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미씽아카이브에서 기획한 독립출판 드래곤 앤솔러지 <Drag-On>에 참여했던 단편입니다.
“늦지 않았어, 그레이?”
그레이의 등을 따라 길게 이어진 뿔들을 닦으며 페리가 물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마다 그레이는 기분이 좋아져서 절로 콧바람이 났다.
“으응, 아직은 괜찮아.”
목욕은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대충 물만 뒤집어쓰는 게 아니라 뿔 하나하나 윤이 나도록 닦기는 거의 1년만이었다. 뿔들은 탁한 회색빛이 아닌 원래 색깔인 청록빛을 제법 영롱하게 드러냈다. 그레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욕이 벌써 아쉬워지려고 했다. 하지만 오후는 론다의 스케줄 때문에 내내 바쁠 테니까 드래곤 목욕장에서 완전히 만족할 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사실 이제는 안 오나 했어.”
페리는 꼬리에 가장 가까운 뿔을 정성껏 닦았다. 드래곤 전문 목욕꾼인 페리는 그 꼼꼼함 때문에 예약 잡기가 쉽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그레이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쪼개 주었다.
“그럴 리가 있나. 천하의 세차장 페리네를 두고 어디로 가겠어.”
“또또 자학한다, 그레이.”
“시원하다. 거기 좀 더 긁어 줘.”
“여기?”
“응, 거기 박박.”
“먼지가 많이 엉겼네.”
“고물 차잖아.”
그레이는 종종 자신을 차(車)에 비유했고 그걸 농담거리로 여겼다. 그 농담을 들은 연방의 다른 드래곤들이 웃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드래곤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불변의 영광이었기 때문에, 인간들의 교통수단에 비견당하는 것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이 연방에서 드래곤은 마법사들과 동맹을 맺고 국경을 수호하는 신성한 전사다. 전사에게 차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그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드래곤으로 태어났지만 다른 형제와 동료들처럼 연방을 수호하기 위해 애써 본 적도 없고 정말로 누군가를 태워 나르는 차로 살아 왔으며 또 그게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부 론다 덕분이다. 론다와 론다의 밴드 크리스탈 버블 오로라가 그 이유다.
“예전에는 점심 먹기 전에 가뿐하게 마무리했는데 이젠 어림도 없군.”
페리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페리는 그레이를 닦을 때마다 그레이의 덩치가 작았을 때를 꼭 언급하곤 했다. 지금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었던 그때를. 그땐 페리도 지금 같은 은발의 노인이 아니라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 청년이었으며 지금보다 좀 더 빨리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약간 느려지긴 했어도 실력은 여전했으니 사실 불만은 없다. 그레이는 페리의 손이 가장 편했다. 론다의 목소리가 그렇듯.
“어디 대충 닦기만 해 봐, 페리.”
그래도 자비는 없다. 오늘은 크리스탈 버블 오로라의 콘서트날이니 그레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 한다.
“네네, 그레이 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흐흥.”
“그래도 약속한 건 잊지 않을 거지? 목욕비 말이야.”
“당연하지. 나는 그레이 님이라고.”
그레이는 뜨거운 콧김을 한 번 뿜어 보였다. 그럴 땐 목소리가 약간 더 매력적으로 들린다던 론다의 말을 들은 뒤로 가끔 의식적으로 해 보는데 솔직히 영 어색하다. 페리도 낄낄 웃었다. 아마도 페리는 또 작았던 시절의 그레이를 상상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을 넘기면서까지 기분 좋게 목욕을 끝내 준 페리에게 그레이는 콘서트 티켓 두 장을 건네주었다. 오늘 일몰시 광장에서 열리는 크리스탈 버블 오로라의 1년만의 컴백 콘서트 티켓이다. 진작 매진되어 이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게다가 VIP석.
“근데 언제부터 로큰롤에 관심이 있었어?”
“으음, 없어. 나는.”
수건이며 물통을 정리하면서 페리가 말했다.
“피닉이 데이트를 시작했잖아. 상대가 크리스탈 블랭킷…… 뭐더라.”
“버블. 버블 오로라.”
“하여간 팬인데 티켓을 못 구했다고 해서. 내가 그 밴드의 관계자를 좀 알고 있다고 자랑을 했지.”
