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는 성벽 아래를 둘러보았다. 위에서 나뭇가지가 하나 뚝 떨어졌고, 곧 밧줄 하나가 그 뒤를 따라 늘어뜨려졌다. 준비해 온 보따리와 대나무 묶음을 그 줄에 묶으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보는 사람은 없었다.
끈에 묶인 보따리가 올라가자, 만호는 성 안으로 태연히 들어가 약속 장소로 갔다. 정평구(鄭平九)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솔직히 아직 불안하지?”
“예?”
정평구가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자 만호는 흠칫 놀랐다.
“오늘 밤 작전 말일세.”
만호는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 대답하지 않아도 아네. 하지만 실패할 거라면 내가 이 작전을 생각하지도 않았네그려. 잘하면 좋은 구경 할 수 있을 거야.”
“아니옵니다.”
만호가 불안한 이유는 그날 작전의 위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주변 왜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것으로 보아 그들의 목적지는 뻔했다. 경상우도의 중심지이자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이다. 지난해에도 왜군이 2만의 병력으로 그곳을 공격했으나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분전하여 격퇴하였다. 왜군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다시 침으로써, 보복과 동시에 전라도를 노릴 기지를 마련할 것이다.
“사실 깜빡 잊고 물어보지 않았는데, 자네 전라 좌수사 영감 휘하 군관이라고 했지? 언제부터 거기서 근무했나?”
만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평구가 물었다.
“전란이 일어나기 전해부터 근무했사옵니다.”
만호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첩보 및 감찰을 담당하는 군관이었다. 진주성 쪽 상황이 심각해지자 좌수사는 만호를 진주와 그 주변으로 파견하여 상황을 알아보고 자신은 물론 진주 목사에게도 보고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작년에 한산도 해전 때 참전했나?”
“물론이옵니다.”
물론 만호는 그 전투를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연패한 왜군은 전 병력을 모아 전면전을 시도하였으나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로 이들 중 가장 큰 함대를 끌어들인 후 학익진(鶴翼陣), 즉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을 쳐 왜군 함대를 포위했고, 그 안의 왜군 배는 한 척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틀 후 안골포에서 남은 함대마저 격파당한 왜군은 해전을 아예 포기하였고 서해 진출도, 전라도 점령도 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평안도까지 점령한 왜 육군은 서해를 통한 물자 보급을 받지 못한 채 겨울을 맞았고 결국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남해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 해에 왜군은 반드시 전라도를 차지해야 했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을 포위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학이라면 날아야 제격이지. 저기 학 대신 검독수리가 한 마리 있는데 좀 보라고.”
정평구는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켰다. 검독수리 역시 까마귀처럼 시체를 먹으니 저편에서 뭔가 일이 난 모양이다. 만호는 혹시 백성들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정평구가 바라본 것은 바로 그 독수리였다.
“저 독수리가 나는 모습을 보게. 계속 퍼덕이지만은 않고 저렇게 날개를 편 채로 날지 않나? 바람을 타고 있는 걸세. 거기다 먹이를 잡을 때는 빠르게 내리기 위해 날개를 접고 뛰어내리듯 내려오기도 하지.”
“네?”
만호는 새들이 나는 모습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물론 어렸을 때 그도 새를 보면서 자신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 날의 꿈이다. 그런데 정평구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나는 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매사냥꾼들을 따라다녔고 다른 새들이 나는 모습이랑 날개 모양도 관찰했네. 그러다 보니 느낀 게 있었네. 독수리나 매, 혹은 학 같은 큰 새는 멀리 날 때는 그냥 날개를 편 채 가기도 하지. 그러니 매보다 사람의 몸무게가 열 배 정도 된다면, 매의 것보다 열 배 큰 날개를 만들면 사람도 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네.”
정평구는 나뭇잎 하나와 돌을 양손에 들고 동시에 떨어뜨려 보았다.
“이걸 보라고, 돌이랑 나뭇잎을 동시에 손에서 떨어뜨리면 돌은 그냥 떨어지지만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서 오히려 이렇게 위로 올라가기까지 하지 않나?”
“연날리기 비슷한 겁니까?”
“방금 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나? 맞아. 자네도 연날리기는 잘 하지?”
물론 만호도 연은 잘 날렸다. 군에서 비상시 신호나 연락의 수단 중 하나가 연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등불을 연에 매달아서 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과 등불의 무게 차이는 크다.
“내가 만든 그것의 이름은 비차(飛車)일세. 하늘을 나는 수레라는 뜻이지. 사람을 싣고 날 만큼 큰 연이기도 하지. 다시 새 이야기를 하겠네. 아니, 이럴 때는 새보다 더 좋은 예가 있지.”
“무엇이옵니까?”
