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심하게 오던 날 빌린 물건이었다. 결국 돌려주지 못했지만. 여명은 제 손에 들린 유선 이어폰을 빤히 응시했다. 꼬박 몇 년을 구석에 처박아뒀더니 원래 하얀색이었던 것이 먼지와 함께 색이 바랬다.
비 너무 많이 오는데, 갈 수 있겠어?
지하철 타고 가면 돼. 버스는 밀릴 거 같아서.
노래라도 들으면서 가. 멀잖아.
잃어버렸다니까.
아직도 안 샀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도 주섬주섬 꺼내주던 이어폰. 그때 그애의 표정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치 시야에 박힌 것처럼.
줄 있는 거니까 잘 안 잃어버리겠지.
이걸 왜 나 줘?
주는 거 아닌데. 빌려주는 거야. 소중한 거니까 꼭 돌려주고.
씩 웃으면서 여명의 오른손을 가져가 그 위에 이어폰을 쥐어 주던 그 애에게 결국 이어폰을 돌려주지 못했다. 세상 차가운 얼굴로 거절하던 그날 그 애의 표정과 말투 역시 방금 일처럼 생생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감상.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남은 이삿짐을 정리하기 하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꽤 오래 살았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회 초년생이 될 때까지 이곳에 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
열하나.
“엄마 나 배 아픈 거 같아.”
“너 또 학원 가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거 엄마가 모를 줄 알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삶의 무게가 달라졌다. 4학년이 된 여명은 자신의 인생이 그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실감했는데, 학원의 개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학원을 빠지는 행위조차 예전처럼 쉽게 용납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나마 영어학원은 민서라도 있었지, 친한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엄격한 수학학원에는 도저히 재미가 붙지 않아서 갈 때마다 잡음이 일고는 했다. 하지만 엄마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여명은 매번 투덜거리며 학원으로 가야 했다.
수학학원에 가기 전에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간식도 소용 없었다. 탐스러운 선홍빛의 딸기주스도, 고소한 땅콩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도, 짭조름하게 찐 감자도 모두 여명이 평소에 끔뻑 죽는 메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엄마는 내 마음을 하나도 몰라. 잔뜩 토라져 입을 이만큼 내민 상태로 여명이 땅바닥을 툭 찼다. 학원까지 가는 길이 왜 이렇게 짧은 건지, 눈 깜빡할 새 도착해버렸다. 여명의 입에서 가느다라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주여명?”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여명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지? 학원에서는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선생님뿐인데. 여명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 뒤를 돌았다.
“주여명 맞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노윤재였다. 같은 반이었을 때는 그럭저럭 말을 섞었던 사이였지만 반이 갈라진 이후로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제대로 인사 한번 나눠본 적 없었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윤재는 항상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 노윤재 하이.”
여명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여명은 자다가도 수치심에 이불을 차고는 했다. 하이가 뭐야, 하이가!)
“어디 가?”
반면에 윤재는 마치 어제도 말을 걸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었고, 그에 여명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학원 가. 수학학원.
“너 설마 여기 2층에 한솔학원 다녀?”
“응.”
“거기 별로야?”
그토록 싫었던 학원인데 이렇게 훅 물어보니 대답이 망설여졌다. 평소에 일상을 나누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나도 이제 한솔 다니는데.”
“오, 그렇구나.”
반사적으로 대답한 여명은 속으로 갸웃했다. 이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학원 친구가 생긴 건가.
“그리고 사실 여기 우리 엄마 학원이야.”
윤재의 산뜻한 덧붙임에 여명은 생각했다. 큰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