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그래비티북스에서 중단편집 "위대한 침묵"에 포함되어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곳에 공개된 작품은 출간과정에서 이루어진 교정교열 및 내용수정이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01.
손목시계가 멈췄다.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려 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귀에 가져가 소리를 들어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손가락으로 툭툭 쳐봤지만 조용했다. 이번엔 숨을 죽여봤다. 약한 맥박 소리 사이로 자그맣게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1초에 한 번씩, 째깍째깍. 하지만 시곗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력을 바늘로 전달하는 부위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시계는 아직 살아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한 번 뱉고는 시계를 손목에 찼다. 어차피 시간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계식 시계였다. 게다가 이젠 아무도 손목시계로 시간을 읽지 않는다. 남의 손목에 있는 시곗바늘은 더욱 그렇다. 손목시계는 이제 할아버지 세대의 넥타이핀이나 손수건 같은 물건이니까. 실용성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위한 적당한 부속품 같은 물건일 뿐이다.
창밖을 내다봤다. 손으로 쓰다듬고 싶을 만큼 절묘한 곡선들로 뒤덮인 건물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어릴 때 봤던 미래영화의 기계로 뒤덮여 차갑도록 휘황찬란한 풍경과는 달랐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싸구려 감수성을 들이밀면서 더 인간적인, 더 따뜻한, 더 인문학적인(말도 안 된다) 기술을 요구했고, 투박한 기계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물론 그런 차가운 기술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따뜻한 기술’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말이다. 살아남은 것들은 기계식 시계나 자동차 같은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남아있는(하!) 구시대의 기계들이었다. 아이러니다.
“출발하는 거야?”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창문 너머의 도시경관에서 시선을 거뒀다.
“응.”
“알았어, 다녀와. 아, 집에 종이가 다 떨어졌어. 나중에라도 종이가게 근처에 갈 일 있으면 좀 사와. 내가 항상 쓰는 거 알지? 끊을게.”
건성으로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서는 마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따뜻한 숨길이 묻어났다. 아내가 오늘 사용한 라벤더 향수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귓속에 묻은 무선통신 모듈은 청각뿐만이 아니라 촉각과 후각에도 연결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신혼 때 이 기술이 있었다면 온갖 부끄러운 일을 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서로를 옥죄이는 사슬이다. 어디를 가나 바로 옆에서 감시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