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6시 정각의 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말이죠.
홀짝이던 커피잔을 책상에 내려두곤 커맨드 창을 열어 명령어를 입력했습니다. 그러자 한 존재의 생애 기록이 화면에 주르륵 연표처럼 나타났습니다. 화면 속 기억들은 제각기 각각의 시점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속적으로 움직였고 저는 그것들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하나의 기억 결정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상은 중앙 피드를 거쳐 이승의 존재의 뇌로 전송됩니다.
이승의 존재들은 이걸 주마등이라고 하더군요. 죽기 전에 보는 그간의 모든 기억. 이승의 인간들은 이에 관해 몇 가지 가설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면 뇌에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애 전체의 기억을 다시 복기시키는 것이라고요. 아주 재밌는 가설입니다.
사람의 주마등은 나와 같은 저승의 공무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송됩니다. 저승으로 왔을 때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미리 기억을 되짚어 주는 것이죠. 과거에는 저승의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아 이승 차사들이 망자에게 직접 가 이를 보여주곤 했는데, 이제 시대가 좋아져서 이렇게 원격으로도 전송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승의 인간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도맡습니다. 수많은 시왕들 중 염라의 직속 사자인 저는, 아주 오래전 이승의 인간이었을 적 게임 트레일러 등을 만드는 영상 제작자였습니다. 실력 좋은 인재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초창기 게임 업계의 엄청난 노동량과 무시무시한 야근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죠.
결국 저승에 와서 심판을 받던 도중 염라가 절 고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죽어서도 일하라니, 살아생전 무슨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부당한 처사가 다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그러나 제 말은 씨알도 안 먹힌 채 저는 그대로 주마등 관리소의 관리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제가 왜 지금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내뱉느냔 물음입니까? 하지만 부디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지금 염라께서 제게 묻는 말에 관한 답을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염라, 저와 내기를 하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제가 당신을 설득한다면 저의 승리, 그렇지 못하면 염라의 승리로 말입니다. 염라께서 이기신다면 베타를 이승으로 돌려보내고, 만일 제가 이긴다면 베타를 저승으로 거둬들여 주십시오.
그리고 이기는 자가 어느 쪽이든 제 영혼은 선례대로 연옥에 던져 넣으셔도 좋습니다.
***
제가 주마등 관리소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된 지 200년 정도 흘렀을 무렵, 이승의 인간들은 무쇠와 티타늄으로 뼈와 살을 만들고 기름을 채워 기계로 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굳이 로봇이라 칭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로 인간과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승의 사람들은 여전히 목 뒷덜미에 바코드가 박힌 기계 인간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계 인간들도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왜였을까요. 로봇들은 서러웠습니다. 너무나도 서러워서, 인간들을 떠나 숲에서 조용히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는 인간들이 다시 찾아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렸지요. 자신을 만들어 준 존재에 관한 애증의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만, 로봇들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살았던 그 도시를 딱 한 번만 구경하고 오기로 했습니다.
아주 몰래, 몰래 가서 살짝 보고만 올 생각이었죠. 그중에는 베타(β)도 있었습니다. 베타는 인간들에게 맞아서 눈 한쪽과 팔 한쪽을 잃은 로봇이었죠.
이들은 제각기 다른 목적을 품고 도시에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베타를 비롯한 도시로 돌아간 로봇들은 끔찍한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행성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죽어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는 푸릇한 식물들로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고라니와 곰이 뛰어놀고 새들이 둥지를 짓고 있었죠. 인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타는 그 아름다운 폐허를 찬찬히 살피며 걸었습니다. 야생 동물들은 베타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봤자 녹이 슨 걸어다니는 금속 덩어리니까요. 공격해봤자 먹을 부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타는 아주 안전하게 밤새도록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베타는 오래된 가게의 가판대 옆에서 작은 원숭이가 무언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작은 원숭이가 놀라지 않게 조용히, 아주 조용히 깨진 문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를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원숭이는 몸집이 아주 작아 어린 개체로 보였습니다. 헝클어진 긴 머리칼에 몸은 숯검정이라도 묻힌 듯 얼룩덜룩했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고개를 살짝 들어 베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베타는 숨이 멎는 기분을 느끼며 재빨리 몸을 숨겼습니다.
그는 건물 외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세상에나, 인간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작은 원숭이는 인간이었습니다. 한때 찬란했던 문명을 지니며 세상을 휘둘렀던, 그리고 베타 자신을 만들었던 인류라는 족속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추레하고 약한 모습이지만 분명 인간이었죠.
베타는 그 인간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뜯어보았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붉은 머리칼과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11살 정도의 어린아이였습니다. 일순간 베타는 고민했습니다. 저 아이를 구해야 할까? 과거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타가 아이의 유전자를 스캔했을 때, 그는 아이가 과거 자신을 학대하고 버렸던 박사의 후손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지금은 그로부터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 베타를 만든 박사는 죽었을지라도 베타에게는 여전히 그때의 상흔이 남아있었습니다. 몸에도, 마음에도요.
아이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챈 베타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짐작이 가십니까? 베타는 망설이다가 결국 아이를 돌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에는 최선이었지만 결말은 최악인 결정이었죠. 그가 다가가자, 아이는 놀라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뛰어나가 도망가 버렸죠.
