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의 피비린내와 절규와도 같은 나무아미타불 소리가 사방에 진동하던 칼부림의 시대가 마침내 끝이 나고, 온 일본 열도가 태평성대로 접어든 에도 시대의 무쓰 국, 히로사키 번 아오모리 산의 깊숙한 곳에 두 인형가가 살았다.
그들 모두 인형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피부는 밀가루처럼 희었고, 눈동자와 머리칼은 숯처럼 검었다. 투명한 입술에는 늘 혈기가 돌았으며, 이목구비는 칼로 조각해놓은 것 마냥 오똑하고 섬세했다.
그들은 같은 스승을 두었다. 배운 솜씨 또한 같았으나, 만드는 인형은 전혀 달랐다.
사내아이 렌은 스승의 뜻을 따라 히나마츠리에 올릴 어여쁘고 아름다운 히나 인형을 만들었다.
반면 계집아이 사쿠라는 작고 아리따운 히나 인형 대신 사람보다도 더욱 사람 같은 인형을 만들었다.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사람인지 인형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한 인형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완성도만큼 작품에 대한 집착도 대단했던 터라, 렌이 히나 인형 열 개를 만들 때 사쿠라는 기껏해야 하나를 겨우 완성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두 남녀 모두 인형가로서의 타고난 자질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도 너무 달라, 언쟁은 하되 경쟁하려 들지는 않았다.
렌은 작고 어여쁜 것이 인형의 본분이라 보았으며, 사쿠라는 인간을 쏙 빼닮은 인형만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여인이 처음부터 그런 인형을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제대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던 8살 무렵, 두 남녀는 스승의 손을 하나씩 나누어 잡고 교토의 히가시야마에 들른 적이 있었다.
마침 히나마츠리였다. 사쿠라는 초라한 제 모습과는 달리 화려한 유카타를 입고 바둑판과도 같은 길거리를 쏘다니는 여자아이들을 가리키며 우는 소리를 냈다.
평소 같았으면 매정하게 팔을 잡아당겼겠지만, 스승은 그날만큼은 유난히도 따뜻하게 굴었다. 다이묘에게 납품한 히나 인형이 자그마치 두 배나 값을 높게 받은 덕분이었다. 스승은 사쿠라에게 고운 기모노를 사서 입혀준 것도 모자라 어여쁜 종이부채와 테마리 공까지 사서 양손에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이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조숙했던 렌은 수줍게 고개를 저으며 새 옷과 장난감을 모두 거절했다. 그저 좌판에 늘어놓은 과일 사탕 하나를 가리켜 받아 들었을 뿐이었다.
워낙 벌이가 좋으니 곧바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다. 스승은 료칸에서 하루를 묵고, 히가시야마의 사이후쿠지에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 해에는 유난히도 날이 따뜻해서 일찌감치 벚꽃이 흐드러졌다. 승려나 방문객, 스승과 제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벚꽃에 취해 넋을 잃은 와중에도 사이후쿠지의 주지는 마냥 평온한 얼굴로 대웅전에 앉아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벚꽃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앉아있던 주지는 마침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모두의 앞에 나서서 주름이 가득한 손을 뻗으며 이로하 노래를 읊었다.
色は匂へど 散りぬるを, 我が世誰ぞ 常ならむ, 有為の奥山 今日越えて, 浅き夢見じ 酔ひもせず. (향기로운 꽃도 언젠가는 져 버리거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누군들 영원하리. 덧없는 인생의 깊은 산을 오늘도 넘어가노니, 헛된 꿈 꾸지 않으리 취하지도 않을 터요.)
주지의 낭독은 탁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청아하면서도 맑게 퍼지는 울림이 있었다. 평범한 승려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행의 끝에 다다른 고승만이 낼 수 있을 법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그 시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주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불자 특유의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찰나와도 같은 경치를 즐기시느라 다들 여념이 없으십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참 오래도 하늘을 우러러보았으니, 이제는 땅을 한 번 보심이 어떠신지요?”
모두가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렌과 사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른 흙바닥에는 떨어진 벚꽃잎이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짓밟히고 짓이겨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렌은 그것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사쿠라는 모처럼 새로 산 나막신 밑창에 짓이겨진 벚꽃잎이 달라붙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연신 바닥을 탁탁 두드려댔다.
