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 장르: 추리/스릴러
  • 평점×9 | 분량: 83매
  • 소개: 엄청나게 운 좋은 꿈을 꾼 날, 나는 마음 설레하며 출근 전에 복권을 산다. 하지만 그날 아침,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데&#... 더보기
작가

운수 좋은 날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흔들흔들, 흔들흔들.

 

덜커덩 덜커덩.

 

나는 한가로운 시골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즐겁다. 집이 어디더라. 내가 누구더라. 하여튼 집, 이라는 생각만 하면 배 안 쪽이 따뜻해진다. 집은 늘 좋은 것이다.

 

버스가 덜컹 하며 힘겹게 언덕을 오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낮은 산과 하얀 구름. 그 아래 상추와 고추를 심은 밭에서 할머니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고 싶은 생각을 애써 눌렀다. 그만큼 이상하게 들뜨는 오후였다.

 

“와하하!”

 

“꺄하하하하! 진짜 웃겨.”

 

갑작스레 들려오는 경망스러운 웃음소리에 절로 이마에 주름이 졌다. 범인은 내 앞과 옆에 앉은 한껏 멋을 부린 양아치 삼총사다. 여자 하나, 남자 둘이었다.

 

남자 중 한 명은 더벅머리에 빨간 마후라를 두른 촌스러운 놈이고, 다른 한 명은 주걱턱에 청자켓을 입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웃음을 질질 흘리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여자는 사각턱에 단발머리에 크고 째진 눈을 했다. 검은 옷과 검은 치마로 뚱뚱한 몸을 감추고 커다란 입으로 연신 맞장구를 치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셋을 재수없는 놈, 시끄러운 여자, 촌스러운 놈 순으로 째려보았다. 순간 세 명이 조용해졌다. 재수없는 놈의 눈초리가 사나워진다. 이것들과 싸움을 벌여야 하나. 나는 어깨를 긴장시켰다.

 

갑자기 내 옆에 앉은 촌스러운 남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많이 시끄러웠죠?”

 

다행이다. 좋게 넘어가려나 보다. 안도감이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걸 숨기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돈 줄게요.”

 

남자가 지갑을 꺼냈다. 지갑은 엄청나게 두둑했다. 나는 크게 놀랐다. 저 많은 돈이 다 전단지는 아닐 것이고. 참 나. 옷 살 돈도 없어보이는 촌스러운 놈이 이런 부자일 줄이야.

 

남자가 지갑에서 하얀 종이 하나를 꺼낸다. 주머니에서는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저 종이는 수표일까? 얼마짜리일까? 남자가 두 개를 겹쳐서 나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2억입니다. 봉투는 현금, 종이는 수표에요. 절대로 버리지 마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고. 꼭 갖고 있어요. 꼭. 내 말 명심해요.”

 

“뭐요?”

 

나는 인상을 썼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세상 부자놈들이 다 이 놈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놈은 분명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굽신대는 내 모습을 보려고 장난 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남자가 다시 권했다.

 

“받아요. 사양하지 말고. 잘 간직해요. 절대 잊어버리지 마요.”

 

뭐야. 혹시 진짜인가?

 

다른 일당들이 경악하고 있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다. 저 놈에게 정말 저 돈을 줄거야? 하고 시선으로 물어보고 있다. 마후라 남자가 둘을 흘깃 쳐다보자 둘은 시선을 피했다. 역시 돈 있는 놈이 오야지.

 

“자. 받아요.”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돈을 받아, 시장바구니 같은 내 싸구려 가방에 대충 던져 넣었다. 최대한 시크하게. 최대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듯이. 하지만 내 가방이 담기에 이 돈은 너무 큰 돈이다. 남자가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해다.

 

“어서 내려요. 이건 당신이 탈 버스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 거니까. 다음 정거장에 은행이 있으니까 바로 예금해요. 농협이에요!”

 

남자가 기사에게 신호를 하자 텅, 하고 버스가 선다. 마침 정거장이다. 칠이 다 벗겨지는 정류장 표시가 비스듬히 서 있다.

 

이 부자가 정거장을 알아보고 신호를 한 것일까? 아니면 이 버스가 진짜 남자의 버스인가? 이 사람이 우리 마을 유일의 버스회사 사장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나는 다른 일당들이 내 돈을 빼앗을까 봐 부리나케 버스에서 내렸다. 등 뒤에서 그 놈들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겠지. 날 비웃으며 은행으로 가나 안 가나 내기를 하고 있겠지. 그 부자 놈은 분명히 내가 은행으로 달려간다는 데 걸었겠지.

 

버스가 떠날 때까지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저 놈들이 없어질 때까지 은행으로 가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내 앞으로 가질 않는다. 기사는 뭐 하는 거야! 저 놈들이 정말로 버스를 전세 냈나? 왜 버스가 안 가지?

