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월요일
초조한 마음으로 동인은 새 간병인을 벌써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방광을 가득 채운 소변의 압박이 점점 거세졌다.예전처럼 도뇨관을 삽입했을 때는 손을 쓰지 않고 그냥 누운 채로 소변을 봤는데, 지금은 도뇨관을 뺀 상태라 소변을 보려면 소변통을 거기에 받쳐야 한다.
그 소변통이 지금 그의 침대 머리맡에 있지만, 안에는 소변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볼일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동인은 새 간병인의 불성실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첫날부터 지각이나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앞으로 생활할 것인가. 벌써부터 걱정이 밀려왔다.
옆집은 오늘 새로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베란다 밖으로 사다리차 선반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아까부터 계속 눈에 띄었다. 센터 직원들이 짐을 나르는 소리가 영세한 아파트의 벽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동인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사지 마비 환자에게 있어 가장 불편한 점은 바로 대소변 문제다. 몸이 멀쩡할 때는 싸는 것에 아무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지만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는 매일 매일 대소변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음식을 먹으면 늘 배설하는 것에 신경을 써야 된다. 그러니 먹는 것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동인은 마지막까지 소변을 참고 또 참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눈물 나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사다리차 선반이 마지막으로 물건을 실어 올리고 나서 빈 선반이 밑으로 내려갈 때, 동인은 그만 참았던 오줌을 침대 위에 지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밑으로 내려가는 선반을 보며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방광의 힘을 빼고 만 것이다. 금방 아랫도리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감각은 아직 살아 있는 만큼 오줌이 사타구니 사이를 적시는 불쾌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동인은 사지 마비 환자 중에서 불완전 마비 환자였다. 경추 제일 밑 부분을 다친 동인은 호흡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대소변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도 남아 있었다.
오줌을 지리고 나니 배뇨를 참는 고통도 그런대로 가신 듯했다. 이제 간병인이 올 때까지 오줌을 지린 채로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다.
“잘됐군. 씨발!”
새 간병인에게 첫날부터 이런 창피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했다. 어차피 간병인에게 이런 상황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간병인들은 이런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게다가 사지 마비 환자에게 더 이상 창피한 일이 뭐가 있을까? 대소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다니.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창피함을 알기 때문이다. 창피함이 없다면, 그것은 곧 짐승이나 다름없다. 사지 마비 환자도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의 인간들보다도 창피함과 수치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줌을 지린 채 15분 정도 지날 때쯤, 드디어 새 간병인이 도착했다. 새 간병인은 전 근무자에게서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동인은 왜 이리 늦었냐고 화를 내려고 하다가 간병인을 보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새 간병인은 무척이나 젊었다. 이제 이십대 중반 정도 됐을까? 게다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번에 새로 간병 일을 맡은 유지연이라고 해요. 동인 씨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 네.”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동인 씨 집 열쇠를 놓고 오는 바람에 중간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갔거든요. 죄송해요. 제가 좀 덜렁이라.”
“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동인은 곧 그 말을 후회했다. 지금 침대 위에선 오줌 지린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곧 그녀도 눈치를 챘는지 눈썹을 약간 찡그리는 것을 동인은 알 수 있었다.
‘젠장. 조금만 더 참을걸…….’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새 간병인은 재빨리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벗었다. 안에는 활동하기 편한 옷을 이미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교육받은 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환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침대 시트를 새것으로 갈고, 동인의 오줌 지린 바지를 벗겨 냈다.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는지 동인은 부끄럽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젖은 수건을 이용해 능숙한 동작으로 오줌이 묻은 그의 하체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천사 같은 외모와는 달리 일 하나는 정말 야무지게 잘했다.
동인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서글퍼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정성스럽게 닦아 주고 있는데도 정작 자신의 하체에선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연은 동인의 몸을 깨끗이 닦아 준 다음 새 바지를 찾아 갈아입혀 주었다. 동인은 만족스러워하며 새 간병인에게 수고했다는 말로 보답해 주었다.
“뭘요.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데요. 아직 많이 미숙하죠?”
“아뇨. 깜짝 놀랐는걸요. 나이답지 않게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하셔서.”
“그럼 간병인으로서 합격인가요?”
“네, 수석 합격입니다.”
“정말요?”
