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우우우”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물고 깊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좁은 방 안에 꽉 차 있던 정사 후 특유의 살 냄새와 땀 냄새를 쾨쾨한 담배 냄새가 한구석으로 몰아냈다.
정사 후의 담배는 흔히 ‘식후땡’이라고 말하는 식사 후의 담배와는 맛이 또 다르다. 식후의 담배가 ‘포만감의 맛’이라고 한다면, 정사 후의 담배는 ‘허탈함의 맛’이라고 하면 어울리려나.
항상 머릿속으로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분위기 있는’ 정사를 꿈꾸지만, 실상은 일본의 포르노나 한국의 몰래 카메라에나 나오는 오직 사정만을 목표로 질주하는 ‘분위기 없는’ 정사로 끝나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이라고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뭐야, 또 담배야?”
속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은 채, 욕실 문 앞에서 수건으로 젖은 몸 여기저기를 닦으며 나오던 미연이 투덜댔다. 뭐, 거의 부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으니, 부끄러움이라는 게 남아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좀 봐줘라. 오늘 자기랑 있으면서는 그래도 거의 안 폈잖아.”
어차피 질 게 뻔했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나 역시 짜증을 담아 투덜거렸다. 그녀와 내가 사귄 지도 근 4년이 다 되어 가는데다가, 이미 그녀를 만났던 시점부터 펴왔던 담배이건만, 최근 1개월 동안 담배에 대해 투덜대는 횟수와 강도 모두 예전에 비해 부쩍 늘었다.
“거의 안 피기는 뭘 거의 안 펴. 자기 집에만 오면 담배 냄새가 방 안에 둥둥 떠다닌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내 옷에 담배 냄새 배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는 내 방에 저 멀리 지리산 청학동의 맑은 공기라도 둥둥 떠다녔었나. 물론, 4년이나 그녀와 함께 했기 때문에 이 경우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마도 지금 이 말을 실제로 하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끄면 되잖아.”
담배 옆에 놓여 있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자, 그녀의 찌푸렸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이것으로 오늘 밤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가 처량하게 ‘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 말을 듣지 않으면 휴일인 내일까지 그녀의 잔소리가 이어질 걸 생각하면 장초의 단말마 따위는 한여름 모기 소리만도 못한 존재다.
“자기 정말 담배 끊을 생각 없어? 요즘 우리 회사도 금연하겠다는 사람들 많잖아. 몇 명 모여서 무슨 금연 모임도 만들었다는 것 같은데.”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옆으로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미연의 몸이 밀착해 왔다. 팔베개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래?”
미연의 말을 대충 건성으로 흘려들으면서 코끝을 맴도는 샴푸 향기에 관심을 집중하려 노력한다. 그녀의 잔소리에 잘못 대꾸했다가는 금세 말싸움으로 번진다. 지금 이 시간에는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일 중의 하나다.
“또, 또 건성으로 대답한다. 한 번 알아나 봐봐. 총무부 김 대리 알지? 회사에 골초로 소문나 있던……. 김 대리가 회사에 제안했다나 봐. 그 모임 이 후로 담배 실제로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회사에서도 대환영이라던데.”
“흐음, 그 김 대리가? 그래서 요즘 잘 안 보였나…….”
그러고 보니 최근에 회사 내에서 금연 관련 모임인지 뭔지 만든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긴 하다. 최근 추세에는 걸맞지 않게 회사 건물 각 층마다 만들어 놓은 흡연 구역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고, 버려지는 담배꽁초의 양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알았지? 자기도 꼭 알아봐. 가끔 내 옆자리 수진 씨가 월요일 날 출근하자마자 나한테 어디서 담배 냄새 안 나냐고 물어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 자기도 인제…….”
샴푸 향기에 신경을 집중한 게 도움이 되었는지, 그녀의 잔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슬슬 잠이 몰려 왔다. 반쯤 감기는 눈 사이로 보이는 내 방 천정의 형광등을 응시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금연 모임이라……. 점점 세상 살기 힘들어지는구먼. 내 돈 내고 내가 일찍 죽겠다는데 담배 한 갑 사준 적도 없는 인간들이 왜들 난리들인지, 참, 나.’
