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바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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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바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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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바다를 훔치러 왔다고 했다.

외로운 행성에 외로운 위로를 뿌리러.

히페리온, 나는 네 얼어붙은 달.

영원히 녹지도 타지도 않을 차가운 바다.

※※※

옛날에 어떤 남자가 살았는데, 너무 외로워서 도끼로 몸을 갈랐대. 그리고 자기한테서 떨어져 나온 여자랑 평생 싸우면서 살았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넌 모르겠어? 난 알 것 같은데.

그래?

네가 없었을 때의 나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

외롭다는 건 그런 거야, 바다야. 내가 가장 두려운 일이 뭔지 알아?

뭔데?

내가 널 혼자 두는 거야. 그래서 네가 도끼로 네 몸을 가르게 되는 거야. 그 모습을 나는 못 보게 되는 거야. 우린 항상 함께 있어야 해.

※※※

깊은 바다 아래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방울이 떠올라 저 높은 수면으로 사라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네 몸을 끌어안는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게.

※※※

토성과 처음 만난 곳은 바다였다. 그 날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바닷가에 가서,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토성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성은 나를 등지고 앉아,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몸에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시커먼 바다 한가운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 무언가가 있나 싶어 나도 토성이 보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제법 낭만적인 정경이었으리라. 깨진 진주를 닮은 달과 곱게 갠 포말 같은 달빛에 융해된, 해변에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 가로등들. 창에 비친 불빛처럼 흐릿해 보이는 그들은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내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고 백사장 위로 죽 늘어진 내 그림자가 토성의 그림자를 향해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 몸이 닿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때 이미 토성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아무 대화도 없이 밤에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우리가 둘도 없는 사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러니 토성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웃었을 때, 내 심장이 어땠겠는가.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어깨까지 기른 밀색 머리카락이 자란자란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옆얼굴을 휘감았을 때, 그의 얼굴이 얼마나 아득하고 그립게 느껴졌겠는가. 혈액이 역행하기 시작했고 토성이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왔다. 토성은 아무렇지 않게 내 곁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도 바다를 훔치러 왔어?”

토성이 내게 건넨 첫 마디다. 처음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은 여전히 소다수에 빠진 사과 사탕처럼 선명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토성의 얼굴을 봤다.

토성의 얼굴은 밀가루처럼 하얬다. 눈은 적당히 컸지만 속눈썹이 아주 길었으며, 입술은 얇았다. 나와는 정반대인 얼굴이었다. 내 피부는 적당히 검었고 눈은 컸지만 속눈썹이 짧았으며, 입술은 불어터진 미역처럼 두터웠다. 신기해서 계속 바라보았더니 토성이 고개를 갸웃해서, 나는 허둥대다 바보 같은 답을 내놓고 말았다.

“내가 나를 왜 훔쳐?”

내가 토성에게 건넨 첫 마디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말 1위다. 토성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와락 웃었다.

“너도 바다구나.”

“으응.”

“그럼 저거, 어떻게 훔치는지 알아?”

“뭐?”

“내 이름은 토성이야. 난 말이야, 저기서 왔어.”

토성이 오른손을 뻗어 하늘 위 별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 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창백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토성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연히 피워냈다. 토성이 독심술을 하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남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었을 테니까.

어디 한 군데가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어디에나 있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토성의 구색을 맞춰주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말하자, 토성은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쭉 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저긴 온통 얼음 덩어리랑 먼지뿐이거든.”

“그래?”

“그래서 말이야, 이곳의 바다를 조금 훔쳐서 고향으로 가져가면 어떨까 해. 저런……, 거대하고 끝이 없고 시끄러운 걸 가져가면 내 별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을 테니까.”

어린왕자에 빙의한 불쌍한 영혼, 그런 건 불가능하단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용케 어린왕자와 만난 비행사에 빙의해 대답했다.

“도와줄까?”

“정말?”

“저걸 혼자서 옮기는 건 힘들 거 아냐. 내가 도와줄게.”