수줍게 웃는 그녀의 볼에 작고 앙증맞은 보조개 한 쌍이 떠올랐다. 마치 지금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협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보고 과연 사랑에 빠지지 않을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동인은 지금껏 녹이 슨 채 멈춰 있던 감정의 톱니바퀴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인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베란다 안으로 달빛이 새어들어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약간만 들어 올리는 데도 많은 힘이 필요했다. 팔이 15도 이상 올라가자 부르르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동인은 그대로 팔을 들어 올린 채 버티기 시작했다. 10초, 20초, 30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자 그제야 팔을 내려놓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등에는 땀이 배어났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나른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
3월 27일 화요일
그녀는 보통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첫날의 지각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일까? 동인은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2주가 넘도록 계속해서 30분 일찍 출근했다. 게다간 자신이 직접 꽃병을 사 가지고 와 3일에 한 번씩 새 꽃으로 갈아 주기까지 했다.
동인에게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원 봉사자가 아닌 돈을 주고 고용한 간병인이기 때문이다. 동인과 그녀 사이에는 금전적인 계약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들을 묶어 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인 셈이다. 그녀에겐 시간이 곧 돈인 것이다. 그러니 자기 욕심 때문에 그녀를 일찍 출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인은 언제 기회가 될 때 그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하자마자 지연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득 찬 소변통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가 끝나면 30분 후에 약을 먹인다. 약을 먹인 다음 용변이 마려운지를 묻고, 변의를 느끼면 소변통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대변기를 허리 아래에 받쳐 용변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용변을 보고 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마사지 및 운동을 시킨다. 팔다리를 주무르거나 몸의 위치를 바꿔 준다. 그렇게 해야만 욕창을 방지할 수가 있다. 환자가 계속 한 자세로만 누워 있으면 등이나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환자에게 자유 시간을 준다. 그때는 간병인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쉴 수 있다. 이런 일이 남들이 보기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한 번이라도 남의 똥오줌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성인 남자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몸을 움직여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고 간병인 자격을 취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무경험자가 이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려 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되는지 몰라 당황할 것이다. 또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가 어디가 불편한지 몰라 계속해서 그에게 질문을 해댈 것이다. 한두 번 정도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엔 환자도 슬슬 짜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간병인에 대한 신뢰도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병인 일을 절대로 우습게 봐선 안 된다. 이것은 봉사 정신 이외에 어떤 투철한 직업 정신이 밑받침되지 않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인은 점심을 먹고 나서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는 주로 ‘이카루스’라는 장애인 동호 사이트에서 활동을 한다. 거기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동인은 거의 매일 그곳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자신처럼 멀쩡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앓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었다.
이카루스에서는 장애가 심할수록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회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다. 동인은 인터넷 세상에서만큼은 장애인이 아니었다. 타자를 치고 있을 때만은(비록 한 손으로 치는 독수리 타법이지만)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슨 사이트예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연이 동인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그런 사이트예요.”
“아!”
“여기 카페 주인도 하반신 마비구요.”
“자주 접속하시나 봐요?”
“늘 가죠.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선 저도 우수회원이거든요.”
“그럼 일반인은 가입할 수 없나 보죠?”
“뭐…… 그렇죠.”
동인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일반인’ 이란 말에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마치 그것이 “당신들은 열등한 생물이야.”라고 돌려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우울한 먹구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동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지연은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혹시 메신저 같은 것도 하세요?”
“메신저요?”
“네.”
“가끔 하죠. 인터넷에서 아는 사람들이랑.”
“잘됐다. 메일 주소 좀 알려주세요. 저하고 메신저 친구 해요. 전 밤마다 친구들이랑 메신저로 대화하거든요.”
“아, 네…….”
“왜요? 싫으세요?”
“아, 아니에요. 저야 좋죠.”
동인은 그녀에게 자신의 메일 주소를 알려 줬다.
“오늘 밤에 꼭 들어오세요.”
“네. 그럴게요.”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시커먼 먹구름이 사라지고, 어느덧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 동인은 그녀에게 정말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동인은 지연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하루 종일 자신과 붙어 있어야 하는 것도 힘들 텐데, 인터넷상에서까지 자신을 상대해야 하는 지연에게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연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은 차츰 사라져 갔다. 인터넷상에서 만나는 그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동인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덧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치 평범한 남자 대 여자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인은 타자를 두드리면서 지연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했다.
두 사람은 조용한 공원을 걸으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재치 있게 맞받아치기도 한다. 가끔 그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장난을 가장한 스킨십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녀도 그의 그런 행동이 싫지만은 않다. 아니, 사실은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벤치에 앉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대화는 자정이 넘도록 계속됐고, 동인은 피곤한지도 모른 채 그녀와의 채팅에 빠져들어 갔다.