“하늘다람쥐일세, 하늘다람쥐는 앞발과 뒷발 사이에 가죽으로 된 막이 있지.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뛸 때는 그 막을 쫙 펴서 날듯이 가네. 그 때문에 하늘다람쥐는 다른 다람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뛸 수 있지. 사람으로 치면 손목에 해당하는 부위에 뼈가 있는데 그걸 접었다 폈다 하면서 막의 넓이를 조정할 수도 있고, 꼬리는 배의 키 비슷한 역할을 하네. 바람 타기의 명수라서 날아오른 뒤라도 원래 있었던 그 나무, 그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네.”
정평구는 작전도 잊은 듯 즐거운 말투로 말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 한 번 바람이 부는 날 나무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기를 해 보았네. 보자기 네 귀퉁이를 하늘다람쥐처럼 내 양손과 양발에 묶고 나무에서 뛰어내리니, 확실히 그냥 뛰어내리는 것보다 더 멀리 가서 떨어졌네. 덕분에 부모님한테 크게 야단맞기도 했지만 말일세. 하하하.”
“그러나…….”
“그 큰 판옥선도 돛으로 바람 받아서 달리는데, 사람이 그렇게 가지 못하겠나? 바람이 전후좌우로만 부는 게 아니고 위아래로도 부는 법인데. 그러니 바람만 제대로 탈 도구만 있으면 사람도 날 수 있다고.”
정평구는 웃으며 말했지만 만호는 걱정되었다. 자신도 어렸을 적 새를 보며 날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적은 없고 나이가 든 다음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오나, 너무 위험한 작전이옵니다. 그 비차라는 것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멀리 납니까?”
“시도야 수도 없이 해 봤지. 지금까지 일 리(약 400미터) 정도는 날았네.”
“그 정도나 됩니까?”
의외였다. 날지 못하는 새인 닭도 십 장(약 30미터) 정도 거리는 가볍게 날고 나무에도 쉽게 오른다. 일 리면 닭보다 열 배 이상 멀리 난 셈이다.
“민 장군이 내게 서찰을 보내신 이유는 내 비차를 믿기 때문일 걸세. 너무 염려하지 말게. 그리고 자네가 탈 것도 아니잖은가.”
만호는 진주성에 전라 좌수사의 서찰을 들고 갔을 때가 생각났다.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그를 불렀다.
“민태주 장군이라는 이를 알고 있나?”
“민태주 장군? 모르는 분입니다. 어느 군 소속이십니까?”
“의병 대장일세. 자네가 할 일은 그 장군을 구출하는 일이야. 여기 정평구 별군관(지방 군영 소속 장교)과 함께 가게.”
당시 진주성에는 김천일(金千鎰) 등이 의병을 끌고 지원하러 와 있었다. 민태주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직접 진주 바로 남쪽에 있는 사천으로 갔다가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진주성에 있는 정평구에게 서찰을 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지금 고성에 있다네. 잘 해서 민 장군을 구출한다면 백성들에게 조정이 결코 의병을 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걸세. 이건 민·관의 사기를 위한 일일세.”
서 목사는 단단히 부탁하였는데, 문제는 만호와 함께 가기로 한 진주 병영 별군관, 정평구의 작전 계획이었다. 비차라는 것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민 장군을 구출하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온 후 첩보 수집을 비롯한 각종 작전 수행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하늘을 날겠다는 계획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정평구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지는 않았고, 그가 비차를 실험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많았다.
민태주 장군은 정평구와는 개인적으로도 친했다. 정평구는 사대부인데도 체통 없이 공인들이나 하는 도구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양반들은 그를 괴짜 취급하고 경멸하였지만 민 장군만은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부러 정평구에게 그 구원 요청 서찰을 보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곧장 아까 만호가 성벽으로 몰래 올려 보낸 보따리 안에 있던 왜군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산속에서 비차를 조립하였다. 조립뿐 아니라 이를 숨기는 일 또한 중요했기 때문에 비차용 광목 외에도 다른 큰 천으로 비차를 덮고 그 위에 흙과 풀을 얇게 깔아서 위장하였다.
“그러면 수고하게, 비차 조립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만약에 자네나 나 둘 중 하나가 실패하면 뒤도 보지 말고 도망치세. 이런 데서 같이 죽진 말자고.”
정평구가 말했다. 그날 작전은 간단했다. 만호가 왜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고성 관아로 가서 민 장군을 구출하는 동안 정평구는 밖에서 비차를 준비하고 있다가 민 장군을 데리고 날아서 탈출하고 만호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서 나간다. 비차는 2인승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작전은 이 검은 학에 달려 있지.”
“별명이 검은 학입니까? 어울립니다. 검은 하늘다람쥐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검은 하늘다람쥐? 하하하!”
이 비차는 밤에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검게 물들인 광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평구는 이를 ‘검은 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실제로도 비차는 학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참, 이걸 가져가십시오. 신발 속에 슬쩍 끼워 놓아도 좋습니다.”