페리의 젊었을 적 모습을 쏙 뺀 손자 피닉은 로큰롤을 좋아하는 연방의 흔한 젊은이였다. 그 애가 벌써 데이트를 할 나이가 되었다고? 그레이는 흠칫 놀랐지만 그렇게 치면 론다 역시 이렇게 훌쩍 커 버릴 줄은 몰랐으니까. 사람의 아이들은 참 빨리 자란단 말이지, 그레이는 중얼거렸다.
“이걸로 우리 피닉은 확실히 점수 따겠구먼.”
“안부 전해 줘.”
“물론이지.”
“간다, 그럼.”
“론다한테도 인사 전해 줘.”
손을 흔드는 페리를 마주하며 그레이도 양 날개를 활짝 펼쳤다. 바람이 커다랗게 일자 페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은빛 머리카락과 앞치마가 펄럭여도 페리는 그레이가 하늘에 떠올라 아주 작은 점으로 변할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었다.
깨끗해진 몸으로 비행하자 하늘마저도 평소보다 새뜻한 기분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남은 하루가 기다려졌다. 사실 페리 앞에서는 덤덤한 척했으나 오늘 콘서트를 가장 애타게 기다린 건 다름 아닌 그레이였다.
론다가 무대에 선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레이는 론다가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
사람들은 대부분 론다의 목소리를 노래로 들었지만 그레이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몇 해 전인지도 기억이 까마득한 그날은 그레이에게 그해 최악의 날이었다. 당시 그레이는 형제들과 함께 드래곤 전투 양성소에서 생도로 수련 중이었고 입소 이래 어떤 과목 하나 적성에 맞지 않았으므로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마법사들이 주축인 엘리아스 연방은 이웃한 다른 연방인 크라시와 오랫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지도의 경계선을 수시로 바꿔 왔다. 최근 한 세기 정도는 싸움이 잠잠했다. 마법사와 드래곤 들이 연맹을 결성해 최전방을 합동 수호하면서부터는 표면적이나마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방 내에서도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반목하던 두 종족이 비로소 힘을 합친 것이다. 이후로 엘리아스와 크라시 사이에는 전투 없는 냉전이 지속되었다.
그레이도 책에서 배웠기에 그 역사적인 연맹에 대해서는 익히 알았지만 자신더러 그 역할의 일부가 되라고 한다면 대답은 글쎄다. 냉전이 끝나고 진짜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그레이는 연방을 지키기는커녕 살아남을 자신조차 없었다. 처음 양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시간이 흐르면 일종의 책임감 내지는 의무감이 생겨나는 줄 알았는데 해가 갈수록 더해지는 것은 의심뿐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말했듯이 싸움에 관한 것들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말싸움이든 몸싸움이든 마법전이든 예외는 없었다. 형제들은 드래곤으로 태어났다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아직 본능이 깨어나지 않은 것뿐이니 잘 수련하면 그레이도 드래곤으로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그레이의 생각은 달랐다. 제 혈관에 그런 종류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회색분자를 나타내는 이름 때문인가 한때는 그렇게도 의심했지만 이름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맏형 더스트(Dust)나 둘째누나 미스트(Mist) 역시 상황이 비슷해야 할 텐데, 그들은 양성소의 최우수 생도였다. 그레이만이 낙제생이었다.
그날은 공격과 방어 과목에서 반 최하 등급을 받고 수련 도중에 도망쳐 나온 날이었다. 들어야 할 다른 수련 과목이 남아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도저히 우울과 자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레이는 가장 낮은 자세로 뒷문을 빠져나와 멀리, 알고 있는 방향 중에서 가장 먼 곳을 향해 날았다. 날개가 무거웠다.
양성소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형제들은 뭐라고 말할까. 어떤 흑마법사에게 꼬여서 탈선하냐고 가장 먼저 의심하겠지. 그리고 대대로 전사였던 조상들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할 것이다. 아직 본능이 깨어나지 않았다고. 좀 더 기다리라고. 좀 더, 좀 더. 노력하라고. 견디라고.
그런데 문제는 그레이에게 이 ‘좀 더’가 얼마만큼을 의미하는 건지 정확히 알려 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양성소의 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얘가 과연 이 집안의 드래곤이 맞나?’ 하는 표정은 종종 보았다. 교관들의 눈에도 의심은 분명히 들어 있었다. 집안의 명예를 존중해 누구 하나 입 밖에 내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더스트와 미스트가 우수하니까, 같은 핏줄이니까 그레이도 기다리면 될 거라고. 때가 되면 연방을 수호하고 마법사의 전당 벽에 이름을 새길 우수한 드래곤 전사가 될 거라고.
