“…….”

 

“허리 아픈 건 어때? 그 녀석 어렸을 때 발레하다 허리 다치고 그 뒤로 계속 허리통증에 시달렸잖아.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 받아도 늘 그때뿐이었는데.”

 

“…….”

 

“겨울 되면 목감기 시작되는 것도 여전히…….”

 

“현수야.”

 

서우가 나직이 그의 말허리를 잘라낸다. 현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서우가 눈을 들어 창백한 현수를  바라본다.

 

“가을이 비염 많이 좋아졌어. 허리 아픈 것도 한의원 데리고 가서 침 맞혔더니 전보다 훨씬 나아졌고. 몸이 냉 체질인데 한약 먹고 체질도 바뀌었어. 그 녀석 양약보다는 한약이 맞는 몸이더라.”

 

그랬구나. 싶은 표정으로 현수가 씁쓸히 웃는다. 그래 가을의 비염과 허리통증을 고쳐 놓은 건, 다름 아닌 서우였다.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한의원에 데려갔으니까. 너무 비싼 것 같다는 한약을 손에 쥐어 주었으니까. 가을을 위한 이 모든 수고는 현수가 아닌 서우의 몫이었다.

 

“몰랐네. 나는 한의원 생각은 못했거든. 좋은 정형외과만 찾아다녔지.”

 

아무리 그녀의 체질이 바뀌었다 해도, 결코 바뀔 수 없는 게 있다. 서우의 시선이 마주 앉은 현수의 얼굴에 닿는다.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방 때문일까? 안 그래도 창백한 현수의 얼굴이 더더욱 투명하게 빛난다.

 

“한 번쯤 만나고 싶었어. 우리 결혼하기 전에.”

 

현수를 만나길 바랐다. 아니 한번쯤 꼭 만나야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눈앞에 있으니 서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기 싫었다. 용서를 구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현수의 사랑이었다 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현수를 만나고 싶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찾아 왔잖아.”

 

현수가 웃으며 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들어 보인다. 서우의 입에서 습관처럼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가을이 아직 귤 못 먹어.”

 

“에이. 그건 왜 못 고쳤냐? 귤은 가을이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아마 평생 동안 못 먹을지도 몰라.”

 

서우의 한 마디에 히죽 웃던 현수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다. 서우의 말은 사실이다. 그녀는 아직도 귤을 먹지 못한다. 앞으로도 쉽게 먹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서우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가을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무엇인지…….

 

‘가을이는 영원히 너를 잊지 못 할 거야.’

한 마디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가을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갈 사람이 누구인지. 현수도 결코 모를 리 없다.

 

“나 알고 있었다.”

 

서우가 고개를 들고 비긋이 웃는 현수의 미소를 바라본다.

 

“너 가을이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현수야 난…….”

 

“너 가을이 대학 때부터 좋아했지? 우리 두 사람 사귀기 전부터. 네가 먼저 가을이 좋아했잖아.”

 

아니라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무 변명도 할 수가 없다. 그래 가을은 아주 오랫동안 서우의 가슴속에 살아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결코 내색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현수의 여자였다. 서우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애인이었다.

 

“결국 인연은 너희 둘이었나 보다.”

 

인연? 과연 이것을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두 사람이 진짜 인연이었다면, 가을의 첫 번째 사랑은 서우가 되었어야 했다. 그녀의 마음의 문을 처음 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수였다. 서우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너는 항상 어떤 에너지 속에 쌓여 있는 듯 보였어. 빛처럼 따뜻하고 밝은.”

 

현수는 눈부신 사람이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모두들 현수를 좋아했다. 그에게서는 늘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현수와 함께 있으면 좋은 기운을 받는 것 같았다. 서우는 현수와 보내던 학창시절이 그리웠다. 그는 장미처럼 화려했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웠으며 활화산처럼 뜨거운 열정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 서우의 눈앞에 앉아 있는 현수는 여전히 눈이 부시다.