만호는 가느다란 붓 정도 굵기로 만 종이를 정평구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화약통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로 적을 놀라게 하거나, 적진에 불을 지를 때 쓰는 것이옵니다.”
“그래? 그게 필요한가?”
“첩보 작전을 할 때 쓰는 비상용이니까 이게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지금 소관이 염려하는 점은 우리 백성 중 누군가가 적에게 붙어서 민 장군을 팔아먹었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만호는 걱정하던 일을 정평구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왜군이 민 장군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관군 장군이 아니라 의병 대장입니다. 관군의 장수를 붙잡으면 그에게서 조선 군 상황을 들을 수도 있고 관군과 협상할 때 볼모로 쓸 수도 있지만 의병 대장이라면 그럴 일은 별로 없고, 스스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일어선 사람인 만큼 투항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러니 왜군이 의병 대장을 잡는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지, 살려서 가둬 둘 리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뿐이 아니옵니다. 민 장군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둘 다 뒤통수가 깨져 죽었습니다. 즉, 싸우다가 죽은 게 아니고 방심하고 있을 때 당했단 말이 되옵니다. 그런데 의병이 내가 의병이라고 얼굴에 써붙여 놓고 다니지도 않는데 검문도 없이 왜군이 의병, 그것도 대장인 줄 어떻게 알고 사로잡았겠습니까? 그건 우리 백성 중 누군가가 왜군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도 민 장군의 측근 중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정평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병 내에서 왜군의 협력자를 색출해 내기는 관군 내에서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지 않겠나?”
“어쩔 수 없습니다. 돌아가면 어떻게든 해 봐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왜군들의 횡포가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가고 있으니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내부 첩자 단속은 중요합니다.”
조선 곳곳에서는 왜군에 의한 민간인 약탈과 학살 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왜군은 처음에는 점령지의 민심을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전란이 점점 길어지고,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일까지 늘어나 불안해진 탓이다. 그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이들은 백성뿐이었다.
고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의 지휘관 모리라는 자 역시 잔인하기로 이름 높아, 조금이라도 수상하거나 반항하는 이가 있으면 살려 두지 않으며 이 때문에 고성 관아 앞마당에서는 피가 씻길 날이 없다고 들었다.
만호는 혼자 관아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이때라면 군사들이 긴장을 풀 것이다. 만호는 그대로 슬쩍 관아 담을 넘고는 자연스럽게 포로들이 갇힌 감옥으로 갔다.
옥에 갇힌 죄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전란이 한창일 때니 왜군에 저항하는 이들이나 죄수들은 대부분 처형되었을 것이라. 만호는 옥졸(간수)에게 일본어로 모리 장군이 민태주 장군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옥졸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옥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쪽으로 가니 키가 크고 인물도 훤한 선비 한 명이 갇혀 있었다. 정평구에게서 민 장군의 용모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 있으니, 그가 민태주 장군임이 분명했다.
“좋아!”
만호는 몰래 숨겨 들어온, 천에 감싼 몽둥이로 옥졸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왜군 군복 입은 자가 갑자기 조선말을 하며 옥졸을 때려눕히자 옥 안에 있던 사람은 깜짝 놀랐다.
“민태주 장군이십니까?”
“맞소, 내가 민태주요. 당신은 누구시오?”
“전라 좌수영 소속 장만호 군관입니다. 장군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저, 정평구 군관은 안 왔소? 나는 그에게 서찰을 보냈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군 군복을 준비해 왔으니 빨리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만호는 쓰러진 옥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갑옷도 벗긴 뒤 옥 바닥에 엎어 놓았다.
“대단한 솜씨구려.”
“이 정도는 간단합니다. 산등성이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그다음부터는 정 군관 나리와 함께 가십시오! 일단 관아 담부터 넘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둘러 관아의 허술한 곳으로 가서 담장을 뛰어넘었다. 다음은 빨리 약속 장소로 가야 했다. 그 때, 저편에서 왜 군사들 한 무리가 관아 쪽으로 오고 있었다. 민태주와 만호는 일단 담장 뒤에 숨었다.
왜군들은 조선군 간자가 나타났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문지기가 서둘러 관아 쪽으로 돌아갔다. 만호가 그쪽을 보자, 묶인 채 끌려온 사람은 정평구였다. 만호는 서둘러 민태주에게 몸을 돌렸다.
“이, 이런! 장군, 일단 둘이서 성벽을 어떻게든 넘어야겠습니다. 성벽을 넘으면 장군께서는 얼른 진주성까지 가십시오. 가시는 길은 아시죠? 저는 정 군관 나리를 구해서 돌아가겠습니다!”
민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돕겠소!”
“염려 마십시오. 이럴 땐 저 혼자가 낫습니다!”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