문득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각. 지연과 채팅을 마치고 나서 잠이 든 시간은 새벽 1시 무렵이었다. 그는 고작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눈을 뜬 것은……?
결코 소변이 마려워서가 아니다. 요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뜬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정적을 꿰뚫는 소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기기기깅 ……끼이익 ……기기긱.”
그것은 마치 두꺼운 철문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어째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동인은 지금껏 이 아파트에 살면서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옆집에서 켜 둔 티브이 소린가 하고 생각했지만, 곧 그것도 아님을 알았다. 다른 소리는 일절 없이,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리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기기기깅 ……끼이이익 ……끼긱끼긱.”
소리는 마치 집 안에 침입한 괴한처럼 어둠 속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동인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간신히 오른손으로 한쪽 귀를 막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소리는 점점 그의 고막을 파고들어 뇌 속까지 울리는 듯했다. 너무나 기분 나쁜 소음이었다.
동인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곧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소음 때문에 미쳐서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손을 뻗어 침대 옆을 더듬기 시작했다. 힘들이지 않고 전등 스위치 박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를 위해 침대 주위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노트북, 전등 스위치 박스, 인터폰, 무선 전화기,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이 침대 위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동인은 스위치 박스에 있는 거실 전등 버튼을 눌러 불을 켰다. 거실 전등이 몇 번 깜빡이고 나서 불이 들어왔다. 어둠이 물러가자 공포감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괴상한 소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불을 켜 둔 채로 한참을 기다려 보았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다시 거실 불을 껐다. 어둠이 거실 전체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베란다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세상이 온통 적막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동인은 괜스레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
3월 30일 금요일
“저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동인이 지연에게 물었다.
“네. 물어보세요.”
지연은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 동인을 쳐다봤다. 그녀의 천사 같은 미소에 동인은 순간 가슴이 설레었다.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지연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다른 일도 많은데, 왜 하필 힘든 간병인 일을 선택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지연 씨 정도면 어디서 다른 일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거든요. 이보다는 덜 어렵고 고상한 직업을…….”
지연은 동인을 쳐다보며 싱긋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도 장애가 있으셨어요. 하반신 마비 환자셨죠. 제가 어렸을 때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거든요. 너무 어릴 때라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어머니가 저를 구하려다가 대신 차에 치이신 거예요. 결국 어머니는 하반신 마비 장애 판정을 받으셨어요.”
지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진지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저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하셨어요. 늘 제가 죽거나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죠.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되고 나서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가 버리셨죠. 어린 저하고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만을 남겨 둔 채로 말이에요.
앞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져 버린 저희 모녀는 집세도 낼 형편이 못 돼서 곧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었죠. 하지만 그때도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어요. 직접 휠체어를 끌고 시장에 나가 일을 하신 거예요.”
“어머니께선 정말 정신력이 대단하셨군요.”
동인은 감탄한 듯 그렇게 말했다.
“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어요. 결코 좌절을 모르는 분이셨죠. 다행히 저희 모녀의 어려움을 알고 주위 분들이 조금씩 도움을 주셔서 지금껏 먹고살 수 있었답니다. 저는 아직도 그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음…….”
동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 늘 곁에서 어머니를 도와드렸어요.”
“아, 그럼…….”
“네,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지연은 그렇게 말하며 동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3년이란 세월은 누군가를 잊어버리기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동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동인은 가슴이 메어 왔다. 그때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사지 마비 환자가 되고 나서, 결국 희수는 그를 떠나고 말았다. 아니, 실은 동인 스스로 그녀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자기 욕심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버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비로소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과 도움 주신 많은 분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나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거라고. 그래서 이 길을 택하게 됐고, 한 번도 그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동인은 이 천사 같은 여인을 보며, 신이 자신에게 마지막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면 자신은 그 하루를 이 여인을 위해 쓰겠노라고 다짐했다.
*
3월 31일 토요일
“쿠웅!”
갑작스러운 충돌!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연쇄 추돌!
“쾅, 쾅, 쾅, 쾅!”
“끼이익…….”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스키드 마크. 사람들의 비명 소리. 아수라장. 화염. 폭발. 즉사한 사람과 부상당한 사람. 공포. 절망. 참혹. 비명. 고함. 구조. 응급조치. 사이렌. 사이렌. 사이렌…….
