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렘

  • 장르: 판타지 | 태그: #이영도 #이영도단편 #골렘 #핸드레이크 #솔로처 #헐스루인 #공주 #마법사 #실험실 #축제
  • 평점×104 | 분량: 126매 | 성향:
  • 소개: “뭐야? 어, 잠깐! 저 골렘이 나를 공격한 거야? 왜?” 데이트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핸드레이크의 실험실로 찾아온 솔로처. 핸드레이크는 대화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 골렘에게 연구실 ... 더보기

골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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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봉착한 문제를 세 단어 내외로 말해 보겠나?”

“옴짝달싹 못 할 상황.”

“진부해. 턱없이 진부해.”

“이런 상황에서 기발하고도 진보적이며 상큼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가혹합니다.”

핸드레이크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어쨌든 옴짝달싹 못 할 상황인 것은 확실한데, 나는 그런 상황이 싫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 번 눈앞의 그림자를 노려보며(아마 열일곱 번째 아니면 열여덟 번째일 것이다) 턱의 상처를 긁적거렸다. 조금 전 자신의 성질을 못 참아서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가다가 멋진 어퍼컷을 맞아서 생긴 상처였다. 계속 그런 식으로 긁적거렸다가는 상처가 크게 덧날 거라고 경고하기도 이젠 지쳤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상처가 패혈증으로 진전되어 버리라고 충심으로 기원드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야 없는 핸드레이크는 내 우울한 표정을 보고서는 다정하게 말했다.

“보라고, 솔로처. 전혀 걱정하지 마. 자넨 틀림없이 데이트에 나갈 수 있네. 확실하다고!”

“……사부님, 지금 데이트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부님과 저는 가장 불명예스럽게 죽은 마법사의 인명록에 실릴 가능성이 퍽 높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굶어 죽은 마법사라는 것은 아무래도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나는 그런 인명록에 실릴 수 있네. 하지만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잖은가.”

“할 말이 없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근슬쩍 마법사인 척하지 말게. 나는 아직까지 자네를 마법사로 인정한 적 없네.”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문을 틀어막고 서 있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만들어낸 작자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흉악 무쌍하게 생긴 그 골렘을.

사부님의 연구실 문은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다. 연구실로 들어오는 재료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기 때문에 사부님은 그 문을 꽤 큼직하게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연구실의 문을 틀어막고 있는 골렘 때문에 지금 그 문은 몹시 작아 보였다. 어깨 위로 플라스크들을 죽 세우면 최소한 열 개는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어깨, 궁성 임펠리아의 가장 큰 기둥과 유사한 팔, 조금 전 핸드레이크의 턱을 부숴놓을 뻔한 주먹 등은 도대체 피해자의 안위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있다. 저 끔찍한 피조물이 구사한 폭력의 첫 번째 피해자는 그 창조자가 되었으니까.

핸드레이크는 다시 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이건 논리의 문제야, 논리라고. 하지만 모든 논리에는 빈틈이 있게 마련이네. 왜 그런지 아나?”

“왜 그렇습니까?”

“그 논리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야. 하하하!”

“별로 우습지 않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뭐라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 가련한 마법사를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 나이가 되도록 자기 성질을 못 참고 괴팍하게 군단 말인가. 나는 골렘을 쳐다보기도 지쳐서, 이 연구실에 있는 단 하나의 창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화창했다. 오늘의 봄맞이 축제는 최고일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 축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순서가 빠질지도 모르겠다. 시민들은 모두 저녁 식사 시간 전의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불꽃놀이를 담당한 내가 이 수상쩍은 연구실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핸드레이크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거지?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변명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것이라고는 마나의 법칙밖에 없는 궁정 마법사의 제자다. 그런데 불꽃놀이를 담당하게 된 궁정 마법사의 제자에게 어느 상냥한 귀족 아가씨가 불꽃놀이가 끝나고 나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기까지는 일종의 기적이며 기분 좋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행운이 궁정 마법사의 제자를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그가 아는 유일한 조언자를 찾아온 것이다.

한심하긴. 어쩌자고 마법사에게 레이디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의 에티켓 따위를 물어보러 왔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 인생 전반에 걸쳐 가르침이 필요할 때 찾곤 했던, 그러나 소득은 퍽 적었던 사람을 다시 찾아왔다. 그것이 오늘 오후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상황의 시작이었다.

내가 찾아왔을 때 핸드레이크는 무슨 실험에 성공한 모양인지 퍽이나 기분 좋은 상태였다. 물론 아무리 제자에게라도 실험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분 좋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했다. 제기랄!