 

저 앞에 농협이 보인다. 손바닥에 땀이 좍 났지만 뒤의 놈들이 볼까 봐 바지에 닦지도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줌마 하나가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왜 웃는 거야? 내가 가방을 너무 안고 있나? 나를 지나쳐 걷는 모든 사람들이 도둑놈으로 보인다. 빨리 예금해야 하는데. 그래야 발 뻗고 자는데.

 

2억. 이 가방 안에 2억이 있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정도면 대출을 다 갚고도 남는다. 이제 내 인생은 달라질 거야!

 

왜 버스가 안 가!

 

나는 결국 뒤를 홱 돌아보고 말았다.

 

 

 

나는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심장이 혈관을 뜯어발기고 도망치려는 듯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진정해라. 진정해. 꿈일 뿐이야.

 

하지만 꿈의 내용은 너무나 생생했다. 눈은 은행을 찾아 흐린 오후의 시골길을 – 근데 이상하게 영등포시장과 비슷하더라 – 미친 듯이 헤메고, 등은 버스 안의 그들이 볼까 봐 한껏 긴장시킨 채로 버스에서 내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현실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다.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각성해서 다시 진정시키기엔 무리다. 정말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듯이 쨍쨍한 꿈이다. 나는 폰을 집어들고 꿈의 내용을 검색했다.

 

나 같은 꿈을 꾼 직장인이라면 다들 한 가지 가능성부터 검색할 것이다. 맞다. 로또. 인터넷이라 그런지 해석이 참 다양했다. 역시 믿을 게 못 된다. 누군가가 돈을 건네주는 것은 평소에 고민하던 일이 풀릴 징조. 수표를 받는 건 큰 걱정거리가 생길 징조. 돈다발을 받았다면 백프로 로또 맞을 꿈.

 

-진짜 로또? 진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진짜 로또맞는 것 아닐까? 로또를 사야겠다. 지금 당장.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세수를 했다. 까칠한 얼굴이라 세수를 하든 안 하든 차이 나는 게 없었다.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와 어제 의자에 걸어 둔 와이셔츠를 꺼내 입었다. 늘 같은 흰색이라 어제 입은 것 또 입어도 된다. 어제 입었던 바지를 꿰어 입었다가 벗어 던졌다. 어제 입은 바지는 헐어서 사타구니에 구멍이 났었다. 지난번에 버릴려고 했는데. 어제 하루 종일 다리를 옹송그리고 다니느라 혼났다. 근데 그걸 버리고 나니까 입을 바지가 없다. 지난주에 빨았어야 하는데 안 빨았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 로또 될 건데 뭐 하고 지난 주에 안 빤 바지를 다시 주워 입었다. 쿰쿰한 냄새 때문에 기분 나쁘다.

 

까칠하고 시꺼먼 얼굴에 스킨로션을 대충 치덕치덕 쳐발랐다. 얼굴을 한 손으로 마구 문지르며 된다, 된다, 된다고 주문을 외웠다. 문 옆에 던져 놓은 가방을 들고 손에 양말을 들고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에서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난다. 여자친구다. 무슨 꿈 꿨냐고 물어볼까 봐 마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댔다. 빨리 와. 빨리! 마주치기 싫단 말이야.

 

현관문 뒤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문을 열고 퉁퉁 부은 얼굴을 내밀며 자기야 벌써 가? 왜 벌써 가?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긴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저벅저벅 하더니 다시 방문 안으로 사라진다.

 

저 여자는 매사에 저런 식이다. 어우 짜증나.

 

가장 친한 10년지기 친구인 아반떼 s10으로 가는데 아차, 머리를 안 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간 아침부터 스스로를 채찍질한 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아침부터 뭐 할라고 이렇게 서두른담. 혼자 꼭두새벽부터 힘들어 죽겠네. 그래도 이제 와서 집에 들어갈 순 없지. 여자친구랑 마주치기 싫으니까. 회사에서 대충 감지 뭐. 핸드워시로.

 

추레한 꼴로 출근하는 나를 경비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요즘 세금 때문에 저러나. 맨날 야근하더니. 하고 수군댈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며 죄인처럼 정문을 넘었다.

 

아! 로또 사야지! 그럴려고 일찍 왔잖아!

 

부리나케 뒤돌아 정문으로 뛴다. 경비원들이 하하하 웃는다. 어이! 가방 놓구 가요오.

 

하지만 가방 놓을 시간 따위 없다! 꿈을 꾸었으면 바로 사야 약빨이 많이 받지 않겠는가. 나는 차가 달려오거나 말거나 4차선을 그냥 내달렸다. 구두 신은 발이 무겁고 아프다.

 

동료들이 보기 전에 로또 사고 머리 감으려면 시간이 없는데. 물어보면 에라 어제 술 먹었다고 하자. 꿈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 된다. 부정 탄다고.