2
“아유, 진짜. 대리님, 제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조수석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최 대리를 보며 투덜거렸지만, 최 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열린 차창 밖으로 입 안에 머금었던 연기를 내뿜었다.
“아, 거 참. 사람 빡빡하게 구네. 태워다 준다고 유세 떠는 거야, 뭐야? 왜, 김 대리의 그 우렁각시가 담배 냄새 맡으면 쪼그라들기라도 해? 달팽이처럼 말이야.”
‘이봐요, 그건 담배 연기가 아니라 소금 때문이라고요.’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나보다 1년 정도 일찍 회사에 입사한 도진이기에 직급은 같은 대리이지만 어쩔 수 없이 선배 대접을 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도진. 입사 1년 선배. 집이 비슷한 방향이라 내가 차를 산 후부터는 아침마다 도진의 집에 들러 그를 태우고 출근하고 있다.
주말에는 미연과 자주 내 차로 드라이브를 나가기 때문에, 그 때마다 그녀의 짜증을 받아줘야 하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똑같은 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인간, 천성이 짠돌이에 뻔뻔스러움의 극치(그러고 보니 이 두 성격은 세트로 묶이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더 피곤할 것 같기는 하다.)를 달리다 보니, 내가 이 정도 면박을 줬다고 해서 내일부터는 지하철 타겠어! 따위의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인간은 내가 면박을 준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놈의 우렁각시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요? 나도 내 여자 친구가 차라리 우렁각시였으면 좋겠네.”
“하긴. 우렁각시가 여자 친구보다 낫지. 생각해 보면 그 새끼, 완전 땡잡은 거라니까. 몰래 와서 밥해 줘, 설거지해 줘, 동화라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그렇지, 모르긴 몰라도 밤에는 그거까지도 해 줬을걸. 마을 원님 나부랭이가 눈독 들일만도 하지 뭐.”
내 짜증을 도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받아쳤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참 낙천적으로 사는 새끼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단점이라면 거 참 독하게 눈치 없는 새끼라는 거다.
도진이 이야기하는 우렁각시 이야기도 대체 몇 번을 말해야 그다지 재미도 없고, 결정적으로 내가 미연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려는 기색이라도 보일는지.
우렁각시는 도진이 미연에게 붙인 별명이다. 물론, 내 여자 친구가 미연이라는 걸 생각 못하고 지은 것이다. 미연과 나는 사내커플이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비밀 연애.
주변의 사내 연애 커플을 직접 보거나 여기저기서 들은 사내 커플의 말로(물론 잘 사귀다가 헤어진 커플 한정의 이야기이다.)를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먼저 미연에게 제안했고, 미연 역시 거기에 별 이의 없이 동의했다. 근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회사의 누구한테도 연애 사실을 들키지 않은 건, 같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서로에게 큰 간섭을 하지 않는 우리 둘의 성격 때문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주위에는 연애 사실 자체는 숨기기가 힘들었고, 도진처럼 눈치 없는 사람들에게는 4년이란 긴 시간을 (그나마도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밝힌 것도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소개나 인사도 해주지 않고 사귀고 있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인이라는 의미로 ‘우렁각시’라는 되도 않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생각하자면 그다지 큰 의미 없는 별명이기도 하지만, 그 출처가 도진이란 사실, 그리고 이 별명을 말할 때의 도진은 마치 내가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연인을 만들어냈다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떠들었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이 별명이 나오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아, 김 대리 혹시 금연클럽이라고 들어 봤어?”
도진이 어느 샌가 화제를 바꿨다. 또 그 이야기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정부에서 담뱃값을 몇 십 만원 인상하겠다는 발표라도 했나, 왜 이리 내 주변에서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가 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 그 금연하는 모임인가 뭔가 들어는 봤어요. 총무부 김 대리가 제안했다던데.”
“그래, 그래. 그 김 대리. 그러고 보니 그쪽도 김 대리네?”
