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필립 하덴과 케티와요 왕]
필립 하덴은 줄루 족에게 물건을 대고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끝이 짧은 수염과 곱슬머리, 예리한 눈매, 윤곽이 뚜렷한 가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아서 마흔 줄에 접어들고도 외모가 돋보이는 남자였다. 살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쨌든 그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고, 영국에서 사립학교를 나와 대학 교육까지 받았다는 말도 나돌았다. 이따금 고전 작품을 적절히 인용할 줄 알았고, 품위 있는 목소리에 어울리는 소양과 야만인들과 거래하는 험한 장사치들에겐 흔치 않은 거동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그를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문제가 있어 나탈로 왔다는 것과 그와 동시에 시름에서 해방된 고향 친척들이 그의 이민을 무척 반겼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식민지에서 보낸 열대여섯 해 동안 하덴은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어떤 일에도 능하지 못했다.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했기에 친구 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차츰 친구들은 그에 대한 막연한 불신을 품게 되었고, 한동안 그러다가 그가 머물던 곳에서 갑작스레 종적을 감추어 미덥지 못하다는 평판과 얼마간의 빚을 남긴 채 관계를 끝내곤 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그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필립 하덴은 몇 년간 물품 수송에 관여했다. 더반이나 마리츠베르그에서 황소 수레에 물건을 싣고 내륙의 여러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동안 여러 번 겪은 말썽 때문에 그는 한동안 이 호구지책에서 손을 놓아야 했다. 트란스발의 위트레흐트에 있는 작은 국경 도시에 도착하여 그곳의 상점 주인에게 마차 두 대 분량의 잡다한 물품을 인도할 때였다. 그는 그때서야 브랜디 여섯 상자 가운데 다섯 상자가 짐마차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덴은 짐꾼으로 썼던 아프리카 흑인 아이들을 야단치는 것으로 문제를 설명했지만, 입이 거친 상점 주인은 대놓고 그를 도둑이라 부르며 운송 비용을 치르길 거부했다. 두 남자는 서로 칼을 뽑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말릴 겨를도 없이 상점 주인은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날 밤 사건이 재판관이나 보안관에게 넘어가기도 전에, 하덴은 몰래 마을을 빠져나와 황소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나탈로 되돌아왔다. 그곳 역시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던 그는 마차 가운데 하나는 뉴캐슬에 남겨놓고, 흑인 아이와 나머지 마차에 담요니, 옥양목이니, 쇠붙이 등의 짐을 잔뜩 쌓은 다음, 어떤 보안관도 찾아올 수 없을 만한 줄루 랜드로 넘어갔다.
원주민들의 언어와 관습을 잘 알았던 덕에 그는 꽤 만족스러운 거래를 할 수 있었고, 곧 가져온 물건과 교환하여 얼마간의 현금과 소 떼를 장만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 부상을 당한 남자가 아직도 복수를 맹세하면서 나탈의 관리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순간만큼은 다시 문명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교역할 물품을 새로 공급받을 때까지는 더 이상 사업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하덴은 곧 묘안을 하나 짜냈다. 가깝게 지내던 원주민 부족의 족장을 책임자로 하여 자신의 소와 마차를 국경선 너머로 보내고, 자신은 케티와요 왕에게 원주민 영토에서의 사냥 허락을 구하러 울룬디로 향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인디언 지도자들이나 부락 족장들은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하덴이 이들을 찾아갔던 때는 1878년으로 줄루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케티와요 왕은 영국 상인을 비롯한 다른 상인들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지만 상인들은 왕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케티와요와의 면담을 통해 하덴은 그 이유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왕의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심부름꾼이 그에게 와서 ‘지축을 흔드는 코끼리’가 그를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전했다. 명에 따라 그는 수천 개의 오두막을 지나고 ‘위대한 땅’을 지나 작은 뜰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근엄하게 생긴 케티와요가 망토 모양의 표범 가죽 외투를 두른 채 의자에 앉아서 보좌관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를 존귀한 존재 앞으로 이끌고 온 심부름꾼은 손과 무릎을 땅에 짚고 엎드려 ‘바에테’를 외치면서, 몸을 낮춘 채 앞으로 나아가 백인 남자가 왔다고 전했다.
“기다리게 해라.” 왕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보좌관들과 논의를 계속했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하덴은 줄루 인의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왕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그의 귀에까지 말이 들렸다.
“뭐라고!” 뭔가를 간청하고 있는 듯한 쭈글쭈글한 얼굴의 늙은 남자에게 케티와요가 외쳤다. “흰둥이 하이에나들이 그렇게 덤비게 하다니, 내가 개라도 되나? 이 땅은 내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내 앞에는 내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던가? 죽이든 살리든 백성들은 내 것이 아니던가? 분명히 말하건대 난 저 쥐새끼 같은 흰둥이 놈들을 짓밟아버리겠어. 내 군대가 그들을 몽땅 먹어치울 것이다. 그게 내 뜻이다!”
다시 말라빠진 늙은이가 끼어들었다. 분명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자이리라.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일어서서 바다 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의미심장한 몸짓과 슬픈 듯한 태도를 보니, 어떤 행동을 하면 재앙이 뒤따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한동안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왕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의 눈에서는 분노로 인해 불똥이 튀었다.
“들어라! 오래전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제야 확신하겠구나. 너는 매국노이다. 너는 솜프세우의 개이자, 나탈 정부의 개다. 그리고 날 물어버릴 다른 사람의 개는 내 집에 키우지 않을 것이다. 저자를 끌어내라!”