 

로또 되면 뭐 하지?

 

“로또 한 장 주세요!”

 

헉헉거리며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내가 소리쳤다. 계산대로 다가가 보니 아무도 없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이렇게 사람이 뛰어 왔는데!

 

저 안쪽에서 비척대며 누군가 걸어온다. 알바생이다.

 

“로또요?”

 

“네. 한 장. 아니 다섯 장.”

 

점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시계를 가리켰다.

 

“로또 6시부터 팔잖아요. 그리고 우리 로또 없어요.”

 

“아이 씨!”

 

점원이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인상을 쓴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로또를 검색했다. 나눔로또 사이트에서 로또를 판단다. 들어가보니 다른 복권은 다 되는데 로또만 인터넷 구매가 안 된다. 그 밑에 연금복권과 인터넷 게임은 된단다. 아 뭐야!

 

순간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게 정말 로또 꿈이라면 숫자가 나왔겠지. 근데 숫자가 안 나왔잖아. 그러니까 다른 복권을 사라는 징조인 게 틀림없어.

 

그래. 맞아. 연금복권을 사자!

 

나는 3분 만에 결재를 끝냈다. 결재 금액은 5천 원.

 

알바생은 미친놈 다 보겠네, 요즘 경기가 참 안 좋지 하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생각해 보니 나는 카운터에서 상품도 안 가져오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좀 있다 살게요.”

 

“네에.”

 

알바생이 한숨을 쉬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유리창에 마련된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물 한잔 하고 싶지만 저 알바를 또 불러내야 한다.

 

저 애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야간 알바 얼마나 힘든데. 저 애는 저 좁은 창고같은 곳에서 밤새도록 있어야 한다. 나도 해봐서 잘 안다. 물론 난 네거리에서 알바를 했다. 여긴 네거리 편의점들처럼 한 밤중에 술 취해 들어오는 인간들도 없다. 여긴 굉장히 근무여건이 좋은 편의점이다.

 

갑자기, 나는 알바 사정을 봐 줄 필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님이고, 회사에서도 내 할 일 다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상대를 배려해야 해? 나는 생수 하나를 카운터에 쾅 올려놓았다.

 

“계산이요!”

 

알바생이 다시 비척거리며 나온다. 아 오늘 재수 X나 없네 하는 표정으로 바코드를 탁 찍고 계산대를 탁탁 눌렀다.

 

“1200원이요.”

 

나는 카드를 내던졌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손으로 탁탁탁탁탁 탁탁탁탁탁 하고 테이블을 쳤다. 누가 보면 무슨 조현병 걸린 인간인 줄 알리라.

 

그나저나 아까 결제를 얼마 했더라. 5천 원이다. 5천 원 어치면 5장이다. 이왕 사는 거 10장 살까.

 

스마트폰으로 꿈해몽을 검색하며 멍하니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6시도 안 됐다. 몇 조로 하지. 1조부터 6조까지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1조. 그럼 번호를 뭐로 하지. 3월 5일이니까 35로 시작할까? 그냥 집에 가는 길에 로또 살까? 근데 5천 원 결제 해 버렸는데.

 

모르겠다. 들어가면서 생각하자. 힘들다. 나는 번호 자동 선택으로 한 장을 산 후 일어섰다. 마이너스 천 원이다.

 

“들어가세요오.”

 

나는 아까 잠에서 깬 알바생처럼 비척거리며 편의점을 나섰다. 회사 가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힘이 하나도 없다. 아침 먹어야겠다. 아침은 천 원이다. 터덜터덜 회사로 들어오는데 경비 아저씨들이 킬킬댄다.

 

“어이. 박 대리님! 애인 잘 만났어?”

 

“그런 거 아니에요.”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황급히 변명했다. 경비대장 할아버지가 헐헐헐 웃었다.

 

“아니 아침부터 웬 뜀박질이유? 뭐 빚쟁이 수금이라도 하러 왔대?”

 

“아니 아니라니깐요.”

 

사람들한테 소문 다 나겠구만. 다 필요 없고 머리부터 감자. 나는 자리에 가방을 던져 놓고 화장실로 가 셔츠를 벗어던졌다. 어푸어푸, 어푸어푸 하며 핸드워시로 머리를 감는다. 5분도 안 걸렸다. 대충 털어내고 화장실 변기뚜껑 위에 앉아 어우우 하고 늘어져 있다가, 목의 물을 대충 닦고 셔츠를 입었다. 질척질척하니 기분이 안 좋다. 일찍 출근했으니 한 숨 때릴 요량으로 회의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데 사장님 의자에 앉아 볼까. 안 되지. 걸리면 소문 나니까. 나는 맨 끝에서 두 번째인 대리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 회사 사람들이 아침에 무슨 일 있었냐 물어보면 뭐라고 변명할까 고민하다가, 1분도 지나지 않아 선잠에 빠져들었다.