그건 상관없잖아요. 집중하세요, 집중. 속으로만 되뇌며 도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쨌든 그 금연 클럽인지 뭔지, 나도 가입하기로 했어. 그쪽 김 대리하고 나 입사 동기거든. 지난주에 갑자기 나한테 거기 한 번 나와 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
금연 클럽? 도진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요.”
“응?”
아차, 이건 실수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당황해서 도진의 표정을 살피는데, 잠시 생각하던 도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래서 김 대리 좋아한다니까. 시크한 매력이 좋단 말이야.”
그냥 넘어 가서 다행이긴 한데, 옆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개가 똥을…… 개가 똥을……’ 중얼대면서 큭큭대는 꼴이 더 보기 싫다. 매일 이런 식이면 미연이 뭐라고 하든 말든 간에 육교 기둥에 차를 박아 버리고 지하철 타고 출근하고 싶은 욕구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뭐, 김 대리 말로는 외부에서 전문가를 초빙해서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때문에 100퍼센트 끊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김 대리하고 내기를 했거든.”
“내기요?”
내가 반문하자, 도진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응, 내기. 김 대리가 내가 만약 그 모임에 나갔는데도 담배를 못 끊으면 10만 원 주기로 했지. 만약 내가 담배를 끊으면 내가 김 대리한테 10만 원을 주고. 이거야 뭐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담뱃값 벌 수 있는 내기 아니겠어?”
확실히 도진의 말 대로였다. 누가 봐도 이건 도진의 승리다. 아무리 그 금연클럽인지 뭔지에서 불러온 전문가가 대단하다고 해도, 도진이 그걸 흘려듣고 피고 싶을 때 담배를 피우면 그걸로 게임 오버. 도진의 승리라는 거다. 짠돌이에, 뻔뻔스럽기 그지없고, 게으르기까지 한 도진이 그런 모임에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가 이건 누가 봐도 자기가 이길 것이 확실한 게임이라는 거다.
“그래서 기간은요?”
“무슨 기간?”
“왜 보통 그런 내기하면 한 달 이내라든가, 6개월이라든가, 그런 기간을 두잖아요. 설마 그런 것도 없어요?”
여기에서 도진이 ‘응’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그 김 대리가 10만 원을 길에서 주웠는데 그게 마침 저주 받은 돈이라 누군가에게 얼른 넘겨야 자기가 화를 피할 수 있는 뭐 그런 스토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 그 기간. 있지, 당연하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그 김 대리가 길에서 돈을 주운 것은 아닌가 보다.
“듣고 놀라지 마시라, 단 일주일! 아하하, 이거 한 달 담뱃값은 그냥 나오게 생겼어.”
길에서 돈 주운 거 맞네, 맞아. 이 골초를 일주일 안에 담배를 끊게 하겠다고? 그것도 10만 원이라는 돈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기간이 일 년이라도 이길까 말까한 내기를 일주일 안에 끝내겠다니, 입사 동기라고는 해도 최도진이라는 인간에 대해 어지간히도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어차피 10만 원이 생기니 담배 피우는 거 가지고 생난리 치는 김 대리 차는 타지 말고 택시라도 타고 올까나.”
옆에서 들으라는 듯이 중얼대는 도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그 금연 클럽이라는 모임에 대해서만큼은 관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전문가이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할까? 예전에 읽었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주변 인물을 인질로 잡고 온갖 협박을 해서 담배를 어쩔 수 없이 끊게 만든다는 내용의 ‘금연 주식회사’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에이, 그래도 설마, 그 정도까지 하겠어?
3
“먼저 들어가겠습니다아아.”
퇴근 시간인 6시 정각에 도진이 미리 챙겨뒀던 가방과 옷가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시간을 보니 적어도 5분 전부터는 퇴근 준비를 끝마쳤을 것이다. 진정한 칼퇴근이 뭔지를 온 몸으로 보여 주는 도진에게 ‘어디 가냐’고 눈짓으로 질문을 던지자, 도진이 입 모양으로 ‘금연’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아침에 말한 그 금연 클럽에 가는 모양이다. 내일 오전까지 정리할 서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야근해야 하는 터라 서둘러 나가는 도진의 뒷모습을 그저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봐, 최 대리님도 금연한대잖아.’
