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산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괴물은 영원히 계속할 것처럼 쉼 없이 눈을 뿌려 댔다. 조난당한 사람이 같은 지점만 맴돈다는 링반데룽 현상도 방향감각을 잃은 탓이 아니라 실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괴물의 덫인지도 모른다.
주호는 이처럼 많은 눈을 본 적도 없거니와 눈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진 적도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예감은 확신으로 변해 갔다.
휴대전화 액정에는 여전히 통화권 이탈 지역이란 표시가 떠 있다. 기적처럼 눈앞에 불빛이 나타난 건 폭설과 어둠 속을 10여 시간쯤 헤매고 다녔을 때다.
마지막 남은 기운도 거의 바닥이 났고 사방에서 죽음이 스멀스멀 몰려들던 중이었다. 눈 속을 얼마나 헤맸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끔찍한 고통을 동반한 추위가 내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정작 주호가 두려웠던 건 추위가 아니었다.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잠시라도 걸음을 늦추면 그것의 서늘한 기운이 급작스럽게 가까워지는 게 느껴져 주호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주호의 눈앞에 불빛이 나타났다. 그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눈보라 속에서 먼 불빛을 응시했다. 혹시 환영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노란색 불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따스하게 유혹의 빛을 발했다. 불빛과 산장이 진짜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로소 그동안 억눌러 놓았던 공포와 외로움, 초조함 따위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차고 올라왔다. 삶에 대한 희망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몰려들어 왈칵 울음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주호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 얼어붙은 손발을 움직였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느라 다리의 감각은 오래전에 마비됐고 목은 부어올라 따끔거렸다. 너무 아파 누가 지나가도 도와달란 소리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자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왔고 없던 기운도 솟구쳤다. 승일과는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희끗하게 날리던 눈발은 눈 깜짝할 사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폭설로 변했다. 산행에는 제법 자신 있어 하던 승일조차 당황할 만큼 거대한 폭설이 갑자기 쏟아져 내린 것이다. 서둘러 하산을 했지만 엄청나게 쌓이는 눈 탓에 시야도 좁아지고 등산로를 찾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승일이 앞장서고 주호가 그 뒤를 따랐다. 조금만 거리가 벌어져도 눈앞은 금방 하얀 눈으로 가려졌다. 승일의 모습이 사라질 때마다 주호는 불안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승일의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이 몸에서 빠져나갔고 서로를 부르는 신호의 간격도 벌어졌다. 다리는 무거워지고 숨은 가쁘게 차올랐다.
어느 순간 주호는 주위가 무섭도록 적막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불러도 승일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오로지 눈 내리는 소리와 자신의 거친 숨결뿐이었다.
불빛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한참을 더 걸어가서야 노란 불빛과 어둠에 물든 산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기쁨의 탄성이 목구멍을 간질이는 찰나,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어둠과 폭설을 뚫고 길게 이어지다가 사그라졌다.
주호는 얼어붙은 것처럼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욱한 눈발 어딘가에서 비명의 주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주호는 산장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폭설에서 빠져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저만치 멀어진 기분이었다.
눈을 감자 긴장이 풀어지며 엄청난 무게로 피로가 몰려들었다. 의식이 금방이라도 심연 저 아래로 꺼질 것처럼 아득해짐과 동시에 어지러운 현기증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삶의 바로 문턱에서 눈이 감기다니.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잠의 늪은 그를 놓아 주지 않고 수면(睡眠) 아래로 잡아당겼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폭설 속으로 내몰렸다. 꿈속의 자아에게 속박된 몸은 현실 속 주인의 통제를 거부했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이 들었고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웃기는 건 현실에서 본 그 산장이 꿈속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꿈속의 산장은 현실과 달리 무서웠다. 산장 벽면에서는 물이 새는 것처럼 엄청난 양의 피가 배어나왔다.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피는 바닥을 지나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주변의 눈들이 점점 붉게 변해 갔다. 의식은 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몸은 계속 산장으로 이끌려 갔다. 벽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피의 산장에 온 걸 환영해!”
섬뜩한 문구도 문구지만 글자의 필체가 자신의 것과 똑같아 보여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럴 리도 없고 어차피 꿈속에서야 그 어떤 비논리적인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눈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미지가 번쩍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건 어떤 남자의 이마에 도끼가 내리꽂히는 장면이었다. 영상이 너무 생생하고 충격적이어서 바로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헉!”