 

 

 

“아줌마 누룽지 좀 주세요.”

 

“네에.”

 

내 몸처럼 축축 쳐진 누룽지가 냄비에 담겨 나왔다. 나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조금씩 퍼먹으며 오늘 꾼 꿈의 내용을 되씹었다. 잊어 버리면 안 되니까 말이다.

 

벌써 7시 반이다. 8시부터는 근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난 거 가지고 이렇게 피곤하네. 수요일이라 그런가. 오늘 회식이 없었으면 좋겠다.

 

“박 대리.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매사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서 대리가 그새 아는 척을 했다.

 

“아침에 뭐 어딜 그렇게 뛰어갔어?”

 

“편의점 갈라고. 여명 먹을라고.”

 

“하하. 어제 술 많이 먹었는가보지?”

 

“어. 야 정문에다 부침개 만들 뻔 했어.”

 

“하하하.”

 

웃긴 하지만 눈에는 실망이 역력하다. 불륜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별 거 아니었지? 속았지? 실망했지? 나는 신경 안 쓰고 누룽지를 비우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벌써 타닥타닥 하는 키보드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아오 힘들어. 겨드랑이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뭐 하는 짓이야. 일이나 좀 해 놓을 걸. 나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금복권이라니 나한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진짜 멍청하다. 아침부터 뭐하러 힘을 뺐을까. 오후나 저녁에 사도 되는데. 내일 사도 되고.

 

“박 대리.”

 

차장이 부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네 차장님.”

 

차장이 어제 내가 올린 결재문서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네?”

 

“이게 뭐냐고.”

 

저건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죄송합니다.”

 

“야!”

 

이후의 말은 생략하겠다. 뭐 늘상 있는 일이니까. 그냥 이건 하나의 아침 방송이다. 사내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싸랑둥이, 정차장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쉬, 정 차장의 모닝라디오! 출발합니다. 부릉부릉!

 

“가!”

 

라디오 끝.

 

“죄송합니다.”

 

자리에 앉아서 기분 전환할 겸 다시 복권 번호를 골라 본다. 그때 갑자기!

 

“어!”

 

기억났다. 꿈에 나온 세 명중 내 앞자리에 앉았던 남자 하나. 정 차장하고 진짜 비슷하게 생겼다. 정 차장의 특징인 주걱턱. 청자켓은 지난 달 야유회 때 입고 나와서 비웃음을 받았던 그것. 껌은 밥을 먹으면 이빨 닦이 싫어서 점심 때마다 씹는 거. 그 웃음은 부장 앞에서 짓는 비굴한 웃음.

 

뭐야. 갑자기! 이거 개꿈이었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 차장한테 갈굼 당해서 그런 줄 알지만 아니다. 정 차장이 아무리 갈궈도 난 괴롭지 않다. 이젠 정말 괜찮다. 그냥 복권 숫자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옆 자리의 여직원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동정받고 싶지 않아서 핸드폰에 집중한다. 이번 숫자는 어떻게 할까? 아 돈 아까워.

 

“박 대리.”

 

부장이 부른다. 나는 얼른 자동 선택을 누르고 일어섰다. “네!”

 

부장이 뭐라뭐라 말을 한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서없는 말이지만 결론은 열심히 해라 이거다. 분명 아침부터 갈굼 당해서 가라앉은 팀 분위기를 회복시키려고 하는 거다. 하지만 정 차장이 팀에 버티고 있는 한 그럴 가능성은 없다. 꿈에 나왔던 세 명 중 두 명이 또 회사 사람 누구와 비슷한가 열심히 생각하며 오전을 보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왔다. 몽롱해서 입맛이 하나도 없지만 밥을 먹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정 차장에게 트집을 잡힌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양의 밥을 받아 열심히 먹었다. 밥이 많거나 적으면 트집을 잡히니까. 스스로를 위로해 보자면 이 정도는 양반이다. 여직원들은 정 차장을 견디다 못해 벌써 세 명이나 회사를 나갔다. 정 차장이 부장에게 아부를 떨며 뭐라뭐라 한다. 짜증이 나 죽겠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게 날 위한 길이다.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정 차장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어허! 정 차장. 담배나 한 대 피지.”

 

부장이 드디어 일어난다. 팀원들은 눈치를 보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나도 평소 같으면 서 대리나 직원들과 커피나 한잔 했겠지만 오늘만은 할 일이 있다.

 

나는 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뭐야. 드디어 뛰쳐나가나 보네. 결국 그만두나 보지. 어디 좋은 데 붙었나. 의심에 가득찬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나는 핸드폰을 켰다.

 

이번에는 진짜 잘 생각해 보자. 무슨 숫자를 할까? 아까 두 개나 1조를 했으니까 하나는 3조를 할까. 아니면 5조를 할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