모니터 상태 표시줄이 깜박깜박하며 메신저 창이 떴다. 미연이다. 가급적이면 사내에서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메신저도 서로 잘 안 하는 사이이지만, 이번엔 바로 나에게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 최 대리는 다 이유가 있어 저러는 거야.’
‘저 사람이 금연이라는 걸 할 사람이야?’
재빨리 타자를 친 후 엔터를 쳤다. 메신저 창 아래에 ‘[미연]님이 대화 내용을 입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잠시 후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유가 뭔데? 나는 자기한테 그 이유가 될 수 없어?’
아, 진짜. 아무래도 지난 토요일부터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였던 모양이다.
‘총무부 김 대리랑 내기했대. 그 모임에 나가고 나서 일주일 안에 담배 못 끊으면 김 대리가 최 대리한테 10만 원 주겠다고.’
그녀의 질문은 대충 넘기고, ‘최 대리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메신저 창 아래에는 ‘[미연]님이 대화 내용을 입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 있지만, 정작 그 대화 내용이 창에 뜨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더 이상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무슨 말이 돌아올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알았어. 오늘 최 대리가 모임 다녀오고 나서 정말로 효과가 있다고 하면 나도 그 모임에 한 번 나가볼게. 나도 이참에 끊지 뭐.’
에라, 모르겠다. 일단 지금 상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진짜? 진짜지? 자기, 정말로 약속한 거야.’
역시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니 대답이 훨씬 빠르다. 나는 가볍게 긍정의 의미로 ‘ㅇㅇ’을 치고 누가 볼 새라 재빨리 대화창을 닫았다. 이걸 또 자기를 귀찮게 여긴다고 생각해서 잔소리 후속타를 날리지나 않을까 잠시 뚫어져라 모니터를 노려보지만, 다행히도 그럴 기미는 없다.
침대 위의 대화가 아니라 회사에서의 메신저 대화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렇게 계속 잔소리를 듣느니 몸에도 좋지 않은 담배, 이참에 확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잠깐 가서 한 번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야근이 그리 많지 않은 회사다 보니, 잠깐 문서 정리에 몰두해 있다가 기지개도 켤 겸 주위를 둘러보니 나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미연도 오늘은 다른 미혼 여직원들 몇과 함께 술 약속이 있다며 일찍 퇴근했다.
오늘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이 술자리에만 오면 담배를 줄창 피워댄다고 또 한바탕 나에게 메신저로 짜증을 부리고는, 늦었다며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월요일부터 다들 체력도 좋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었다. 빨리 끝내고 퇴근하려고 저녁도 먹지 않고 일했더니 슬슬 배도 고파 오기 시작했다. 이제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야지, 하며 컴퓨터를 끄는데 바로 뒷자리인 도진의 자리가 눈에 들어 왔다.
그다지 일이 없다는 걸 온 회사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지, 흔하디흔한 메모로 가득한 이면지 하나 없이 깔끔한 자리였다. 물론, 그의 성격이 겉보기와는 달리 깔끔하다던가 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참…… 저러면서도 회사에 계속 붙어 있는 거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평소라면 절대로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을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려 본다. 중얼거린 후에는 혹시라도 누군가 아직 퇴근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나 사무실에는 나 혼자뿐이다.
‘그러고 보니 금연 모임 4층 회의실이라고 했지…….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 살짝 들렀다가 가 볼까.’
미연이 나의 금연에 불타오르게 만든 그 전문가라는 작자의 면상이 궁금했다. 지금 있는 사무실이 5층이니, 내려가면서 잠깐 들렀다 가도 내가 귀찮아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잠깐 밖에서 훔쳐보고 퇴근할 테지만, 나중에 미연에게 나도 노력하긴 했다는 핑계로 쓰기에도 최적일 것이다. 마음을 정하자마자 자리 밑에 놓아뒀던 서류 가방을 챙긴 뒤 사무실 문을 나섰다.