어느새 산장 문 앞에 와 있었던 그는 두려움으로 비명을 질렀다.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손은 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앞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문손잡이가 와 닿았고 손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강렬한 피비린내와 함께 붉은 뭔가가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여자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의 두 눈이 주호에게 매달렸다.
“살려 줘요!”
온통 피로 덧칠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거북한 기분이 들었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가슴 밑바닥에서 부글거리며 끓어올라왔다. 여자의 뒤에서 끔찍한 뭔가가 달려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주호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하악!”
살을 에는 것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촉감이 오히려 반가웠다. 악몽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려 준 셈이니까.
그는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돌렸다. 우측으론 산장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보였고 좌측으론 거센 눈발이 흩날리는 은빛의 설산이 달빛에 반사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조금 전의 악몽 따윈 단번에 잊어버릴 만큼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서 달려들었다.
주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뼈마디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쩍하고 바닥에서 몸이 떨어졌다. 그는 기계 로봇처럼 부자연스럽게 손발을 움직여 가며 일어났다.
얼굴에 허옇게 눈이 달라붙은 채 그대로 얼어 버려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어오른 목에서는 연방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따스한 온기와 커피 한 모금이 절실히 그리웠다.
주호는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몇 시쯤 된 것일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야광 초침이 2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부터 시간이 2시 12분에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초침도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부터 시계가 멈춘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을 모른다는 게 왠지 불안했다.
산장의 문 앞에 서자 그 끔찍한 꿈속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왜 그런 악몽을 꿨을까. 산장의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정말로 피투성이 얼굴을 한 여자가 달려들면 어쩌나 불안했다.
주호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주호는 기대와 의구심을 동시에 품고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너무 기운이 없어 통나무로 만든 튼튼한 문에서는 소리다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번엔 발로 문을 걷어찼다. 그것도 여러 번.
충분히 크진 않았지만 안에 사람이 있다면 들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문에 몸을 기대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비로소 불길하면서도 꺼림칙한 예감이 들어 산장을 제대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장은 규모가 큰 편이었다. 통나무로 된 긴 측벽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우측 모퉁이를 돌아가자 관리실이란 팻말이 보였다. 다가서니 유리가 모두 깨져 찬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을씨년스러운 사무실이 나타났다. 사무실의 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어두워서 자세히 안을 살펴보긴 힘들었다.
관리실을 돌아가자 화장실이 나왔고 좀 더 나아가니 산장의 현관문 반대쪽 벽면에 붙은 작은 창들이 나타났다. 기껏해야 손바닥 정도 크기의 창은 벽면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남은 개가 장식처럼 붙어 있었다. 주호는 그 작은 창에 차례로 얼굴을 대고 움직이며 안을 살폈다.
천장에 희미한 백열등이 매달려 있고 군대 내무반을 연상시키는 텅 빈 평상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상의 한쪽은 비어 있었으며 다른 한쪽에는 둥그스름하게 이불이 놓여 있었다.
백열등 불빛이 미치는 공간을 제외한 주변부는 너무 어두워 뭐가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안쪽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간신히 보였고 사다리 아래로 음식을 해 먹은 것 같은 냄비와 그릇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에서 문이 잠겨 있는 걸 보면 분명 안에 누군가 있다는 소린데. 혹시 안에 있던 사람에게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무래도 좋았다. 안에 사람이 있든 없든 혹은 죽었든 살았든. 머릿속엔 어서 저 따스한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문제는 현관문을 제외하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 튼튼한 문을 맨손으로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염병할!’
주호는 관리실로 갔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벽면에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산장 바깥의 외등은 들어오는데 이곳엔 왜 불이 안 들어올까. 도무지 캄캄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그제야 주호는 무겁다고 중간에 배낭을 팽개친 걸 후회했다. 그 안에 손전등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곱은 손을 주머니에 비집고 넣어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라이터 켜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불을 천장의 백열등 쪽으로 비추자 불이 안 켜지는 이유가 드러났다. 전구가 깨져 있었다.
라이터를 아래로 향하자 위태로운 불빛 속에 사무실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댓 평 남짓한 사무실 바닥에는 큰 싸움이라도 난 것처럼 사무 집기와 서류 뭉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난장판 사이에는 핏자국들도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책상 위에 무전기로 보이는 기기는 뭔가로 두들겨 맞았는지 박살이 나 있었고 그 옆으로 CCTV 녹화용인 듯한 작은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모니터와 책상에도 어김없이 핏자국이 어지러웠다. 바닥에도 핏빛 발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발자국은 사무실을 나와 다시 산장 입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주호는 핏자국들을 보며 이곳에서 벌어졌을 여러 끔찍한 상황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자기도 모르게 라이터를 끈 그는 산장 출입문으로 돌아가 이전보다 훨씬 세차게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발로 걷어찼다. 그는 작은 창들이 나 있는 옆면으로 돌아가 눈을 갖다 댔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문 좀 열어 줘요! 제발!”