헉 하고 숨을 들이삼키며 동인은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없이 슬퍼졌다. 그는 자신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곳은 무인도나 다름없었다. 이 좁은 침대는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호섬이고, 그 주위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는 무인도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제 그는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인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나냔 말야! 왜! 왜냐고! 왜!”
그는 어둠 속에 누워 그렇게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굉장히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기기기깅 ……끼이이익 ……끼긱끼긱.”
그 소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소음.
“……기기기깅 ……끼이익 ……기기긱.”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이건 대체…….”
동인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한 채 소리의 방향을 예측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우울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느새 묘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소리는 외부에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리는 저 옆집과 마주한 벽을 통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직감이 거의 확실하다고 믿었다. 이 소음의 진원지는 바로 저 502호가 분명하다! 그러자 조금 전과 달리 강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런 개새끼들. 내 꼴이 이렇다고 우습게 보는 거야 뭐야! 내가 귀까지 먹은 줄 알아!”
“……기기기깅 ……끼이익 ……기기긱.”
“조용히 안 해! 이 씨발 새끼들아! 내가 무슨 귀머거린 줄 아냐고!”
동인은 침대에 누워 목청껏 소리 질렀다. 그러자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소음이 사라져 버렸다.
“두고 봐. 씹새끼들. 수위실에 전화해서 따질 테니까. 씨발…….”
동인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
4월 2일 월요일
“안녕하세요.”
지연이 인사를 하며 들어올 때까지 동인은 인터폰을 붙들고 있었다.
“아니, 아저씨. 제가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니까요! ……한 3시쯤 됐을 거예요 ……그래요. 예…… 예……. 제가 똑똑히 들었다니까요.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고 그 말을 믿으세요? ……아무튼 아저씨가 알아서 해결해 주세요. 저 그 소리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다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아무튼 아저씨만 믿을게요.”
동인은 인터폰을 끊고 나서 지연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지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꾸 옆집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기에 수위 아저씨한테 조치 좀 취해 달라고 한 거예요.”
동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소음이 심한가 보죠?”
“전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동인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했다.
“……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아무래도 좀 수상한 것 같아요.”
“왜요?”
지연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수위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도 옆집 주인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상하죠? 어떻게 새로 이사를 왔는데 얼굴을 모를 수가 있어요.
게다가 다른 이웃들도 그러는데, 옆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새로 이사를 와 놓고 집에서 안 살다니. 너무 수상하지 않아요? 한밤중의 그 괴상한 소음도 그렇고. 분명 안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에이, 설마요.”
지연이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말하자, 동인이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혹시…… 간첩 아닐까요?”
“간첩요?”
“어쩌면 밤마다 누군가와 교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가끔 이상한 말투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지금같이 평화적인 시기가 오히려 간첩 활동을 하기엔 더 편할 테니까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서, 설마요…….”
동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지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연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갔다. 그때 갑자기 동인이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지연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농담. 설마하니 간첩이 옆집에 살겠어요?”
“뭐예요. 정말! 겁이나 주고.”
“아, 미안해요. 지연 씨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에.”
“그럼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아뇨. 수위 아저씨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예? 정말요?”
“간첩은 아니더라도, 뭔가 수상한 사람들이 틀림없어요. 게다가 그 이상한 소음……,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려요.”
동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옆집과 마주하고 있는 벽을 가만히 쳐다봤다. 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
4월 11일 수요일
다가오는 여름을 알리듯 연일 기온이 상승하고 있었다. 여름은 동인에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계절이었다. 무더위야 어차피 에어컨을 켜 두면 해결된다손 쳐도, 화창한 여름에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그에게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희수와 동해안에 놀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징그럽게 많던 피서객들,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 출렁이는 파도, 따가운 햇살, 검게 그을린 그녀의 피부……. 그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 알갱이들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에겐 아직 그녀가 있었다. 그녀만 있다면 다시는 바다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곧 바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는 그 이상이다. 그녀는 하늘이고, 땅이고, 우주 만물이다. 그녀만 곁에 있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세요?”
새로 사 온 꽃을 꽃병에 담으며 지연이 그에게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잡생각을 좀 했어요.”
“에이, 거짓말.”
“거짓말인 걸 어떻게 알았죠?”
“얼굴에 씌어 있는걸요. 거짓말이라고. 호호. 솔직히 말해 봐요. 무슨 생각 했어요?”
“실은…… 지연 씨를 생각했어요.”