다음 순간, 주지는 여전히 인자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눈처럼 새하얗고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검게 시들고 짓이겨져, 끝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비단 꽃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니, 오늘은 여기 모이신 모든 분께 그 간단한 섭리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말을 마친 뒤, 주지는 승려들을 대동해 커다란 그림 한 폭을 펼쳐 보이게 했다.
아홉 장의 그림이 하나로 이어진 병풍과도 같은 거대한 그림이었는데,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안에 담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저마다 입을 틀어막은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구상도였다.
내장과 혈관에 가스가 차올라 여인의 시신이 잔뜩 부푼 모습은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내장과 혈액이 섞여 흘러나오는 그림에, 찢어진 피부 사이사이마다 지방이 터져 나오고 살가죽이 녹아내려 들짐승들이 그것을 뜯어먹는 흉측한 그림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그림이 펼쳐진 직후,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어느새 잔뜩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그것도 모자라 차마 더는 보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휙 돌려버리는 이도 속속 나타날 지경이었고, 어린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부모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어버리기 일쑤였다.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은 스승의 어린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사쿠라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종이부채와 테마리 공마저 손에서 놓쳐버린 채 얼빠진 얼굴로 그림을 멀거니 들여다보기만 했다.
렌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혹여나 더럽혀질까 서둘러 부채와 테마리를 집어 건네보았지만, 사쿠라의 시선은 여전히 구상도와, 그것을 가리키며 세상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가는 주지만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 절에서 단 하나뿐인 불화입니다. 잘 보십시오, 한때 제아무리 비싼 동백기름을 먹여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말과 돼지의 거친 털과 다를 바가 없지요. 얇디얇은 머릿가죽 아래에는 해골이 있으며, 그 안으로는 눈알과 뇌수, 골이 가득 차 있으니… 한때는 가장 귀했던 장기라 할지라도 죽음이 지나간 뒤에는 비리고 역한 오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생전에 뭇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얼굴 아래로는 기름과 지방, 근육이 있고, 텅 빈 비강과 입에는 가래와 콧물, 침과 혀가 있으니… 살아서는 그것을 능히 가릴 수 있어도 죽고 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일거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또 새파랗게 부풀어 오른 뱃가죽 아래로는 상한 지방과 내장, 분변이 가득하니, 더럽고 비리기 그지없습니다. 한편 팔다리라는 것 또한 특별할 것이 없지요. 모두 근육과 지방, 뼈로 이루어져 있으니, 아무렇게나 들에 내 버려진 뒤에는 들개들의 끼니가 되어버릴 뿐입니다.”
렌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지의 설법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애초에 아름답고 깨끗한 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상하게 꾸며봐야 육신은 그저 더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더 나아가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육신의 부정함을 깨달아 일체의 번뇌와 욕망을 떨쳐버리고, 최후에는 더러운 몸을 버리고 오직 맑은 마음으로 극락정토로 향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러나 사쿠라의 깨달음은 조금 달랐다.
육신이 더럽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마음을 갈고 닦는 것보다는 몸을 똑같이 베껴내는 과정이 훨씬 더 쉬우면서도 간편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스승과 렌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스승님, 그림에 나온 시체는 몸이라서 썩은 것이에요. 우리는 인형가가 아닌가요? 살덩어리인 몸이 썩어버리더라도 흙과 물, 나무와 돌로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줄 수 있지요. 그렇게 만들어준 새로운 몸은 한 점의 티끌조차 없는 인형으로서 영구불변 전해질 것이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
육십 평생 동안 히나 인형만을 만들어온 스승이었다.
그만큼 고집도 세고 강단도 있는 그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는 뜻밖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게 너의 길이라면 끝까지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내 길은 렌에게 맡길 테니, 너는 너만의 길을 가보거라.”
스승의 허락을 받아낸 이후, 사쿠라는 죽은 사람을 위한 인형만을 만드는 인형가가 되었다.