 

“내가 갖지 못하는. 아니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너에게는 있었어.”

 

그러나 한 번도 질투를 한 적이 없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친구였기에, 그런 현수를 질투하거나, 시기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서우는 그 정도로 유치해지고 싶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질투하는 것만큼 치졸한 감정도 없을 테니까. 서우가 절대 가질 수 없었던 완벽한 사랑 그것이 바로 가을이었다.

 

“그런 너는 꽤나 차분하고 냉정했지.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네가 나는 오히려 부러웠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보색과도 같았다. 현수가 파스텔 톤의 밝은 이미지라면, 서우는 무채색의 진중한 분위기였다. 정 반대의 매력을 가진 두 사람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던 건, 바로 서로의 그 다름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네 곁에 있던 가을이.”

 

“…….”

 

“참 예뻤어. 그건 어쩌면 현수 네 곁에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렇기에 한 번도 그녀를 원한 적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한 적도 없었다. 현수 곁에서만 웃을 수 있는 가을이었다. 현수와 함께여야만 행복한 그녀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우는 꿈에서라도 가을이 자신의 여자가 될 거란 상상은 하지 못했다.

 

“삶이 이래서 재미있는 거야.”

 

“…….”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전혀 모르니까. 그래서 짜릿하고, 또 그래서 바보처럼 하루를 보내지.”

 

안 그래? 싶은 얼굴로 현수가 비긋이 웃는다. 그럼 앞으로 가을과 나에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서우는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림자가 남아 있게 될까봐.

 

“너 그거 알아?”

 

현수가 고개를 들고 얼굴에 물음표를 그린다.

 

“너는 사랑도 참 완벽하게 했던 놈이야.”

 

현수의 사랑은 완벽했다. 적어도 서우가 아는 모든 사랑을 통 털어 현수만큼 완벽한 사랑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서우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존재한다.

 

“완벽이라.”

 

나직이 읊조리며 현수가 엷게 웃는다.

 

“가을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

 

“여전히 현수 너야.”

 

그럼 너는? 묻는 눈빛으로 현수가 말끄러미 서우를 본다. 그럼 정말 나는 뭘까? 서우가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래 가을이와 곧 결혼할 사람은 나야.”

 

이제 그녀와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은 분명 서우뿐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현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이제 막 봉오리가 벌어지는 순간이야.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이고.”

 

현수가 뭔가 알 것 같다는 눈빛으로 웃는다. 너무 투명해 아득한 미소를 내비친다.

 

“그런 뜻이었군.”

 

“너는……너는 그렇게 가을이랑.”

 

서우가 꽉 아랫입술을 깨문다. 현수가 그녀에게 남긴 상흔은 너무 컸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을의 상처를 완벽하게 덮어줄 수 없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은 곧 꽃잎을 떨굴 테니까. 가끔씩 마주한 가을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여전히 현수를 그리워 한다는 사실을. 그런 그녀를 볼 때 마다 서우는 애써 모른 척 웃어야 했다. 텅 빈 가슴 속으로 시린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수록 더 애틋하다. 뭐 이런 거?”

 

“너는 여전히 쉽게 말하는 구나.”

 

현수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인다.

 

“그럼 너희 둘이 한 건 뭔데. 사랑 아니야?”

 

서우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는 오랫동안 가을을 사랑했다. 그러나 한 번도 마음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그녀 곁에서 현수가 사라진 후에야 조금씩 그녀의 마음 문 앞에서 서성였다. 조금이라도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는 사랑이야.”

 

“…….”

 

“하지만 가을이는 익숙함일 거야. 어쩌면 편안함인지도 모르지.”

 

가을에게 서우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랬던 그가 애인이 되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덕분에 주변인들에게 적잖은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그녀에게 서우는 힘들 때 기대고 싶은 친구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고 그런 가을 곁을 지킨 사람은 오직 서우뿐이었다. 가을은 정말 나를 사랑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