그는 아픈 목을 쥐어짜내며 소리를 지르다 결국은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산장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젠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산행을 그토록 말리던 수정과 다음 달에 무사히 결혼식도 치를 수 있게 됐다고 순간 안도하기도 했고, 또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정말 운이 좋은 놈이라고 자만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신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한 벌을 받는 것일까.
추위는 이제 뼛속까지 스며들어 온몸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눈앞에 따스한 불빛을 보고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얼어 죽을 생각을 하니 입에서는 연방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밤이 깊어 갈수록 바람은 거세졌고 기온도 빠르게 떨어졌다. 내리는 눈발과 쌓여 있던 눈이 뒤섞여 회오리로 변하더니 그가 앉아 있는 곳까지 휩쓸고 들어왔다. 달빛에 반사된 은빛의 설원이 드러날 때마다 그곳에 뭔가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집요하게 이어지던 단조로운 소음 사이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주호는 벌떡 일어나 창에 허겁지겁 눈을 갖다 댔다. 창엔 뿌옇게 서리까지 끼어 시야가 극도로 좁았지만 평상에 걸터앉은 네 사람의 모습을 알아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남자 셋과 여자 한명.
이상했다. 아까는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다 한들 이보다 반가울까. 주호는 기쁨과 흥분에 휩싸여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이봐요! 여기 좀 봐요, 여기!”
그들이 돌아보지 않자 주호는 주먹으로 통나무 벽을 때리고 심지어 머리로 쿵쿵 들이받기까지 했다. 순간 여자가 깜짝 놀라 돌아봤다. 주호는 터질 것 같은 감동에 휩싸였다.
“그래요, 여기! 문 좀 열어 줘요, 문!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아요!”
그는 손짓 발짓을 해 가며 여자에게 애원했다. 그런데 여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창문을 노려보던 여자가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얼굴을 돌렸던 것이다.
“이봐요, 제발 문 좀 열어 줘요. 나 안 보여요? 난 지금 얼어 죽기 직전이라고요! 제발!”
주호의 필사적인 외침에 다시 여자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그는 온갖 불쌍한 표정과 행동으로 여자의 시선을 끌어 보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이번에도 그를 외면했다.
“씹할! 염병할! 지랄맞을!”
온갖 욕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못 알아본 게 아니다. 여자는 분명히 자신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 문을 안 열어 주는 것인가. 음식이 모자라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또 다른 이기적인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용서할 수 없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사람이 밖에서 얼어 죽도록 내버려 두다니. 추위로 고통이 심해질수록 분노와 허탈감도 커졌다.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내가 만약 여기서 죽으면 너희들이 죽인 거야! 간접 살인을 하는 거라고! 이런 씹할! 제발 문 좀 열어 줘! 제발!”
그는 머리를 벽에 받으며 울부짖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어나다다니. 눈 속을 헤매는 것도 아니고 산장 바로 앞에서 이렇게 얼어 죽어야 하다니.
주호는 너무 추워 라이터를 켜서 곱은 손에 갖다 대고 몸을 벌벌 떨었다. 손이 델 정도로 불을 가까이 가져가도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에 활활 불이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온몸에 활활 불을 붙일 방법이 생각난 것이다. 그는 히익 하는 괴성을 지르며 퉁기듯 일어났다.
주호는 관리실을 박차고 들어가 피 묻은 서류 뭉치들을 가슴에 하나 가득 안고 나와 산장 출입문에 틈이 보이는 곳마다 들고 온 종이를 틀어막았다. 바닥에도 옆면의 틈에도 종이를 최대한 꽉꽉 밀어 넣었다. 나머지 종이들은 출입문 바닥 입구에 모두 내려놓았다.
주호는 라이터를 켜서 그 위태로운 불빛을 황홀하게 쳐다보다가 종이로 옮겨 붙였다. 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타올랐다. 그는 관리실로 뛰어가 아까보다 더 많은 서류 뭉치를 안고 돌아와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맹렬하게 타올랐다. 비로소 따스한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온기인지 모른다. 입에서 울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기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기가 스며들자 뻑뻑하던 머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불길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서서 허겁지겁 그 맹렬한 열기를 들이마셨다.
