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의 서약 – another ver.

영면의 서약 – another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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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은 본편 참조.

레이는 어떤 면에서는 리아닌보다도 여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약함과는 다른 종류의 섬세함이었다. 그는 타인의 표정과 말에 쉽게 마음이 흔들렸고,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스스로에게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본래 그는 전쟁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책을 좋아했고, 활자 사이에 숨어 있는 타인의 생각을 더듬는 시간을 즐겼다. 시끄러운 연회나 사교모임보다는 조용한 서재를 선호했고, 혼자 정원을 거닐며 계절의 변화를 눈에 담는 일을 소중히 여겼다. 사람을 지휘하는 일보다,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는 쪽에 더 가까운 성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작이었다.
귀족이었다.

그 사실은 그의 성향이나 바람과는 무관하게 늘 먼저 존재했다. 나라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그것은 용기나 야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직책 때문이었다. 혈통과 작위가 부여한 역할이었고, 그 역할 앞에서 개인의 성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백작이 선봉에 서주셔야 합니다.”

왕의 명령이었다. 정중한 형식을 취했지만, 거부를 전제로 하지 않은 말이었다. 레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이미 전쟁터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말했다. 3개월이면 끝날 거라고. 국경 분쟁은 길어야 계절 하나를 넘기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길어졌다. 적은 예상보다 강했고, 그들의 전술은 집요했으며, 지형은 지도 위의 선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는 때를 가리지 않고 쏟아졌고, 진창이 된 땅은 병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날씨는 악화일로였고, 그 속에서 시간 감각마저 흐려졌다.

레이는 첫 전투를 기억했다.
아니, 기억한다고 말하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금속이 갈라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귀를 찢었다. 비명은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누군가의 외침과 신음이 서로 겹쳐 의미를 잃었다. 쓰러지는 병사들의 몸이 시야를 가로질렀고, 방금까지 말을 하던 얼굴이 다음 순간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그 인식은 어떤 감정도 동반하지 않은 채, 사실처럼 그의 안에 떨어졌다. 적군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이었다. 이성은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해가 레이를 위로하지는 못했다. 정당성은 죄책감을 상쇄하지 않았다.

매일 밤, 쓰러진 병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보였다. 눈을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적군의 얼굴도, 아군의 얼굴도 구분 없이 나타났다. 레이는 그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기억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되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