4층 역시 내가 있는 5층과 마찬가지로 다른 직원들은 모두들 퇴근한 것 같다. 월요일부터 야근할 마음이 드는 직원은 거의 없으리라. 불이 꺼진 조용한 복도에 내 구둣발 소리만 울리고 있다. 복도를 반쯤 가로질렀을까, 복도 끝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불빛과 함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끌벅적한 도진의 목소리였다. 애초부터 어떤 프로그램인지, 누가 강의를 하는지 잠깐 보기만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며 불빛이 새어 나오는 회의실 쪽으로 다가갔다.
4층에 있는 대회의실은 2, 30명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에, 안에는 가운데가 비어 있는 ‘ㅁ’ 모양으로 테이블이 배열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넓은 회의실이기 때문에 보통은 임원급 이상의 간부 회의에 사용되는 회의실이었다.
목재로 되어 있는 문은 양쪽으로 밀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문에는 회의실을 누군가 사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도록 조그만 창문이 하나 달려 있다. 닫힌 문을 통해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곳 역시 그 창문이었다. 나는 안에서 혹시라도 나를 볼 수 없도록 창 옆에 서서 슬쩍 고개만 안쪽이 보이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김 대리, 진짜 이거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밖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도진이 앉아 있었다. 다행히 신경이 모두 양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어 나와 눈이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다. 안에는 10명 정도가 띄엄띄엄 테이블에 앉아 있고, 모두들 시선은 도진 쪽을 향하고 있다.
도진의 옆에는 나도 몇 번 얼굴만 본 적 있는 총무부 김 대리(모임의 제안자)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도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도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임의 기존 멤버들일 것이다.
“이거 이렇게 주야장천 껌만 씹다가는 턱이 아파서 담배를 못 피우겠는데? 그런 건 아니지? 응? 응?”
도진이 다시 우물거리며 김 대리에게 말을 건넨다. 껌? 지금 씹고 있는 게 껌인가? 무슨 금연 껌 같은 건가? 도진의 말을 듣자면 아무래도 모임이 시작한 6시부터 지금까지 저렇게 모여 앉아 계속해서 껌만 씹고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 대단한 프로그램을 기대했던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보고 있던 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무엇인가가 돌아서려는 내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회의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회의실 안의 광경은 조금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여전히 도진은 껌을 씹으며 뭐라고 계속 김 대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김 대리는 옆에 앉아 미소를 띠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그래, 다른 사람들. 이 다른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 10명 정도가 앉아 있는데, 그 누구도 도진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고, 역시나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도진을 주시하고만 있다. 도진이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이유도,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이 민망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이 모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빌어먹을 정도로 내성적이라 누구도 도진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보지 못한 시간 동안 도진이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불청객 취급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평소의 도진을 생각하면 이쪽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기분은 무엇인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회의실 전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왠지 이곳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심지어 처음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때 바로 돌아섰어야 했다는 후회 감마저 들 정도였다.
내가 막 돌아서려는 그 순간, 김 대리를 포함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도진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에 그대로 서서 이 후에 벌어지는 일을 계속 지켜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연 클럽의 멤버들이 도진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여전히 도진은 껌을 씹으며 김 대리에게 무엇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나는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내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던 멤버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고,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씨발…….’
분명 오가며 흡연실에서 마주쳤던 우리 회사의 직원이다. 하지만 흡연실에서 마주쳤던 그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이 사람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위화감은 그대로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향해 뛰었다. 이제는 도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복도에 다급하게 달려가는 내 구둣발 소리만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비상구를 통해 2층까지 단숨에 달려 내려갔다. 특별히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계단참 정도에서 한 번 위를 올려다 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대로 지하 주차장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운동 부족 때문인지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멈춰 서서 숨을 고르거나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달려 내려가는 내 뒤통수에 꽂히는 누군가의 시선. 분명히 누군가가 위에서 내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등이 따끔거릴 정도의 강렬한 시선은 주차장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