이제 불길은 출입문 전체로 옮겨 붙었다. 그 밝고 뜨거운 기운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으로도 옮아가 기이하게 춤추는 그림자와 형상을 만들어 냈다.
주호는 얼른 창문 쪽으로 돌아가 안을 들여다봤다. 출입문에서 스며들어간 연기가 산장 안으로 자욱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평상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이 동요하는 모습을 확연하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아까 그 여자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호는 알 수 없는 희열에 휩싸여 혼자 소리를 질러 댔다.
“남이야 죽든 말든 지들만 살겠다고? 그래, 얼마나 견디나 보자. 까짓 거 이 산장 다 타려면 아침까진 타야 할걸? 어쩌면 니들 몸뚱이 덕분에 내일 점심까지도 활활 탈지도 모르지. 히익……. 이 개새끼들아!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어서 문 열어!”
창문으로 보니 이제 불길은 출입문 틈으로 파고들어 문 안쪽으로 옮겨 붙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여자가 나머지 세 명의 남자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대며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아마도 문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쟁인 듯했다.
“죽기 싫으면 어서 문 열어! 어서!”
주문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여자가 나타나 창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한 여자는 연기 때문에 주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주호는 여자에게 불을 끌 테니 문을 열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다급하게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는 관리실에서 소화기를 들고 왔다. 혹시 고장 난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소화기는 이내 시원하게 분말을 뿜어내며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기가 무섭게 안에서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가 튀어나왔다. 여자는 아직도 놀라고 흥분한 모습이었다. 주호는 통쾌한 기분을 억누르며 마지못해 사과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칫했으면 다들 불에 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저쪽은 넷이고 그는 혼자였다.
“문만 열어 줬어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자의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했다.
“문만 열어 줬어도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아까 나 봤죠? 근데 왜 문을 열지 않았어요? 계속 문을 열어 달라고 그렇게 소리쳤는데.”
“언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어요? 전 댁을 지금 처음 보는데.”
여자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했다.
“참 나. 아까 창문으로 날 보고도 못 본 체했잖아요. 그리고 지금 문을 연 것도 내가 불을 질렀기 때문 아닌가요?”
여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불을 질러요? 어…… 언제요?”
“몰라서 물어요? 방금 내가…….”
여자에게 보라는 듯 문을 밀어 보이던 주호는 문득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문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슬린 흔적은 있는데 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탄내도 나지 않았다.
침침한 불빛 속에서 여자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쳐다보는 세 남자의 의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앉아 있는 실내 어디에도 자욱한 연기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봐, 친구! 뭔가 착각하나 본데, 문이 불타긴 했지.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물론 자네는 불을 질렀다고 우기겠지만 그건 진짜가 아냐. 자네는 지금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야. 게다가 이런 심한 폭설에는 원래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근데 정말 불을 지르긴 한 거야?’
주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바닥과 주변을 살폈다.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던 불에 탄 서류 뭉치며 소화기에서 뿜어져 나온 축축한 분말 따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은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너무 지친 데다 신경이 예민해져 꿈과 현실을 혼동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성은 여전히 강하게 저항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눈으로 봐. 보면 알 수 있잖아. 아주 간단한 문제라고.
“왜 그래요?”
여자가 사뭇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전에 뭔가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제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서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든요. 아니, 그렇다고 이상한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눈 속을 얼마나 헤맸는지 몰라요. 그렇게 오랫동안 폭설에 갇혀 있다 보면 누구라도 그런 착각을 할 겁니다.”
여자가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여자가 옆으로 비켜섰다. 주호는 고맙다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까닭 모를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그건 마치 커다란 얼음 덩어리 하나가 심장 안쪽에서 출렁하고 움직인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여자의 소리에 주호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이 탐색하듯 주호를 살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호는 보이지 않는 뭔가에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백열등 불빛 탓에 남자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 중 한명이 다가오는 주호를 보고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했다.
“맞아. 저 사람이야.”
남자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날 언제 봤다고 저 사람이라는 거야. 주호는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절 아십니까?”
남자는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불빛 아래로 고개를 내미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주호는 전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마에 도끼가 꽂혀 죽은 남자였다. 물론 현실의 일은 아니지만 주호가 본 환상 속에서 그 남자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대체 왜 자신이 생전 본 적도 없는 이 낯선 남자의 죽음을 보게 된 것일까. 주호의 표정을 본 스웨터 남자의 눈에서도 번쩍하고 빛이 났다.
“당신도 뭔가를 본 거야. 그렇지? 말해 봐, 뭘 봤는지.”
“예?”