오로지 실물 크기로만 제작하는 탓에 가격이 천정부지로 높았고, 제작 시간도 턱없이 긴 나머지 일 년에 두세 번의 주문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벌어들이는 총수입을 생각하면 수십, 수백 개의 히나 인형을 만드는 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렌은 고작 히나 인형이나 만드는 스승의 길을 물려받은 자신과는 달리 저만의 길을 걷는 사쿠라가 내심 부러웠다.
한때는 질투와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괜한 싸움을 거는 일이 많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적에 한없이 낮은 눈높이로 어렴풋이 내다 보았던 스승의 길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이 자신에게 보여준 솜씨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느낄 때면 그는 소리 소문도 없이 훌쩍 더 앞으로 걸어가 먼발치에 서 있곤 했다. 렌이 또다시 악착같이 노력해서 그 코앞까지 뒤쫓아가면, 이번에는 또 다른 기술을 가르치며 수십, 수백 걸음을 다시 앞서곤 했다. 재능은 있어도 경험이 일천한 렌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한들 스승의 발뒤꿈치를 겨우 따라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수십 차례씩 되풀이된 뒤에야 렌은 비로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스승이 걸어온 평생의 길을 따라잡으려면 저 역시도 평생이 걸릴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후대를 위해 아주 조금의 길을 더 닦아놓는 것밖에 없으리라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사실이었다.
그 이치를 깨닫자, 렌은 더는 사쿠라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자신의 길 또한 그녀의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그 길의 끝자락에서 기다리는 결실이 눈부시도록 찬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서였다.
두 제자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잠시 쉴 땐 늘 화로 앞에 함께 마주 앉아 그날 만든 인형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고, 따뜻한 차를 끓여 함께 나누어 마셨다. 어린 시절을 보내고 꽃다운 청춘을 보낼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가까이 붙어 지냈다.
다만 15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든든한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그들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는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스승과 함께 히나 인형을 만드는 렌과는 달리, 홀로 인형을 만드는 사쿠라가 유난히도 헛것을 자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업 도중에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는 일은 예삿일에, 이따금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을 겪기도 했다.
예컨대 만들던 인형이 덜렁거리는 눈알을 달고 꿈에 나타나 어서 완성할 것을 재촉한다든지, 몸통과 조립해놓았던 인형 머리가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마주친다든지…. 그런 괴이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사쿠라를 달래주는 사람은 스승이 아닌 렌이었다. 모른 척 넘어가려거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는 비명을 들을 때마다 하던 일마저 내려놓고 사쿠라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한쪽 팔로는 사쿠라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마치 성호를 긋듯이 가로 세로로 번갈아 가며 그으며 구자호신법을 외워주곤 했다.
“…린, 표, 토, 샤, 카이, 진, 레츠, 자이, 젠…. 자,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臨兵鬪者皆陣列在前 – 병사로서 오신 투사들이여, 모두 진을 짜서 앞으로 가라)
제아무리 열심히 주문을 외운다 한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병사나 투사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사쿠라에게는 언제나 곁에 다가와 구자호신법을 읊어주는 렌이야말로 그 어떤 투사나 병사보다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 하나의 주문 덕분에 사쿠라는 온갖 기이한 일을 겪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고 사람보다도 더욱 사람 같은 인형을 만드는 데에 열중할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스승 몰래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그 주문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두 제자가 17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한 손님이 교토의 폰토쵸에서부터 아오모리 산까지 몸소 병든 몸을 이끌고 인형가들을 찾아왔다.
누구인가 했더니 바로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유명한 게이샤였다.
어찌나 얼굴이 희었는지 게이샤 특유의 새하얀 분을 바르지 않고도 온 얼굴이 밀가루처럼 희었고, 가녀린 팔다리는 새파란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이 무엇인지, 단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쉬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인기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리 캐물어도 결코 대답을 내놓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사쿠라의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몸으로는 찰나의 기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채춤을 완벽하게 출 수 없었다.
