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태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이 천호산(天護山)인데, 이 천호산은 종래의 황산(黃山)을 왕건이 고쳐 부른 것이다. ‘황산지야(黃山之野)’ 혹은 ‘황산지원(黃山之原)’으로 등장하는 황산벌 전투의 현장이 이 부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황산을 소개하면서 백제군의 황산벌 전투와 후백제군의 항복 장면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전투와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의 전투가 동일한 장소에서 벌어졌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실제로 현재의 개태사 앞으로는 천호산과 계룡산 사이에 형성된 구조곡이 자리하고 있다. 구조곡 좌우로는 험준한 산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곡을 통해서만 연산에서 대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앞서 본 것처럼 당시 신라와 백제의 중요한 교통로가 보은 – 옥천 – 탄현 – 대전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대전과 연산을 잇는 통로가 개태사 앞의 구조곡 뿐이라면, 후백제군이 고려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백제군도 신라군과 이 부근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즉 대전 – 두미를 거쳐 구조곡을 빠져 나오는 신라군을 기다렸다 현재의 연산리(連山里), 관동리(官洞里), 청동리(靑銅里), 고양리(高陽里) 일대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을 벗어나면 부여까지 벌판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 싸울 곳이 없다. 당연히 백제군이 설치했다는 삼영(三營)은 관동리에서 청동리를 연결하는 구릉상에 있었다고 생각되며, 주된 전장은 연산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 서정석, 「백제 산성을 통해 본 황산벌전투의 현장」, 『역사교육』 제91집, 2004, 150~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