* * *
둥글게 둘러앉은 인디언 지도자들은 웅성거렸지만, 그 늙은이는 결코 겁내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곧 그를 죽여버릴 병사들이 다가와 거칠게 붙들었을 때조차 말이다. 잠시 후 그는 입고 있던 망토 자락으로 얼굴을 덮더니 위를 올려다보며 명료한 목소리로 왕에게 말했다.
“오, 왕이시여. 전 몹시 늙은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샤카(무수한 원정으로 줄루 족의 영토를 넓힌 줄루 왕국의 시조) 추장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임종 때엔 백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백인들이 왔고 그땐 ‘피의 강’ 전투에서 딩간 추장님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들은 딩간 추장님을 죽였고, 그 후 수년 동안 저는 아버님이신 판다 님의 보좌관으로 있었습니다. 오, 왕이시여, 투겔라 전투에서 형님 되시는 움불라치 님과 그분의 수천 백성들의 피로 회색 강물이 시뻘겋게 물들었을 때, 전 당신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 왕이시여, 그 후 저는 당신의 보좌관이 되었고 솜프세우가 그 머리 위에 왕관을 얹어주고 왕께서 솜프세우에게 협의 조항을 약속하실 때에도 전 곁에 있었습니다. 왕께서 지키시지 않은 그 약속들을 하실 때 말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제게 싫증을 냅니다. 그건 좋습니다. 전 몹시 늙었고, 늙은이라면 그렇듯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았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왕의 위대한 삼촌이셨던 차카의 예언, 백인들이 당신을 이길 것이며 그 속에서 당신은 죽음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그 예언은 실현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 왕이시여, 당신께선 싸울 것이니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왕을 위해 싸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왕께서 내리신 죽음이 제게는 가장 적절한 최후인 듯싶습니다. 평화롭게 잠드소서. 오, 왕이시여, 안녕히 계시옵소서, 바에테!”
한동안 그곳에는 독재자가 그의 명령을 거두어들이기만을 기다리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왕은 동정하거나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연민을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저자를 끌어내라.” 왕이 명령을 다시 내렸다. 그러자 “안녕히!”라는 한마디를 입술에서 흘리며 노인의 얼굴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그리곤 병사의 팔에 이끌려 늙은 전사이자 보좌관은 발을 끌며 죽음의 장소로 나아갔다.
하덴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 상황을 보고 들었다. “부하도 저렇게 취급하는 사람이니, 나한테는 어떻게 하려나?”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나탈을 떠난 다음에, 영국인과 저들 간의 사이가 틀어진 게 틀림없다. 추장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할 작정인 거야. 뭐야? 그렇다면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
그때 언짢은 마음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왕이 고개를 들었다. “저 이방인을 데려와라.”
하덴은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가, 영국인의 관습에 따라 케티와요 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함을 가장한 채였다.
놀랍게도 왕은 그 손을 쥐었다. 방문객의 크고 마른 체격과 말쑥하게 다듬어진 얼굴을 흘깃 보며 왕이 말했다. “적어도 당신은 미천한 자는 아니군. 당신은 추장 족의 피를 타고났어.”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나직이 한숨을 쉬며 하덴이 대답했다. “저는 추장 족의 피를 타고 났습니다.”
“내 나라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가, 백인?”
“아주 작은 것입니다, 왕이시여. 왕께서도 들어서 알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만, 저는 이곳에서 무역을 하며 온갖 물건을 팔았습니다. 이제 나탈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버펄로와 다른 짐승들을 사냥하고자 왕의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건 들어줄 수 없다. 당신은 솜프세우나 나탈의 여왕 밑에서 일하는 인디언들이 보낸 첩자일 거야. 내 땅을 떠나라.”
어깨를 으쓱하며 하덴이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솜프세우든 여왕의 인디언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제가 돌아갔을 때 후한 대가를 지불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아무튼 그 전엔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선물이 하나 있는데 폐하께 먼저 드려야 하니까, 아니, 먼저 드리고 싶으니까요.”
“무슨 선물? 난 선물 따윈 필요 없다. 우린 여기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어, 백인.”
“그러시군요, 왕이시여. 제가 드리려는 건 그다지 값진 것이 아닙니다. 총 한 자루입니다.”
“총이라고, 백인? 어디에 있나?”
“여기에는 없습니다. 가져와야 했지만 폐하의 부하가 ‘지축을 흔드는 코끼리’ 님 앞에 무장을 하고 가는 것은 죽을죄라고 해서요.”
케티와요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귀에 빈정대는 어조가 거슬린 탓이었다.
“이 백인이 바치려던 것을 가져오게 하라. 그 물건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곧 하덴을 데려왔던 인디언이 문을 향해 날쌔게 달려나갔다. 얼마나 몸을 바짝 굽히고 달렸는지, 딛는 걸음걸음에 얼굴이 닿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인디언이 무기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리곤 총판을 안쪽으로 안고 왕에게 바치는 바람에, 총구가 그의 가슴팍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 지축을 흔드는 코끼리시여,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덴이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아랫사람에게 폐하의 심장을 피해 총구를 올려 들라고 명하시는 게 좋겠네요.”
“왜?” 왕이 물었다.
“지금 저 총은 공이치기가 젖혀진 채 장전되어 있거든요. 계속해서 지축을 흔들길 원하는 코끼리시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