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달도 없던 밤에 적막고요 하던 밤에 고대광실 너른 집엔 사람들은 아니 뵈고 쥐새끼도 숨었으니 이때 어서 돌아갔음 좋으련만. 복면 쓰고 흰옷 입은 젊은 청년 대여섯 명 야음을 기회 삼아 담을 넘어 침입하여 나라 팔고 작위 얻어 일인에게 충성하고 조선사람 핍박하던 최부자를 찾았더라. 아비되는 매국노는 사랑채에 정좌하고 불청객에 호통치니,
“요구했던 돈은 건넌방 금고에 있으나 순순히 내어줄 순 없다. 강도질이라니 부끄럽지 않느냐! 이 불한당 놈들!”
이 때에 아들되는 무뢰한은 별채에서 새로 얻은 기생첩의 버들 같은 허리를 끌어안고 꽃 같은 입술을 탐하며 “이리 오너라 벗고 놀자”하며 희롱할 새 기생첩이 몸을 빼며 단호하게 고하나니,
“나는 노류장화(路柳牆花)가 아니오.”
“이 년, 건방진 년, 여학생도 아닌 것이 비싸게 구는구나. 성질머리 완악하여 내비 두면 퇴기될 년, 큰돈내고 낙적시켜 집도 주고 옷도 줘도 은혜도 모르는 년!”
“누가 그리 해달랬소? 유학까지 다녀와서 침대에 책상에 거처만 서양식으로 꾸미면 무엇 하오. 언행과 정신은 구식 조선 사내나 진배 없는데.”
난봉꾼이 어이없어 헛웃음 짓다 생각하니 ‘이년이 단둘이 있으니 새삼 부끄럽다고 앙탈인가’ 함이라.
“웃음 팔고 소리 팔던 년이 말도 잘 하는구나. 이 년, 사랑가나 불러 보거라. 오늘 나와 놀아보자.”
“싫소.”
“그만 뻐튕기고 내 말 들어라.”
기생이 목을 가다듬고 어사출도 하는 대목을 부르니, 복면 쓴 무리가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걷어차고 포박하여 금고 있는 건넌방에 가려 하니 묶인 자가 분통 터져 소리소리 질러대니,
“이놈들! 이 후레자식들! 애비 뻘 되는 어른에게 버릇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소리를 신호 삼아 어디서 등롱을 든 일경(日警)들이 우르르 쏟아져 총검을 휘두르며 곤봉으로 구타하니 예서 으악 제서 아고 나 죽네 곡소리가 난무한다. 무리 중 하나가 폭탄을 던졌으나, 아뿔사, 불발탄이로다. 또 한 명이 육혈포를 탕탕 쏘니 하늘에 탕, 처마에 탕, 벽장에 탕, 기둥에 탕, 금고에 탕, 마당에 탕, 모두 다 오발탄이로다. 일경들이 일순간에 청년들을 제압하여 굴비 엮듯 줄줄 엮어 끌고 가며 선고하니,
“폭도들을 공갈, 살인미수, 강도, 총포화약류 단속령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한다!”
귀족깨나 되는 놈이 묶인 채로 발구르고 데굴대며 체신 없이 낄낄대는 꼴이 차마 못봐 줄 추태더라.
“내가 군자금 내놓으란 편지를 장난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신고한 것이 용하게 들어맞았구나! 한놈도 빠짐없이 감옥소나 들어가라 이놈들아! 하나, 두이, 서이, 너이…한 놈은 왜 여태 안 잡히누? 그래봤자 독안에 든 쥐새끼, 날 밝기 전엔 잡히겠지. 그러게 왜 치기어린,…부, 부, 불이야! 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