다시 생각하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바다를 훔치는 걸 도와주겠다니,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는 왜 했던 걸까. 토성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몸을 일으켜서 성큼성큼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어어, 하고 토성이 망설이는 사이 나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풍덩 하고 물보라가 일었다. 한순간 어두워졌던 시야가 다시 빛을 되찾는다. 관성처럼 떠오른 몸을 일으켜 놀라 달려온 토성을 안심시킨다. 나는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곤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때 발을 동동 구르던 토성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겹쳐진 몸이 떠오른다. 귓가에 물이 차올라 찰랑찰랑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토성이 나를 안고 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귀여워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두 손으로 그것을 감싸 잡았다.

“미안.”

하루 종일 여름의 뙤약볕을 받아 그런지 바닷물은 미적지근했다. 허리까지 차오른 그 미적지근함이 간지러워서, 심장 언저리에 보풀이 돋아난 것 같았다.

“내일, 내일 다시 도와줄게. 오늘은 안 되겠다.”

토성은 말없이 자기 이마를 내 이마에 기댔다. 토성의 이마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너한테서 짠 냄새가 나, 하고 토성은 말했다. 아마 맛도 그럴 거라고 나는 대답했지만, 그것이 나를 맛보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토성은 나를 맛봤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 정신이 혼미해지고 밝았던 눈앞이 어두워졌다.

“정말이네.”

토성이 중얼거렸다. 그의 무해함이 두려워져 나는 토성의 몸을 밀어내고 정신없이 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네게 말하지 못한 게 있다.

그 날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바다에 간 거였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무서워. 나는 비행기도 못 타잖아.

칼로 손목을 긋는 것도 별로야. 언제 얼마나 아프게 죽을지 알 수 없잖아.

목을 매다는 건 최악이야. 거미줄에 걸려서 몸을 뒤트는 벌레 같은 꼴이란.

그래서 선택한 게 익사다. 나는 바다에 빠져 죽으려 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바다도 있었다. 학교에서 보아도, 집에서 보아도 바다가 보였다. 바다 밑에서 물 위를 올려다보며 꿈꾸듯 눈을 감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아름다운 비늘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들처럼, 내 몸도 아름다워질 것 같았다. 죽음이 여러 종교에서 금기시되는 개념이 아니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익숙한 존재로 다가올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끌렸다. 나만이 나를 볼 수 있다. 나만이 나를 결정할 수 있다.

그동안은 내가 나를 결정하지 못했다. 누가 나를 부르면 나는 주인에게 이름이 불린 개처럼 무얼 하고 있든 모든 걸 중단하고 나를 부른 사람에게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불려 가면 따귀를 맞거나 욕을 듣거나 비웃음 당했다. 학교 모든 애들이 나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고, 나와 놀아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랬다. 애들은 날 싫어했다. 선생들은 나를 방치했다. 아니,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성적이 나쁘다고 꾸지람을 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성적이 오르냐고 물으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평행선이었다. 나와 타인은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어지지도 않았고 마주서지도 못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그랬다.

아빠도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 등에 혹이 달려서 혹등고래라고 불렸는데, 어느 날 자기가 진짜 고래인 줄 알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빠를 등신 중의 상등신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아빠는 인어다. 그러니 아빠의 딸인 나도 인어가 되어야 한다.

내 이름은 바다지만 나는 인어가 될 거다. 인간 최초로 모든 심해를 경험해 본 사람이 될 거다. 그러려면 바다에 빠져야 했다. 바다로 들어가서, 깊은 곳을 찾아야 했다.

그때 나는 토성을 만난 거다. 토성은 하필 그때 내게 온 거다. 처음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가 내게 온 게, 우리가 만난 게 내가 이 좁아터진 어촌 마을에서 주인 없는 동네 똥개 한 마리를 만난 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입술에 남은 소금기가 거의 다 말랐을 무렵, 우리는 다시 만났다. 학교 수돗가 근처에서.

그때 애들은 내 교복 상의를 벗겨 놓고 야유하고 있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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