그레이도 그 순간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날이 가면 갈수록 그곳에 새겨질 제 이름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럴 리가 만무했다. 더스트와 미스트의 곁에 그레이는 새겨질 수 없다. 부질없는 희망은 그만 끝내고 싶었다. 바로 오늘이 그 결심을 굳혀야 할 날일지도 몰랐다.
이런 순간이라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조금은 울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눈물이 나오기도 전에 어디선가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놓고 얼마나 날아왔는지 양성소의 첨탑은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도시에서 꽤 멀리 떨어져 나와 연방 경계 근처인 백색의 숲 위를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이곳은 오래전에는 전투가 자주 있던 곳으로 한때는 엘리아스에 한때는 크라시에 소속되곤 했다가 다시 엘리아스에 돌아온 땅이다. 울음소리는 저 아래에서 올라왔다. 꽤 우렁찬 소리였다.
그레이는 날갯짓을 서서히 늦춰 숲의 공터에 착지했다. 나무가 빼곡했지만 울음소리의 근원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몇 번 돌려 보니, 몸통이 커다란 두 나무 사이에 숨어서 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이렇게 크게 울 거면 숨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면서 그레이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드래곤의 묵직한 걸음에 백색 나뭇잎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부서졌고, 마침 울음소리도 뚝 그쳤다.
바다색의 머리카락을 한 여자 아이가 두 눈에 고인 눈물을 꽉 붙잡은 채로 고개를 들고서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천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이렇게 가까이 드래곤을 본 일이 없는 듯했다. 그레이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표정을 하고서 아이를 향해 말했다.
“안 해칠게.”
“거짓말!”
아이는 떨면서도 또랑또랑 대답했다. 당황한 것은 그레이였다.
“거짓말…… 아닌데.”
“이런 시간에 숲을 혼자 배회하는 드래곤은 흑마법사의 수하랬어.”
“누가 그래?”
드래곤으로 태어난 이래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처음 들어 보았다.
“학교에서 그랬어. 마법 개론 시간에.”
“…….”
“흑마법사는 연방의 배신자고 배신자는 우리를 해쳐.”
“그……래?”
“응, 그래.”
“근데 내 이름은 그레이고, 나는 그냥 드래곤이야.”
좀 더 구구절절한 설명을 보태 자신은 안전한 드래곤임을 어필할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나는 알고 지내는 흑마법사 같은 건 하나도 없으며, 사실 공격에도 방어에도 딱히 재능이 없는, 하늘을 나는 것 이외엔 달리 잘하는 게 없어서 절대 너를 해치지 않을 흔치 않은 드래곤이란다, 라고 말해야 하다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게다가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양성소에서 도망쳐 나왔단다, 라고 대답해야 하다니. 그것도 못 할 짓이지.
그레이는 다시 자괴에 빠질 뻔했다가 한 가지 의심에 사로잡혔다. 이 녀석도 학교에서 마법 개론 따위를 배운다면 왜 이런 시간에 혼자 숲을 배회하고 있는 것인가. 같은 논리라면 너는 흑마법사 아냐?
“이렇게 어린 흑마법사가 어딨어.”
아이는 이번에도 또박또박 제 생각을 전했다. 아까 전보다 훨씬 단호했다. 그레이는 조금 놀라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그만 게 목소리가 참 크다.
“그럼 왜 학교에 있지 않고…….”
“잠깐 산책 나왔어.”
“산책?”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연방 경계의 숲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산책이라고 부르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드래곤도 아이도 잘 알았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더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망했어.”
“…….”
“시험 완전히 망했어. 난 마법에 재능이 없어.”
아이의 목소리가 드디어 작게 웅크려 들었다. 그 순간 그레이는 아이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색의 숲에 혼자 있는 것도, 울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어떤 반항심도. 모두 오늘 그가 겪은 것들과 겹쳐 있었다.
“이름이 뭐야, 꼬마?”
“꼬마라고 부르지 마!”
“미안. 작은…… 마법사님?”
“론다.”
작은 분노 대신 이름이 들려왔다.
“론다라고, 내 이름.”
“아, 나는 그레이.”
“알아, 아까 말했어.”
“아.”
“바보잖아. 이 드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