춤을 추는 와중에도 머리가 멍한가 하면, 시를 읊고 싶어도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덧없게도, 그녀는 그 모든 병세가 자신이 즐겨 바르던 분에 담긴 수은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는 무대에도 서지 못하게 되었고, 화려한 평판과는 달리 초라하게 살아가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진 탓에 전성기에 들어선 자신의 모습만이라도 인형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사쿠라를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 눈물 젖은 하소연과 함께, 게이샤는 돈은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으니 자신의 머리칼을 써서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사쿠라는 그 요청을 듣자마자 곁눈질로 여인의 머리칼을 살폈다. 칠흑처럼 새카맣긴 했지만 색이 너무 진하다 못해 청록색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따금 등불의 빛이 비칠 때마다 윤기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제법 비싼 기름을 먹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칼은 가늘고 푸석푸석해서, 결코 오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확신이 들자, 사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구해놓은 좋은 머리카락이 있으니까요.”
그러자 여인은 대답 대신 가져온 나무 상자를 사쿠라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손을 얹고, 열어보라는 듯 가만히 눈짓했다.
홀린 듯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머리카락 한 타래가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검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제법 굵으면서도 결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기름을 먹인 듯 윤이 흐르고 반짝이기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으로 만졌을 때 질척하게 묻어나오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여인의 혼이 담긴 또 하나의 신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쿠라가 가슴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감탄을 꿀꺽 삼키는 사이, 여인은 게이샤 특유의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제 인생이 정점에 달했을 때 잘라둔 머리카락입니다. 주기적으로 동백기름을 바르고, 햇빛이 닿지 않도록 제 몸처럼 정성을 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것으로 인형을 만들어주신다면 더한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왜냐하면, 저는 죽어서도 게이샤이고 싶으니까요. 비록 육신은 쇠하더라도 앞으로도 저의 후배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사쿠라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인형을 만들겠노라 약속했다.
도중에 폐기된 머리가 자그마치 13개, 몸통과 팔다리가 20개에 달했다.
그토록 완벽을 고집하면 할수록 제작 시간은 천정부지로 늘어나, 결국은 인형이 완성되기도 전에 게이샤의 부고 소식이 먼저 전해져 왔다. 그녀가 사방이 금박으로 덮인 금각사에서 마지막 춤사위를 보이다가, 난데없이 춤을 멈추더니 연못으로 투신해 죽어버리고 말았다는 기묘한 소식이었다.
사인이 어찌 되었든 그녀가 죽기 전에 완성품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사쿠라로서는 통탄할 일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드디어 여인의 모습을 온전히 담은 게이샤 인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작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웃는 미소에, 위에서 내려다보면 진지한 얼굴, 인형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보는 이들 모두에게 번지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의상이었다. 평범한 인형의 의상은 사쿠라가 직접 만들곤 했지만, 기모노만큼은 정교하게 만들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만들어봐도 장인이 직접 수선한 것만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임시로 입힌 옷을 벗기고, 스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장인에게 기모노를 부탁해야 했다.
그렇게 인형을 세워둔 그날 밤이었다.
사쿠라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스스로 꿈을 꾸는 것을 인식하는 자각몽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은 채 앉아있는 모습을 제 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녀로서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한참을 식은땀을 흘리며 발버둥치다 잠에서 깨어나니,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불쾌한 마음에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중, 문득 옷을 벗겨놓은 채 세워놓은 게이샤 인형이 떠올랐다.
묘한 동질감이 들기도 했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작업실로 향하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몸으로 세워둔 게이샤 인형이 뭔가를 입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검은 빛에, 굵으면서도 비단처럼 부드럽고, 윤이 흐르고 반짝이는 것.
바로 여인의 머리칼이었다.
빗으로 단단히 고정해두었던 머리칼이 완전히 풀어 헤쳐져, 새하얀 나신을 가리고 있었다.
초점 없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던 게이샤 인형의 눈알은 어느새 서슬푸른 빛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찌 자신을 이토록 수치스럽게 만들었냐는 힐난의 눈빛과도 같았다.
그날 밤, 인형 공방에서는 지금껏 사쿠라가 내었던 숱한 비명 중에서도 단연 가장 끔찍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황급히 자신의 공방에서 뛰쳐나온 렌이 그녀의 곁에서 읊어준 구자호신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벌거벗은 게이샤 인형은 주문한 기모노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교토의 폰토쵸로 실려갔다. 혹여라도 괴이한 일이 생기거든 넣어둔 눈알을 뽑아서 보관하라는 사쿠라의 편지 한 통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