“네?”
그녀의 의아한 반응에 동인은 무안해져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 농담이에요. 농담. 흐흐.”
동인은 얼른 표정을 바꿔 사태를 수습했다.
“치이. 동인 씬 참 싱거운 사람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며 지연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인은 혹시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기대를 품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근데 말예요. 요즘 좀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아요?”
지연이 다시 고개를 돌려 동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까완 달리 뭔가 의혹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뭐가요?”
“최근 들어 그런 느낌이 자주 들거든요. 그냥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싶어서…….”
그녀는 왠지 말하기 곤란한 듯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말해 보세요. 뭐가 이상한데요?”
동인은 그녀의 태도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게 말이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거실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네에?”
그녀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했는데, 갈수록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거 있죠. 동인 씨는 그거 못 느끼셨어요?”
“전 그런 느낌은……. 그보다 거실이 줄어들 리가 없잖아요. 무슨 고무줄도 아니고. 하하.”
“역시 그냥 기분 탓이겠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불안해서요. 이런 느낌은 저도 처음이거든요. 왜 거실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혹시, 간병인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심리적인 압박 같은…….”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그녀는 펄쩍 뛰며 말했다.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아아, 미안해요.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괜찮아요. 그런데 거실이 줄어드는 것 같다니, 역시 제가 이상한 걸까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렇더라도 그건 심리적인 원인에서 온 걸 거예요. 실제로 거실이 줄어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지연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인은 어째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 거실은 원래 그대로였다. 그가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거실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절대 불변의 진리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약 먹을 시간인데.”
지연은 서둘러 약봉지에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가지고 왔다. 그러곤 침대 옆에 달린 스위치를 조작해서 침대를 약간 앞쪽으로 기울게 했다. 그녀는 알약을 동인의 입 안에 털어 넣고 천천히 물을 마시게 했다. 약을 먹고 나서 동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쉬는 게 어때요?”
“조금 전에 쉬었잖아요.”
“그게 아니라,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뜻이에요. 한 이틀 정도는 저도 혼자서 버틸 수 있으니까.”
“전 괜찮아요. 그냥 좀…… 아니에요. 곧 이러다 말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동인 씨 놔두고 혼자만 놀러 가고 싶지 않아요.”
“네?”
“아, 소변통이 꽉 찼네. 금방 비우고 올게요.”
지연은 소변통을 들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동인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동인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깼다. 옷에 땀이 흠뻑 밸 정도로 정말 무시무시한 악몽이었다. 그는 사방이 꽉 막힌 한 평 남짓한 공간에 갇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벽이 점점 자신을 향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압사하는 순간, 동인은 간신히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순전히 지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그런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끔찍한 악몽을 꾸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동인은 문득 스위치 박스를 찾아 거실 방의 불을 켰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의 말대로 방의 크기가 조금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착각일 뿐이…….”
그때 또다시 그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쇠가 구부러지고 두꺼운 철문이 움직이는 것 같은 괴상한 소음. 동인은 그 소리가 들려오는 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인 것이다. 동인은 혹시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고 눈을 몇 번 깜빡인 후에 다시 한 번 벽을 쳐다보았다. 조금 기다리자 또다시 벽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벽이 움직일 수가 있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잖아.”
그의 말대로 벽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동인은 이 괴이한 현상과 소음 간에는 분명 알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소음이 사라지자 벽의 미세한 움직임도 동시에 멈춰 버렸다. 동인은 방금 목격한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이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벽이 움직이다니, 벽이! 말도 안 돼 이건. 벽이, 벽이 움직였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분명 움직였어!”
지연이 한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의 방은 조금씩 밀려 들어오는 벽 때문에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이 모든 현상이 결국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옆집 502호였다.
*
4월 16일 월요일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정오가 되자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갑자기 폭우로 바뀌어 버렸다. 라디오에선 여름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라며 떠들어 댔고, 아무래도 상관없을 법한 대중가요 한 곡을 선곡해서 틀어 주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의 선율에 맞춰 비는 베란다 유리창을 마구 두들겨 대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선 지연이 줄자를 가지고 방의 가로 길이를 재고 있었다.
“4미터 20센티.”
그녀가 줄자의 눈금을 보며 말했다.
“3센티미터나 줄다니. 지금까지 줄어든 길이가 총 6.5센티미터. 이대로 가다간…….”
말을 하면서도 동인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연은 줄자를 다시 거둬들였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줄어드는 줄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빗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