남자가 하는 소리조차 꺼림칙한 여운을 남겼다. 당신도라니. 여자가 말했다.
“잠깐만요! 무턱대고 이럴 게 아니고 우리 차근차근 얘기를 하도록 해요. 여기 이 사람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여자의 말에 말없이 지켜보던 나머지 두 남자들도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주호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여자가 말했다.
“우리도 갑작스러운 폭설 때문에 산장에 갇혔어요.”
여자가 앞의 두 남자를 가리켰다. 한쪽은 말랐고 다른 한쪽은 퉁퉁한 편이었다. 여자와 남자 모두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여자는 마른 사람, 퉁퉁한 사람 순으로 소개를 했다.
“여기 두 사람은 저하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예요. 여긴 박태민, 또 여긴 한상호 씨. 그리고 전 김영임이에요. 그리고 여긴…….”
“난 김흥수요. 여기 산장 관리인이 내 친구지.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이 꼴을 당한 거야.”
김흥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호의 환상에 등장했던 그 남자는 꽤 나이가 많아 보였다. 50대 초중반? 어쩌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앞의 세 사람보다 오히려 체격도 좋았고 거친 얼굴로 보아 꽤 험한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 같았다.
“이주호라고 합니다. 친구와 함께 산에 왔다가 조난당했습니다.”
주호는 말을 끊고 인상을 찡그렸다. 목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죄송한데 혹시 따스한 물이라도 있으면 한 잔 주세요. 목이 너무 아파서.”
“잠깐 기다려요.”
여자가 일어나 주방 쪽으로 가며 말했다. 여자가 빠지자 금방 대화가 끊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김흥수와 나머지 두 남자의 관계가 불편해 보였다. 서로 경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호도 김흥수란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가 탐색하듯 계속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점도 신경이 쓰였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거칠고 야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싫었다. 그는 습관처럼 손을 바지춤에 넣어 성기를 주물럭댔다.
주호는 김흥수의 끈끈한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미치지 않는 구석에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불은 뭔가 들어 있는 것처럼 묘하게 부풀어 있었다.
주호는 왠지 이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낯선 느낌이 그 이불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다.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불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두워서 색깔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주호는 왠지 그게 피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문득 관리실에서 본 어지러운 핏자국들이 환영처럼 스쳤다. 주호는 물어보는 것처럼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의 눈길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물컵을 들고 오던 여자도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호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주호가 이불로 손을 뻗을 때였다. 김흥수가 느끼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 보는 게 좋을걸.”
이상하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목소리였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불을 들출 생각을 하자 관자놀이에서 파르르 신경이 떨렸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이불을 들췄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컴컴해서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불빛이 쏟아졌다. 김흥수가 다가와 갑자기 랜턴을 비춘 것이다. 순간 이불 속에 있던 뭔가가 달려드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주호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불 속의 시체는 꿈속에서 산장 문을 열었을 때 피투성이 얼굴로 달려들던 바로 그 여자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주호의 등 뒤에서 김흥수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러게 보지 말라고 했잖아.”
빈정대는 것 같은 그의 웃음 때문인지 너무 놀란 탓인지 욱하고 화가 치밀었다. 주호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김흥수에게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일부러 그런 거지?”
“무슨 소리야? 불이 있어야 안에 뭐가 있는지 볼 거 아냐. 안 그래?”
말과 달리 그의 눈길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짐승의 눈을 연상시키는 그의 노란 눈알은 사람의 몸에서 기운을 빼내 가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주호는 더 이상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렸다. 김흥수가 이불로 시체를 덮으며 말했다.
“저 여잔 내 친구 마누라야. 이 산장 관리인 마누라라고.”
주호가 놀라 그를 돌아봤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물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대답했다.
“내가 했어.”
“예?”
그가 너무도 태연히 말하는 바람에 주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그런 의심에 쐐기를 박듯 단언했다.
“내가 죽였다니까!”
김흥수가 바싹 다가서서 바지춤을 들락거리던 손을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이 손으로 저 미친년을 죽였다고!”
더러우면서도 솥뚜껑처럼 크고 두툼한 손이었다.
“저년이 귀신이 씌어 내 친구를 죽였거든. 그러곤 나한테까지 달려드는 거야. 어떡하겠어. 가만히 앉아서 나 죽여 주쇼 할 수는 없잖아.”
김흥수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주호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그건 아직도 선홍색 핏빛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등산용 손도끼였다. 그러고 보니 주호가 본 환상 속 김흥수의 이마에 내리꽂히던 도끼도 바로 저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