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 제15조 1항

  • 장르: 일반 | 태그: #ZA공모전 #좀비
  • 평점×5 | 분량: 256매
  • 소개: 아프고 병든 사람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미싱은 돌고 돈다. 이미 청춘이 저문 사람들의 주름진 손에서. 더보기

근로기준법 제15조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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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문자가 왔다. 주환은 수프를 한술 뜨려다 말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석 달째 꾸준히 받아온 문자가 이번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재해노동임금 정상입금되었습니다. (금액) 120,000원

주환은 그것을 읽고는 한참이나 반응이 없었다. 그저 돌처럼 굳어버린 채 두 눈만 끔벅일 따름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크게 한 입 베어 문 삶은 감자의 서걱대는 식감만이 사라질 기미조차 없이 입 안 가득 느껴졌다.

그는 애초에 남에게 돈을 받을 만한 노동을 한 적이 없었다. 임금을 받을 만한 직장을 다녔거나, 연금을 타먹을 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루 일과라고는 밭을 일구고, 작물에 물을 주고, 먹을 시기가 된 것을 따다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가에서 매달 꼬박꼬박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기껏해야 정부에서 지원하는 쌀과 김치를 2주치 사고 나면 남는 것도 없는 수준의 돈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판데믹이 일어난 지 벌써 반년이 더 되었다.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동원한 갖은 역학조사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을 밝혀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워낙 마구잡이로 감염이 확산한 터라 최초 감염자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고, 대대적으로 조사를 벌일 만한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인천 항구에서부터 처음으로 공식적인 감염 보고가 들어왔다는 것을 토대로 ‘인천에서 뭔가 시작되지 않았나’하는 추측만을 겨우 내놓았을 따름이었다.

질병관리본부는 사태가 터진 지 이틀 만에 병의 원인균을 특정해냈다. 그에 따라 방역수칙을 세우고 ‘즉발성 광견병(공수병)’이라는 모든 대중들이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서울과 수도권이 마비되어버린 데다, 이미 눈과 귀로 직접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은 감염자들을 통틀어 좀비라고 부르고 있었다.

주환은 수도권 사람들 중에서도 상황이 나은 편에 속했다. 스물다섯이 넘도록 직장이 없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밖에서 고립될 일도 없었고, 변호사 사무실을 옮긴 아버지가 신도시에서도 외진 곳에 전원주택을 마련한 덕에 감염자를 마주할 일도 적었다. 아파트의 숲에 갇힌 채 옴짝달싹도 못하던 도시 사람들보다야 훨씬 더 안전하게 구조를 기다릴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몇 주가 지나도록 구조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구조를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매일같이 시끄럽게 나돌긴 했지만, 정작 도움을 받았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기다림이 정확히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내리 이틀을 굶은 주환은 일견 극단적이지만 타당한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한 달, 두 달이 더 지나, 감염자든 비감염자든 모두 굶어 죽더라도 나라가 무너지진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수도의 기능은 이미 세종특별자치시로 넘어간 뒤였고, 도시를 포기하자는 여론도 80%를 넘어갔다. 물론 수도권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사실상 안전한 사람들만이 내놓은 일방적인 여론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지방으로 피난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차후 부동산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주환과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였다. 난데없이 들려온 벨소리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누군가 대문의 인터폰을 누르고 있었다.

주환은 비로소 감자를 씹어 삼켰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을 들여다보니, 웬 모르는 남자 하나가 종이뭉치를 든 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기껏해야 주환 또래의 남자였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는지 전반적인 인상이 수척했다. 애써 침착한 척 입을 꾹 다물고 있긴 했지만,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적잖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주환은 이번에는 창가로 다가가 대문을 내다보았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일행은 딱히 없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고 넘겼겠지만, 품에 안고 있는 서류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행색을 보아하니 혹시 질병관리청에서 파견된 공무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조금 전에 받은 문자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환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고는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뒤, 금속 배트까지 챙긴 뒤에야 비로소 대문으로 향했다.

공권력이 애매하게 살아남은 탓에 사방에서 공무원을 사칭하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한번은 가스를 검침하겠다며 문을 열어달라다가, 주환이 대문에 미리 체인을 걸어둔 것도 모른 채 문을 열어주자마자 있는 힘껏 잡아당긴 바람에 밑천이 드러나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주환은 체인을 단단히 건 뒤, 겁을 주기 위해 한껏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살짝 문을 연 채 그 사이로 통보하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마냥 호의적이진 않은 태도에, 덩달아 상대도 주눅이 들었다. 그는 품에 안은 서류를 고쳐 안으며 주눅 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어… 혹시, 박주환씨 댁이 맞을까요?”

“맞는데요?”

“그… 혹시…. 아버지께서 지금 시설에 계시죠…?”

주환은 그것을 듣자마자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눈앞의 상대가 공무원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는 들고 있던 배트를 늘어뜨린 채 다소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는데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 사실 저희 어머니도 거기 계시거든요.”

“그래서요?”

“네…. 주환씨도 아버지 못 보신 지 오래 되셨죠?”

“석 달 됐죠.”

“저도 그쯤 됐어요. 한 번쯤은 만나 뵙고 싶으실 텐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규정상 면회를 못 가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 서명을 좀 받으러 왔어요. 면회 허가를 받을 수 있게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소중히 품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어림잡아 수십 장은 넘어 보였고, 페이지당 적혀있는 이름도 수십 개는 족히 넘어 보였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탓에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에는 회색으로 때가 탄 볼펜 한 자루가 놓여있었는데, 단지 그 모습만으로도 서명을 받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주환은 별생각이 없었다. 서명쯤이야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이었지만, 측은한 마음에 차마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문틈으로 넘겨달라고 하려다가, 도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고는 선뜻 체인을 풀며 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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