“여어! 솔로처! 이 좋은 날씨에 그런 얼굴을 하고 찾아온단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지금 날씨에 대해서 한담을 나눌 기분이 아닙니다, 사부님.”

“왜?”

“조언을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 그런데 좀…….”

“비밀?”

“예.”

핸드레이크는 아주 기분이 좋았기에 제자를 위해 선심을 쓰고 싶은 생각마저 들고 말았음이 틀림없다. 그는 연구실 한편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보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향해 손짓하는지 몰랐으나 잠시 후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들려온 쿵쿵거리는 소리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백 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몸무게를 강조하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나타난 골렘은 핸드레이크 앞에서 멈춰 명령을 기다렸다.

“저 문을 막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해.”

골렘은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묵묵히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핸드레이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골렘은 즉각 문으로 걸어갔다. 그 충성스러움은 핸드레이크를 다시 한 번 뿌듯한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이 고민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더듬거리는 어투는 핸드레이크를 약간 짜증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잠자코 끝까지 들었고, 다 듣고 나서는 그다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우핫하하하! 데이트인 거냐?”

“그냥 저녁 식사입니다.”

“그럼 데이트로군. 핫하하! 저 사우스그레이드에서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걸. 콧물을 마셔대고 있던 그 꼬마가 이젠 데이트 신청까지 받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군. 시간의 놀라움이여! 그 쾌속이 비정하게까지 느껴지는구먼.”

핸드레이크는 감회 어린 눈길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수상쩍은 물건들이 가득 매달려 있는 천장은 아무래도 바라보면서 시적 감흥을 떠올릴 광경은 아니었기에 핸드레이크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사부님, 도대체 여자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까?”

“보편적인 이야깃거리들이 있지 않은가? 지나온 날들. 그래, 주로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더군. 어전 회의나 각료 회의가 아닌 바에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그렇잖은가?”

“그 정도는 저도 짐작합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과거라고는 사부님 명령 때문에 괴상망측한 재료들을 찾아 헤맨 이야기밖에 없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귀족 가의 영양을 모셔놓고 바실리스크 눈알 모으던 이야기나 오크 십이지장 구하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기억나는군. 그때 정말 황당했지. 오크는 십이지장이 없더라고.”

“……사부님이 해부를 이상하게 하신 겁니다.”

결국 핸드레이크와 나의 대화는 마법사와 그 제자의 대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격렬한 토론으로 전개된 우리들의 대화는 결국 오크에게도 십이지장이 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끝까지 수긍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다시 몇 마리 잡아서 정확하게 해부해 보세나.”

“돌연변이를 붙잡지 않는 이상, 반드시 십이지장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많이 늦었군요. 아무래도 궁정 악단이나 가극단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핸드레이크는 잠시 대화의 맥락을 놓치고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네. 나랑 같이 시내로 가세나. 펍(pub)에 가서 물어보도록 하지.”

기발한 방법이었다. 심지어 나까지도 역시 사부님이라는 둥의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꽉 막힌 마법사와 그의 새파란 제자가 펍에 들어가서 ‘실례합니다만 레이디와의 우아한 교제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해괴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펍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핸드레이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문 쪽으로 다가섰을 때였다.

문을 막고 서 있던 골렘은 상당히 음침한 눈빛을 번득이며 위협적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순식간에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사, 사부님!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핸드레이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하마터면 바이서스의 궁정 마법사는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내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잡아채었을 때 골렘은 이미 그의 두개골을 찌그러트리기에 충분한 속력으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골렘의 팔은 아슬아슬하게 핸드레이크의 머리를 지나쳤고 나와 핸드레이크는 방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이고, 허리야…….”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다가 손을 헛짚고 다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핸드레이크가 나동그라진 자세 그대로 어이없어하며 골렘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그 표정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웃고 말았다.

“하하하!”

내 웃음소리에 핸드레이크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였냐?”

“클클……. 골렘이 우리를 공격한 것입니다만.”

“그런데 넌 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냐?”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사부님의 그 높은 학식을 담은 뇌수가 이 방바닥에 흘렀을 테니까요.”

“뭐야? 어, 잠깐! 저 골렘이 나를 공격한 거야? 왜?”

나는 그제야 일어날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따라 일어섰지만, 그 눈은 문 쪽에 그대로 선 채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골렘에게 못 박혀 있었다. 나 역시 골렘을 훔쳐보며 흩어진 옷을 추스렸다.

“하하, 아무래도 아까 명령을 잘못 내리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뭐? 어, 으어!”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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