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리뷰
좀머 씨, 좀머 씨! 당신은 어딜 가려던 건가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좀머 씨 좀 보세요. 저러다가 죽겠어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한 줄 요약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디를 향해?
쥐스킨트의 이야기는 향수, 콘트라바스 다음으로 이번이 세 번째다. 이걸로 확신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작가로 아시모프와 위어, 그리고 쥐스킨트를 꼽겠다. 단 한 순간의 지루함도 용납하지 않는 꿀-잼 작가로 말이다.(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늘 그렇듯 철저한 나의 기준에 맞춘 평가이니 ‘난 아닌데?’라고 해봤자 내가 답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저런!)
동시에 세 번째로 쥐스킨트를 접함에도 불구하고 향수-콘트라바스-좀머 씨 사이에 어떤 긴밀한 연결점이나 공통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쥐스킨트라는 사람 자체가 내뿜는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문체)과 디테일한 지식을 파고듦으로써 확보되는 시대의 정경, 한 명의 삶이 내뿜는 향취, 그리고 유년의 정서까지.(그리고 약간의 씁쓸함도)
바꿔말하면 좀머 씨 이야기는 향수처럼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콘트라바스처럼 희곡도 아니고(사실 난 콘트라바스가 희곡-레제드라마-이라는 사실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어떤 마흔 넘은 화자의 유년 시절의 회상 속 등장하는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좀머 씨’와 ‘나’의 이야기랄까.
작품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1. 나의 아주 어린 유년 시절과 더불어 좀머 씨에 대한 회상
2. 나의 육체적 성장과 더불어 인생의 부조리함을 느끼던 시절 마주한 좀머 씨
3. 나의 육체적 성장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좀머 씨
첫 단락에서는 좀머 씨 이야기의 그 유명한 대사이자 좀머 씨의 유일한 대사인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가 나오고, 두 번째 단락에선 내가 각종 부조리함에 지쳐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때, 아주 잠깐 쉬려고 하는 좀머 씨를 보고 다시 살게 된 이야기가 나오고, 세 번째 단락에선 청소년 시절에 좀머 씨가 호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최후의 이야기가 나온다.
좀머 씨는 누구인가? 좀머 씨는 매일 같이 집을 나와 걷는 사람이다. 사실 이야기 자체만 두고 보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감도 있는, 상상하면 할수록 상상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다. 매일 같이, 매일 같이 나와 걷고, 또 걷는다. 누가 불러도 대꾸하지 않고, 제 3의 다리인 지팡이를 짚으며 숨 가쁘게 걷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악재도 그를 막을 수 없고,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절박한 외침과 베풀어지는 호의에도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며 악착 같이 홀로 걷는다. 그러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쉴 때면 그조차 안식을 위한 쉼이 아닌, 지극히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한 듯한 괴로운 신음과 함께 머지 않아 일어나 다시 걷는다.
그는 정말이지 비현실적일 정도로 치열하게 걷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아주 조용히 호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좀머 씨는 누구인가? 누구는 폐소공포증 환자라고 하고, 누구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누구는 괴짜라고 하고, 누구는 미쳐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좀머 씨는 내 이웃, 내 친구, 내 주변 사람이 아니다. 내 생활 반경 내에 가끔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를 신경 쓴다고 득이 되는 것이 없으며, 그를 무시한다고 해가 되지 않는다.
좀머 씨는 누구인가? 내 이웃이 아닌 누군가. 그토록 열심히 걸음에도 누구도 목적을 알지 못하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왜 걸어야 하는지 뒤에서 수근거릴 뿐이다. 좀머 씨를 향한 호의조차 좀머 씨를 향한 호의가 아닌 ‘비바람 속 혼자 걷는 이’를 위해 베푼 호의였을 뿐이다.
좀머 씨는 누구인가? 그는 왜 자신을 고집스럽게 몰아붙이는가? 그는 어째서, 왜 그렇게 치열하게 나아가는가? 그는 어째서 자신에게 약해지지 않고 안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움직이는가? 그는 왜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할까? 왜 편히 죽지 못한 채 방랑하는가? 그의 치열함은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디로 나아가는가?
좀머 씨는 누구인가? 나는 좀머 씨가 생소하지 않다. 좀머 씨의 삶이 마치 누군가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좀머 씨의 유일한 외침이 괴짜의 헛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좀머 씨를 안다. 그건 어쩌면 내 주변에 좀머 씨가 있기 때문일 수 있고, 어쩌면 나를 보는 타인이 나를 좀머 씨로 보기 때문일 수 있다.
좀머 씨는 누구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와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좀머 씨를 향해 함부로 호의와 관심을 베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치열한 삶에 내 발을 들이밀기엔, 나의 삶이 그토록 치열해보지 못했으므로. 작중 화자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려다가 좀머 씨의 괴로운 신음과 휴식을, 그리고 재차 나아가는 좀머 씨를 보며 다시 살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자신의 삶이 그토록 치열하지 못했음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치열한 삶은 무엇인가? 작중 화자는 세상에 의한 압력을 얘기한다. 이래라, 저래라,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수많은 압력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고 옥죈다. 그렇기에 우리는 치열해지지 못하는가? 그 압력에 맞춰진 삶은 치열해질 수 없는 건가? 압력을 이겨내기 위한 치열함은 어떻게 갖춰나가는가? 좀머 씨처럼 나아가기 위해선 어째야 하는가?
좀머 씨는 답해주지 않는다. 물어본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칠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호기심조차 좀머 씨를 향한 압력으로 작용한다면, 치열한 삶이란 건 어쩌면 타인에게 간구해선 얻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좀머 씨는 결국 구경거리에 불과한 타인이거나, 치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거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러다가 죽겠어요! 그 외침은 철저하게 타인의 것이다. 타인만이 그 말을 외칠 수 있다. 그 ‘허튼 소리’는 결국 외침에 불과하다. 좀머 씨는 ‘저러다가’ 죽지 않았다. 그 누구도 ‘저러다가 죽겠어요!’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치열한 삶에 죽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을 향한 전속전진 앞에 ‘저러다가 죽겠어요!’는 허튼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좀머 씨처럼 살아야 할까? 나의 삶은 좀머 씨여야 할까? 그건 그 누구도 답해주지 못한다. 좀머 씨는 언제나 둘 중 하나다. 구경거리에 불과한 타인이거나…… 치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거나……
그러니 좀머 씨는 유일한 외침을 타인에게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러니 나 역시 외쳐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