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의 그림자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하얀 옷을 입은 것이 있었다.

 

편의점 앞에 있는 공원이었다. 나무들 사이의 구석진 곳, 어둠이 깔린 그 사이에 그 형체는 있었다. 안개 같은, 구름 같은 느낌의 하얀 것에 감싸여 있었기에 옷을 입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을 닮았지만 사람은 아니다. 본 순간 깨달았다. 그것은 나무 사이로 우뚝 솟아 있었다. 보이는 것은 기다란 팔과 다리뿐, 얼굴과 어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은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길게 뻗은 팔은 지면 아슬아슬한 곳까지 내려와 있었다. 무심코 긴팔원숭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제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며칠을 지나가며 보아도, 아침에도 밤에도, 가끔 길을 나서는 새벽에도 그것은 늘 같은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 밑동에서 움직임도 없이 그저 멈춰 선 채로.

 

공원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뛰노는 아이들과 유모차를 미는 부부, 편의점의 친절한 알바생,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동물들이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었지만 산책을 나온 개들도 사정은 같아 보였다. 흔히 동물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데 개들은 딱히 그 존재를 아는 듯 행동하지는 않았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새들은 두려움 없이 그 근처로 날아들었고, 고양이도 태연하게 그 곁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지척까지 다가가면서도 그것에게 직접 닿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보이는지도 모른다. 보면서도 그것이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 두려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존재를 마주하고 며칠간 그의 마음은 썩 편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 한 번 계단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없었다. 긁힌 상처 몇 개를 빼면 말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 했다. 하늘이 보살핀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큰일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얘기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는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적 같은 게 아니라고, 당시의 소년은 생각했다. 계단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를 받아준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모른다.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몸이 공중에 뜨는 순간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들을 보았다. 무언가 자신을 받쳐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신을 도와준 누군가가 있었다. 그 덕분에 제가 무사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어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그 계단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타이를 뿐이다. 그 말을 믿어준 것은 이제는 안 계시는 할머니 딱 한 분뿐이었다. 그것들은 변덕스러워서 가끔 우리를 도와주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 이상 말씀해주시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종종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었다. 늘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가다 한 번씩, 잊어버릴 즈음 되면 그것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두려움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위험한 게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것들과 마주하는 순간이 워낙 잠깐 동안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찰나, 그간 마주했던 것들은 대부분 그 짧은 순간 시야 끝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뒤통수를 지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뜨끈뜨끈 달아올라있는 것이 느껴졌다. 주말이 되면 공원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그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몇몇이 흰 그림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아이들도, 근처에 앉아있는 부모들도 누구 하나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평화롭고 한가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나무들 사이에 선 그것은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 사이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저녁이 되었어도 아직 해가 뜨겁다. 미지근한 바람은 습하고 눅진 공기를 몰아왔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오는 그 열기 사이에 소녀가 한 명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벤치에 앉은 채였다. 다른 곳의 그늘진 좋은 자리들이 전부 비어 있는데도 그랬다. 앉은 벤치는 정확히 흰 그림자와 마주 보는 자리에 있어, 마치 그것을 보기 위해 그 자리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 사이에 선 흰 그림자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어느새 저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수상하게 보였으려나 싶어 순간 흠칫했지만 딱히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소녀는 빙긋 웃으며 가벼운 목례를 보냈고, 그 또한 어색한 몸짓으로 화답했다.

 

그날부터 매일 그녀를 보게 되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보이지 않아도 집에 돌아올 때에는 어김없이 공원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흰 그림자가 정면으로 보이는, 매번 같은 자리였다. 정해진 일과처럼 매일 공원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나무들 사이로 길게 뻗은 몸을 보고, 그것을 바라보는 듯 앉은 소녀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몸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하면서도 때때로 고개를 들어 그 나무 사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이 곧게 나무 사이로 향하는 것이 정말로 그 하얀 것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껏 살면서 처음 만난 동지였다. 자신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그녀와는 얘기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말을 해본 것은 소녀를 본 지 닷새째가 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을 먹고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그 공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해가 완전히 졌는데도 여전히 공기가 후끈거리는 것에 올해도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짙은 남색 빛의 하늘 아래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엔 없겠지 싶어 별다른 기대 없이 시선을 돌리고, 그는 약간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바닥에 닿을 듯 길게 뻗은 긴 팔은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쪽이었다. 요 며칠간 익숙해진 얼굴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만도 않은 모양이다.

 

편의점으로 직행한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가장 무난한 하드를 두 개 골랐다. 빨간색과 하얀색이 꼬여있는 지극히 평범한 제품은 상대를 불문하고 가장 실패 위험이 적은 선택지로 보였다. 그 무난한 선택을 들고 다가간 후에야 소녀는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조금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준다. 자리에 앉아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었다.

 

“주는 거예요?”

“아, 혹시 이거 싫어해?”

“아뇨. 아이스크림은 다 좋아해요.”

 

잘 먹을게요. 아이는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잡아다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야기도 한 적 없는데. 애당초 오늘 처음 얘기해보는 사이인데도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 혹은 지난 며칠간의 만남이 경계심을 지웠는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덩달아 포장을 뜯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더위 때문인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조금 녹은 것 같다.

 

뜨뜻한 바람 끝에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실려온다. 조금씩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이상할 정도로 마른 하얀 몸이 보였다. 언제나의 흰옷이 가로등에 물들어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그 광경은 평소보다도 한층 더 이상해 보였다. 역시 보이는 거네요. 어느 샌가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운 소녀가 빈 나무 막대기 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역시. 그 단어 선택에 확신이 섰다. 너도 보이는구나. 그렇게 묻자 아이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에요?”

“아니, 가끔 봐.”

“그래요? 원래 그런 체질?”

 

사고가 났던 때의 일과 그 이후로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소녀는 그 말들을 의심하지도, 비웃지도 않고 들어주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니 온갖 쓸데없는 것까지 말이 술술 나왔다. 여러 가지 별거 아닌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과 저 하얀 것을 보게 된 날부터의 이야기를.

 

대강 얘기를 끝낸 후엔 아이와 메신저 친구 등록을 했다. 재이라는 그녀의 이름은 조금 신기하게 들렸다. 온갖 이상한 것들로 곤란할 때 연락하라기에 퇴마 같은 일을 하냐고 물었다. 아이는 짓궂은 얼굴로 히죽 웃었다. 뭐, 그 비슷한 거예요.

 

 

그날 이후 매일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공원 앞을 지날 때마다 잠깐씩 들러 재이를 만났다. 별로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잠깐 앉아 그 흰 그림자를 보고, 오늘도 덥다는 둥, 차라리 바람이 안 부는 게 낫다는 둥의 잡다한 말을 했다. 시야에 걸린 하얀 그림자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다.

 

재이가 공원에 머무르는 것은 관찰을 위해서라고 했다.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는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약간 고민한 후 잘 모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