베타는 당황하여 아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아이는 너무 작고 약해서, 자칫하다간 야생 동물에게 다치거나 죽을 것 같았거든요. 거기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꼴이라니. 베타는 아이가 너무나도 걱정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베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들이 마주했던 곳에서 또 한 번, 아이와 베타는 만나게 됩니다.
아이는 여전히 베타에게 경계를 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타는 인내심 좋은 로봇이었죠. 왜냐면 그는 보모 안드로이드였거든요. 베타는 숲에서 따온 각종 열매를 품에서 꺼내 아이에게 데구루루 굴렸습니다. 아이는 열매를 킁킁거리더니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죠. 그리고 과육을 씹어 삼키는 순간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습니다. 베타도 덩달아 움찔했습니다.
「휴. 맛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열매를 한 입 맛 본 아이가 서둘러 입안 가득 과일을 쑤셔 넣고 우물거리자 그제야 베타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경계가 누그러지자, 베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어루만졌습니다. 아이는 잠시 손에 든 과일과 그를 번갈아 보더니, 싫은 내색하지 않고 먹는 일에만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무렵, 아이는 베타를 따라 숲속의 피난처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봇들이 인간을 피해 숲속으로 도망쳤을 때 마련했던 작은 오두막이었죠. 그곳은 베타 말고도 알파와 오메가, 세타가 함께 살았지만 그들은 잠시 또 다른 도시를 탐험하러 갔기에 한동안 베타 혼자 그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타는 아이에게 도로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아이의 이름이었죠. 도로시는 자신의 이름을 혼자서 웅얼거렸습니다. 도로시, 도로시. 그게 마치 자신의 이름인 걸 아는 것마냥 말입니다. 오래 전 도시를 떠나 이곳으로 올 때 챙겨왔던 몇 권의 동화책들을 읽어주며 베타와 도로시는 행복하고 아늑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시의 도로시는 말을 하지 못했고 읽지도 못했지만요. 그래도 베타가 읊는 그 동화 속 세상들이 도로시에게는 문자를 거칠 필요도 없이 곧바로 형상화됐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숲에서 따온 열매를 배불리 먹이고, 개울가에서 깨끗이 씻기고, 낡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덮고 있으면 푹신하고 따뜻한 이불을 도로시에게 돌돌 말아 잠을 재우자 도로시는 베타가 알던 과거의 인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엄마처럼 따르는 도로시를 보며 베타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알파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조금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이 둘만의 추억은 점점 더 쌓여만 갔죠.
도로시가 베타와 함께 살게 된 지 어느덧 두 해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맘때쯤 도시에서 세타와 이타, 오메가가 돌아왔습니다. 떠난 알파는 어디 가고 이타가 대신 오다니요. 세타는 베타에게 몇 가지 사실을 일러주었습니다.
「베타, 저 너머에 아직 문명을 가진 인류가 남아있어. 물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생존자들이 있어. 구 인류의 언어를 쓰는 자들이 있단 말이야.」
「정말? 잘 됐다, 세타! 인간이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무척 기뻐!」
그러나 베타와는 달리 세타는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절망적인 기분이었죠. 세타는 이 소식에 기뻐하는 베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베타. 왜 기뻐하는 거야? 인간들은 모두 이기적이야. 시간이 흘렀어도 그건 변하지 않아.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는데도 자기들끼리 또 계급을 나누고 배척해. 사람들끼리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며 약자를 무참히 짓밟아. 이제 이곳엔 법조차 남아있질 않아. 완전히 무법지대라고. 그들이 우리 영역까지 침범하기 전에 없애버려야 해.」
「잠, 잠깐. 세타. 무슨 말이야? 그들을 왜 없애야 하는 건데?」
베타의 물음에 세타는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습니다.
「인간들이 우리의 보금자리를 빼앗으려 들 거야. 숲에 있어 외부인의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야생동물들로부터도 안전하고 먹을거리도 풍부한 장소라니. 당연히 눈독을 들일 거란 생각이 안 들어?」
「그럼 같이 살면 되는 거잖아! 집은 더 지으면 돼. 구성원이 많아지면 일손도 늘어나니까 우리에게도 이득일 거야.」
「넌 여전히 환상 속에서 살고 있구나, 베타. 그렇게 당해놓고도 몰라? 네 왼팔과 오른쪽 눈을 뜯기고도?」
돌아오는 세타의 대답은 싸늘했습니다. 세타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오메가와 이타 또한 베타를 우습다는 듯 쳐다보았습니다. 베타는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습니다.
「그럼… 왜 내가 그때 도시에 가보고 싶다고 했을 때 같이 가겠다고 한 거야? 너희를 만들어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멀리서만이라도 그들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이타는 이제 베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이윽고 이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베타를 주춤하게 만들었습니다.
「베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넌 지금까지 인간을 그리워했던 거야? 우린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 갔던 거였어. 물론 우리가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전부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왜 우리가 알파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는지 알아? 왜 세타와 오메가가 알파 대신, 나랑 돌아오게 됐는지 모르겠냐고.」
베타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과 같은 로봇들이 인간을 그리워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런 마음을 붙들고 있는 건 베타뿐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인간들조차 지니지 않았습니다. 왜 세타와 함께 갔던 알파가 돌아오지 않고 대신 이타가 돌아왔는지, 그 사실이 암시하는 건 명확했거든요.
그때 오메가는 저 방 한구석에서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메가는 베타가 자신을 말리기도 전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작은 머리통만 빼꼼 내밀고 있는 진짜 인간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베타 너 이 자식… 너, 너 이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